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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pr 04. 2021

인생의 나침반

프롤로그- 완행열차의 정거장이 되어 준 책들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과하게 값이 매겨진다.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도 조금씩 옅어져서 사실보다 조금 더 아름답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기억의 왜곡현상이다. 빛바랜 필름 사진의 색감이 더 따뜻해 보이듯이 말이다. 당장 필요가 없다고 처분한 것들에게 복수를 당하고 있는 걸까. 내 손으로 직접 버린 물건들에 대한 미련은 생각보다 크다. 그때는 그것이 소중한 추억이 될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버리지 않았을텐데 하고 아쉬워지는 물건들이 있다. 습작품을 담은 플로피 디스트가 그렇고 수많은 카세트테이프와 수십 통의 편지들이 그랬다. 그중 제일 아쉬운 것은 어릴 적 읽었던 추억의 책들이다.


사실 이것들을 모두 다 껴안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후회라기보다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뒤롤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사진첩에 쌓인 먼지를 닦았고 옛글들을 찾아 책장을 뒤졌다. 여행스케치 노래를 었으며 창고를 뒤져 편지함을 꺼내왔다. 사진 속에서 발견한 옛 친구가 무척이나 반가웠으나 그들과 불렀던 여행스케치의 노래는 다소 촌스러운 멜로디로 다가왔다. 소설 습작품은 지금 보니 유치해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 글을 완성하고 서서히 창문을 밝히는 아침의 인사에 행복했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모범생이라 공부만 할 줄 알았어요."

이년 전쯤 만나 친해진 불교대학의 동기들 모임에서 은 말이다. 나를 모범생이라 생각한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활발하고 생기 있던 모습이 참 좋았는데."

친정에 올 때마다 한 번씩 만나는 어린 시절 친구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잊히지 않다. 나는 스스로 변화가 적은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하루, 한 달, 일 년은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래서 잘 몰랐던 것일까. 타인의 시선 속에 담긴 나의 객관적 모습.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로 내가 정의될 때, 는 어떤 사람인가 질문하게 된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던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였다. 세계여행을 꿈꾸던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평범한 게 불만인 작가 지망생이었다. 지금은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란 말을 좋아하며 현모양처 같은 큰 목표는 세우지 않는 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세계일주라는 단어는 새해 소망의 1번에서 7~8번 정도로 밀렸났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둘 다 조금씩 어색하고 낯설긴 하다. 변해버린 내 모습에 좋은 점도 아쉬운 점도 반반 정도다.


완행열차 같은 삶에도 수많은 정거장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과감하게 다른 열차로 갈아타기도 했다. 현재 타고 있는 이 열차 또한 익숙한 풍경 속을 달리는 듯 하지만 매일 다른 정거장으로 나를 이끌 것이다. 세상에 악다구니를 퍼부운 오늘의 나는 아무것도 빼앗긴 적 없는 어제의 나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었듯 톨스토이를 만나지 못한 어제와 '전쟁과 평화'의 마지막 장을 덮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 인생 글로 쓰면 소설 열 권은 될 거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부러웠다. 인터넷 자서전 강좌를 다 듣고 나서 나도 나에 대해 써 보고 싶어 졌다. 그런데 도무지 나의 인생을 한 권으로 엮을 만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되도록 많은 것들 사이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책이었다. 터닝 포인트를 만든 것도 선택의 순간에 극성이 되어 준 것도 책이다. 책 해결책이고 다정한 친구였다. 책과 함께 일 때 못나 보이던 내 삶도 존중할 수 있었으나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책을 멀리 했을 때 삶은 피폐했다. 고된 하루하루 속에서도 '인생의 나침반'이 책이었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을 소재로 한 글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써 보고자 했으나 결국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뜬금없이 떠오른 추억의 책들을 소환하여 15개의 꼭지를 만들어 보았다. 두 시간이 이십 분처럼 지나갔다. 놀이에 몰입 한 아이가 느꼈을 법한 희열이었다. 지금은 없는 내 보물들, 내 손으로 버렸기에 더 간절해진 그들을 오롯이 기억으로만 소환할 수밖에 없다. 읽기에서 시작해서 다른 읽기로 이어지던 작은 간이역 같은 책들. 그들과의 추억을 되살려 평생 옆에서 나를 지키게, 살아있게 하고 싶다는 들끓는 열정으로 이 매거진의 문을 조심스레 연다. 나의 읽기와 쓰기가 나를 잘 정리하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는 근사한 정거장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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