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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Mar 18. 2022

덕질의 비경제적 유용성에 대하여

    

금사빠 냄비 덕후. 며칠 전 스마트한 세상을 유랑하다 만난 덕질 유형 테스트 결과다. 마침 한가했던 나는 나보다 더 한가로운 사람이 만들었을 법한 비경제적인 테스트에 자진 참가자가 되었다. 몇 개의 질문들을 건성으로 체크하자 나온 결과는 금사빠 냄비 덕후,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덕질하지만 금사빠 기질이 있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쉽게 새로운 사랑을 만나곤 함’. 어머 어머 어머, 맞네 맞아. 용한 점쟁이라도 만난 것 마냥 신기했다.     


많은 것들과 금방 사랑에 빠졌지만 파르르 끓었다 스르르 식었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 j-pop에 빠져 비공식적 루트로 녹음된 테이프를 돈 주고 팔아도 보았고 두 눈이 벌개 지도록 미드 '24시'를 24시간 동안 보았으나 지금은 노래 제목도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강경옥의 '별빛속에'를 읽으며 삶의 지침을 얻었고 황미나의 '불새의 늪'으로 역사 공부를 했으나 지금은 희귀품이 된 그 만화책들은 새로운 책들에 자리를 내주고 재활용장으로 흩어졌다. 욘사마와의 데이트를 꿈꾸며 수업시간에 공들여 쓰던 나의 러브레터는 그 별명이 잊히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먼지 쌓인 사진앨범과 접속되지 않는 싸이월드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을 나의 옛사랑들이다.     


뜬금없는 추억 소환에 재미가 붙자 테스트의 구체적 내용을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화면은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조금 귀찮아도 다시 해보지 뭐. 나는 건강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듯 진심을 조금 더 담아 체크를 했다. 좀 전에 내가 무얼 눌렀지 알쏭달쏭 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앞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첫사랑 덕후, '덕질의 대상에 대해 물어보면 누구보다도 행복한 얼굴로 기나긴 연설을 시작하며 스파크 튀던 순간을 끝없이 되새김질하며 덕질하는 편'. ‘왜 다르지’라는 의문은 금세 ‘어머 어머 어머 어머, 맞네 맞아, 이건 더 맞아’로 변했다. '어렸을 때 크게 한 번 아픈 적 있었겠는데' 같은 점쟁이의 말에도 믿음은 굳건해지는 법. 감탄사가 인색하지 않게 터져 나왔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그 설렘을 좋아한다. 그 시작은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2000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애 관찰 아이노리’라는 제목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다. 짝짓기 프로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그 프로는 여자 셋 남자 넷이 러브 웨건이라는 분홍색 버스를 타고 전 세계를 돌며 짝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함께 여행을 하다 좋아하는 멤버가 생기면 고백을 한다. 받아주면 함께 귀국, 그렇지 않으면 남아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계속한다는 설정이다. 골방에서 스크린을 통해 맞이한 아프리카의 자연과 그곳을 여행하며 성장해가는 평범한 주인공들, 그들의 사랑과 실연, 우정과 다툼까지 청춘의 인간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낭만적인 가사에 취해 따라 부르게 되는 팝 발라드 풍의 주제곡들까지. 종합 선물세트가 따로 없었다. 키무라 타쿠야가 나오는 드라마보다 더 설레고 그 해 최대 히트곡이었던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벚꽃 언덕'보다도 더 감미로웠다.     


1년 넘게 아프리카를 돌며 여행을 했던 한 참가자는 찌질한 캐릭터에서 근사한 남자로 변해가며 마음을 설레게 했다. 때로 만날 수 없는 첫사랑을 향한 과도한 그리움이 나를 스토커로 만들었다. 밤새 일본 사이트 검색창에서 아이노리 멤버들의 뒷이야기를 수소문했다. 그가 하라주쿠에서 아프리카 용품점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일대를 어슬렁거렸다. 각본이 따로 있다느니 연예인이 되려는 것이 목적인 참가자라느니 비화들이 많았지만 많은 커플들이 실제로 결혼을 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도 설레는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첫사랑 '아이노리' 만큼 설레지는 않지만 지금도 연애 관찰 버라이어티 프로를 즐겨본다. '짝'을 시작으로 '더 로맨틱' '하트 시그널', 일본 프로그램 '테라스하우스'까지. 요즘은 여덟 살 딸과 함께 '나는 솔로다'를 보기 위해 매주 수요일을 기다린다. 평범한 사람들의 극본 없는 러브스토리는 꿈, 여행, 사랑을 가슴에 품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해 준다.     


그러나 나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 덕후, '돈과 시간과 체력을 아낌없이 쓰며 덕질로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주변 사람들이 내가 덕질에 열정을 쏟는 모습을 멋있다고 얘기해주는 경우가 많음'이나, 비계중독형 덕후, '수줍지만 어디서든 사랑을 열렬히 외치고 덕질이 잘 안 풀리면 현생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며 덕질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소비에 별로 망설임이 없음'이 되고 마는 대상이 있다. 금세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첫사랑이라 할 수도 없지만 40년이 다 되어가도록 옆을 떠나고 싶지 않은 존재. 사그라들지 않는 사랑인지 정복할 수 없음에서 오는 집념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책’이다. 외모로 사람을 놀리는 아이들을 무시하기 위해서 읽었고 외로워도 괜찮은 척하고 싶어 읽었다. 허공에 인사만 하게 되는 책들을 글자만 읽기도 했고 밑줄이 빼곡히 그어지는 책을 얼마 남지 않은 용돈같이 아끼며 읽기도 했다. 흔들리는 출근길 버스 안에도, 지루한 수업 시간 교과서 밑에도, 홀로 누운 야간열차의 머리맡에도 젖병이 널브러진 어지러운 방에도 책이 있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혼자서 밥을 먹을 때도 책이 나를 따라왔다.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은 친구이자 설레는 애인 같았으며 쓴소리 하는 인생 선배이자 막막한 앞날을 밝히는 스승이었다. 못다 읽은 책을 쌓아두고도 도서관에 가면 다 취하지도 못할 것들에 탐욕을 부리는 나를 발견한다. 이 덕질은 삶(生)과 강제 이별당하는 날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욘사마의 아내 박수진을 검색해보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함께 즐길 사람 없는 추억의 노래를 길거리서 소리 내어 부르는 만행을 자진해서 저지르기도 한다. 바구니에 책이 담길 때 가계부 상황을 떠올리며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지만 모든 덕질은 비경제적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극복하고서라도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것 같다. 20년 넘게 휴덕 중이던 글쓰기에 다시 입덕 하고 보니 덕질의 유용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에 빠져 혼자 웃고 울었던 그 시간들이 문장이 되고 문단을 이루어 글로 재현되었다. 틈틈이 또는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그 무언가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비경제적 유용성을 내포하고 있었던가보다. 욕심이고 열정이고 생의 흔적인 덕질을 통해 삶이 더 넓은 가지와 잎으로 풍성해졌다. '생은 우리가 하는 미친 짓으로 위대해진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기꺼이 금사빠 냄비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다. 여전히 첫사랑처럼 강렬한 덕통 사고를 기다린다.




오늘 아침 넷플렉스, 연애실험 블라인드 러브 일본편을 보았습니다. 솔로지옥, 미래일기를 거쳐 나는 솔로 본방을 시청하 블라인드 러브를 보며 뭉클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니 사람이 참 변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글쓰기나 책읽기보다 더 좋아하는 건 티비보기구나, 변함없는 '덕질'이 생각나 작년에 썼던 글을 꺼내 보았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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