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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Feb 20. 2021

내일은 몇 점의 하루가 될까

오늘이 되었습니다. 시험 치고 오겠습니다.

아직 이른 봄꽃 소식이 만발한다. 비 온 뒤 날도 많이 따뜻해졌으니 꽃 피는 주말에 집에 있기란 섭섭하다. 아니다. 봄꽃이나 날씨는 핑계이다. 비가 오면 차 한 잔 하기 좋은 날이니까, 더우면 더위를 식혀볼까, 단풍이 아름답다는데, 눈이 오면 눈이 오니까, 안 오면 안 오니까 하는 갖은 이유를 만들 것이다. 사실 이런 좋은 날에 집에만 있는다는 건 섭섭한데,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진심이 아니다. 오랜 습관 같은 것이다.      


나는 집에 잘 붙어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이 여의치 않으면 나들이, 나들이가 여의치 않으면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아야 아픈 몸도 나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무슨 역마살이 있어서인가 싶기도 했는데 돌아보면 내가 나를 인정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잣대로는 보잘것없는 내가 혼자 여행하는 순간만큼은 제법 믿음직스럽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자유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인생의 목표 같은 거창한 것은 없지만 두꺼운 책을 읽기 위해 오늘 하루 읽어야 하는 책 페이지를 소분하는 소소한 계획 짜기는 즐긴다. 해야 할 일 목록을 차례로 적고 끝낸 것에 하나씩 쫘악 밑줄 긋는 순간은 사이다 마신 후 나도 모르게 나오는 트림 마냥 속이 뻥 하고 뚫리는 느낌이다. 플래너의 빨간펜이 지나간 자리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물인 것 같다. 열심히 살뿐이지 ‘잘’인지 숙고하지 않는다. 진짜 속이 뚫리는 것인지, 뚫리는 기분만 드는 것인지도 헷갈리며 인생도 이렇게 미션 클리어 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일상의 의무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 떠난다고 거창하게 의미를 붙이곤 했지만 다람쥐 쳇바퀴가 배경만 이동했을 뿐 똑같은 방식으로 돌고 있었다. 5분 단위로 짠 계획표를 들고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였다. 그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또한 참으로 정성스러웠다.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고 식당을 검색하고 숙소를 비교했다. 여행지의 역사나 문화를 미리 알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오리라고 책도 챙겨 읽었다. 이동하며 읽을 책,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다운로드 받으며 감동받을 준비를 했다. 멋진 대학생활을 꿈꾸며 공부해야지 다짐하는 괴로운 수험생 같았다.


 돈도 시간도 부족한 여행이었기에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만 한다는 본전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핸드폰 로밍 서비스도 제대로 되지 않던 때였으니 세심하게 준비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낸 과제를 해냈다는 그 성취감이 좋았다. 이번 여행은 85%의 적중률이었어. 90점 정도군,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점수표를 매기곤 했다.     

 

정답을 확인하러 가는 여행의 매력이 조금씩 빛을 바래게 되는 뜻밖의 순간들은 조심스럽게 하나 둘 찾아왔다. 블로그 사진에서 본 풍경을 기대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올랐으나 너무 많이 봐서 익숙해져 버린 그 모습에 전율은 없었다. 또는 사진보다 못한 풍경에 사기라도 당한 것 마냥 분하기도 했다. 그 뒤로는 일부러 여행지의 사진을 미리 보지 않았다.      


성수기 열차표를 구할 수 없어 며칠간의 일정을 하루 만에 고스란히 수정해야 했을 때도 난감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새로운 만남과 풍경이 나를 낯선 곳으로 초대했다. 뜻하지 않은 그런 만남은 클리어 된 미션보다 훨씬 오래 설레는 추억으로 남았다. 길치인 내가 꼭 그 음식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항상 100점 도전에 실패하는 제일 큰 요인이었으므로 제일 빨리 미련을 버리고 계획표에서 잘라냈다. 수험생의 고달픔이 조금 덜어졌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계획대로 된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 말에 진짜 고개가 끄덕여지기까지, 대비되지 않은 일이 일어나 갑작스런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즐기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현명한 사람은 미루어 알고 어리석은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데, 나는 후자다. 경험이 가져다준 것이고 몸이 익힌 여유다.      

계획표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그래서 여전히 목적지를 정한다. 어디든 가보려 한다. 공부도 하고 준비도 한다. 너무도 천편일률적인 여행 루트를 짜게 마련인 그 마음을 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새로운 마주침에 관대해졌다. 과정의 수고로움을 아쉬워하지 않고 인연에 따라 목적지를 수정하는 유연한 물이 되어 자유롭게 흘러보고 싶다.      


‘꼭 이래야 한다는 것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 자유인. 오늘도 내일의 자유인을 위해 계획을 짠다. 내일은 뒷산을 걸어 올라가 몇 그루 소박하게 핀 매화를 보고 단골 칼국수집으로 가서 진한 들깨 칼국수를 먹기로 정해두었다. 이런 여유로운 일정이라면 새로운 마주침도 미션 클리어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고 머리를 굴린다. 내일은 몇 점의 하루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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