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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Feb 16. 2021

우리의 아름다운 거리

커피와 조금씩 이별하는 중입

아침 커피 한 잔과 쇼팽 발라드 N2. 이상적인 아침 분위기다.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만이 이 둘의 조합을 가능하게 했기에 평일 아침의 커피 한 잔 값은 프리미엄 한우 세트보다 값지다. 커피 내리는 순간 집 안에 퍼지는 진한 향은 여유의 내음이다. 나는 카페인 힘을 빌려 아침의 몽환을 떨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살짝 겉멋 든 듯 느껴지는 그 감정을 즐기려 커피를 내려왔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사치를 마음껏 누리는 기분은 덤이 아니라 메인인 것이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이 당연한 세상사인가. 빈 속에 마셔도 늦은 밤에 마셔도 하루에 몇 잔을 마셔도 화장실을 좀 자주 가는 게 흠일 뿐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 얼음 동동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물처럼 들이키는 음료이지 않았나. 남편의 맥주 친구는 되지 못하고 옆에서 맥주잔에 커피 부어 쨍 부딪혀주는 센스도 있었다.


문제는 갑자기 나타났다.  공복인 아침에 마신 커피에 속이 매스꺼웠고 밤에 마신 커피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는 커피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매일 밤 11시에 커피를 마시고도 의심을 못할 정도로 나는 커피와 밀접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어느 밤, 부정맥 증상처럼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으니 겁이 났다. 그렇게 아침의 커피 한 잔이 식후의 겨우 한 잔으로 바뀌어 갔다. 자의든 타의든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들은 이렇게 운명처럼 갑자기 다가와 내 심장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10여 년 전에도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한 친구가 있었다. 대학 동기로 만나 같은 소모임의 일원으로 대학생활의 많은 날들을 함께 했다. 여섯 명이 잘 어울려 다녔어도 그녀와 처음에 깊게 친하진 않았다. 예쁘고 배려심 많고 재밌는 그녀가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지만 여섯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의미 있는 여우로 다가온 것은 오히려 대학을 졸업한 후였다. 졸업 후 좋은 일자리를 구해 서울로 이사 간 그녀와 부산에 남아 학업을 이어가던 나는 사진이라는 취미를 공유하며 물리적 거리가 무색하게 가까워졌다. 인터넷이라는 열차를 타고 부산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주 만나 마음을 나누었다. 아,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란 이런 것이다는 생각도 했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우정에 나는 들뜨고 기뻤다. 우리 사이가 여지없이 좋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순간, 그녀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았다.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고 우리는 그렇게 멀어졌다. 그녀에게 향한 길이 아름다운 거리가 아닌 일방통행로였을까.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싸워 본 적도 섭섭해 본 적도 없는 친구와 단칼에 헤어진다는 것은 제법 난감한 일이었다. 친구가 인생의 전부 같기도 했던 때를 함께 해 온 우정이 단 한 번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래성 같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 후로도 벌써 또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격정적이던 어투가 조금씩 덤덤해졌고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 커피 애호가를 자처하는 시대다. 나만해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10여 년을 지냈다. 그 전의 커피는 수많은 장미에 불과했다. 녹차라도 좋고 딸기 셰이크로 대체되어도 괜찮았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술자리를 즐겼듯 카페에서 수다를 즐기며 커피 한 잔에 담긴 분위기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커피는 만남의 수단 정도로 생각했다. 카페에 다양한 메뉴들이 있으면 굳이 커피를 고집하지 않았다. 특히나 아메리카노를 돈 주고 사 먹는 것은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라 여기곤 했다.


커피가 하나의 장미꽃으로 내게 온 것이 벌써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 10년이 되어간다. 그 강렬한 만남은 추운 광안리 밤바다를 거닐다 들어간 카페에서 마신 한 잔의 라테였다. 진하고 뜨거움에 강렬히 반응하는 내 혀의 감각을 충족시켜주는 커피였다. 나란 사람은 '아 그 사람 참 좋더라. 진짜 진짜 좋더라.'라든가 '아 이거 너무 맛있어. 진짜 진짜 맛있어.' 정도의 감상평밖에 내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식가들이 음식보다 더 화려한 평을 늘어놓듯 그럴싸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은 적극 표현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라 급한 마음에 같은 말을 두세 번 반복하고야 만다. 게다가 평가에 후한 심사위원이다. 그 바닷가 앞의 카페라테는 보통명사 '커피'를 고유명사로 바꾸어 놓았다.


그즈음 남편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을 했다. 남편의 친구는 스타벅스에서 오래 근무한 직원이었다. 허물없던 사이라 유통기간이 다 되어 가서 팔기엔 적당치 않은 원두를 가끔 보내주셨다. 원두 봉투를 열었을 때 한꺼번에 확 몰려오는 그 진한 커피 향에 반하지 않을 사람 몇이던가. 게다가 '공짜'란 녀석은 생각보다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왕 보내준 비싼 것은 또 열심히 먹어야지. 원두를 갈기 위해 그라인더를 구입하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 드리퍼를 샀다. 도자기 드리퍼, 더치커피용 도구, 모카포트와 캡슐 커피 기계,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플라스틱 드리퍼로 시작된 커피 도구들은 점점 고급스러워졌다.


좋아하게 되면 알고 싶어 지는 게 사람 마음이었던가. 커피에 다가가기 위해 원두를 살 때마다 상품 소개란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러나 원두의 이름과 생산지들이 제각각이고 외우기가 어렵던지, 몇 번 읽어도 그 이름조차 기억해 내는 것이 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미각이라도 좀 남달랐다면 그 맛과 향기를 기준으로 구별하기가 좀 용이했으려나. 주문한 커피가 도착하면 '과일의 화려한 산미와 초콜릿 같은 단맛을 살리기 위해 짧게 로스팅하였습니다.'라는 문구를 다시 찾았다. 커피를 마시며 어디 그 느낌이 숨어있나 찾아보려 해도 그냥 내게 커피는 진한 거 연한 거, 많이 태운 거 덜 태운 거 수준에서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랑도 불타오르는 시간과 미지근하게 유지되는 시간이 있다. 게다가 내가 알기엔 좀 먼 당신이었기에 우리는 습관상 만나는 사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로스팅하는 가게를 일부러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원두는 갈아진 것을 샀고 도구도 자주 쓰는 것 하나만 빼고 모두 찬장 속에 처박아 버렸다. 조금 더 사랑했더라면 더 알아가려 노력할 수 있었을까. 아니 좀 더 알아가려 노력했다면 조금 더 오래 사랑할 수 있었을까.


짙은 회한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되돌아봄도 없는 이별이란 애정을 쏟은 시간에 대한 모독인 것만 같다. 다하면 보내야 하는 것이 이치지만 함께 한 시간 동안 나는 길들여졌기에 이별의 슬픔을 정돈할 애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일 년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 한 신세로 전락해버린 찬장 속 그들을 보면 아쉬움이 덜한다. 찬장을 비우고 새로운 인연이 들어올 자리를 천천히 마련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과 동시에 만남을 향해 가는 존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호하게 돌아섰던 그녀보다 천천히 멀어지는 그가 더 인간적이다 라고 적으려는 나를 보니 아직 그녀를 그리워한다는 반증 같다. 우리의 아름다운 거리란 여전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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