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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May 27. 2022

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것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보면서

혜령이는 거실 탁자에 앉았다. 구워둔 두부를 먼저 한 입 먹었는지 모르지만 부엌에서 보니 편지를 펼쳐 들고 보다가 엄마가 보고 있나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했다. 왠지 그 모습이 엄마 지갑에서 500원짜리 하나를 몰래 꺼내는 아이처럼 은밀한 느낌이 들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저를 못 본 척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몰래 염탐하듯 살짝 고개를 돌려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설거지를 마쳤다. 거실로 나가니 반쯤 줄어든 두부 접시를 앞에 두고 풀어진 딱지 같은 편지지를 들고 있는 혜령이가 보였다.

"어머, 엄마 편지 벌써 읽었어?"

"아니, 근데 이거 어떻게 접는 건데?"

"길게 이렇게 반으로 접고 또 한 번 접어. 그리고 중간 즈음에서 반으로 접고 반대쪽으로 돌려서 똑같이 접은 후에 끼워주면 돼."

편지를 다시 딱지 모양으로 접어주며 말했다.

"어제 네가 울다가 코가 막혀서 자는 모습 보니까 미안하더라. 그래서 편지 썼어. 가방에 넣어둘 테니까 나중에 읽어봐. 엄마가 이제는 안아달라고 떼쓰지 않을게."

사과의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혜령이가 '엄마 내가 한 번 안아줄게' 하고 먼저 팔을 벌렸다. 감정에 몰입된 연기자처럼 순간 눈물이 다시 한 방울 또로록 흘렀다.

 

가진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메아리처럼 돌아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은 게 내리사랑인 줄 알았는데, 엄마라는 존재도 딸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서 알았다. 가족 인기 순위에서 확고부동 1위인 할머니의 자리를 넘보며 시시때때로 역전을 꿈꾸며 순위를 확인했지만 이미 벌어진 차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사랑과 헌신의 레이스를 즐겁게 뛰는 분이었고 나는 신나게 달리다가도 금세 질리고 달리는 흉내만 내기도 하고 쉬고 싶다고 투정도 부리는 엄마였으니까. 엄마로서의 역할과 내가 맡고 싶은 역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배우였다. 멀어지면 당기고 싶고 너무 다가오면 좀 밀고 싶은 게 욕망의 법칙인가. 엄마 역할을 할 때는 자유롭고 싶다가도 하룻밤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에 애탔다. 그넷줄을 쥔 것이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크면서 역할은 점점 바뀌어갔다.  


혜령이는 고무줄 같았다. 내가 당기면 팽팽해지고 노으면 금세 풀어졌지만 스스로 당겨져 내게 튕겨져 오는 아이는 아니었다. 엄마와 있으면 엄마와 놀아도 친구들과 있으면 엄마에게 무심해졌다. 다른 아이들이 한 번씩 엄마에게 와서 이러쿵저러쿵 있었던 일을 이르거나 떼를 쓰거나 하며 귀찮게 엄마 옆을 맴돌아도 한 번도 옆에서 얼쩡거리는 일 없이 잘 놀았다. 어쩌다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이나 학교에 갈 일이 있으면 부러워지곤 했다. 아이들은 멀리서도 엄마를 알아보고 점심을 두 그릇이나 먹었나 싶게 우렁찬 목소리로 '엄마'를 외치며 100m 달리기 경주하듯 달려가 안기곤 했다. 의례 엄마와 딸은 그런 사이인 줄 알았다. 나와 엄마처럼, 매일 만나도 매일  달려가 안기고 싶은 존재. 그러나 혜령이는 좀 달랐다. 엄마를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살짝 머뭇거렸다. 선생님이 '어, 혜령아, 엄마네. 달려가 봐'라고 해야 부끄러운 듯 다가왔다.   


만인에게 받는 사랑보다 사랑하는 단 한 명에게 받는 이해와 관심이 우리의 마음을 더 풍족하게 해 주는 법 아닌가. '오로지 그녀로부터 이해받고 멸시받지 않기를 꿈꾸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넷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 나에서 딸로 바뀌었다. 나는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 딸의 무심함에 종종 속이 상했다. '혜령아, 엄마 보면 반갑지 않니? 엄마는 저렇게 달려오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 다음엔 혜령이도 저렇게 반갑게 맞아줘.'하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듯 내가 먼저 부르고 달려갔다. 가질 수 없기에 더 애타게 만드는 심리를 이용한 밀당의 기술은 이것 저것 재는 치사한 방법이 아니라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비법일까? 하지만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미는 척하는 연기가 당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란 것을 알 것이다. 혜어지자는 인사를 먼저 해버리는 격이 될까 봐, 선방을 날린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밀당이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연애 고수이거나 사랑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인 건 아닐까.  


너무 밀었다가 서로 멀어진 가족이 있다. 유명 여배우 파비안느가 낸 회고록 발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 사는 딸 가족이 프랑스를 방문한다. 딸은 자신의 기억과 다르게 미화된 엄마의 글을 읽으며 분노하지만 파비안느는 '기억은 믿을 게 못돼',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엄마로서 친구로서 나쁜 건 맞아. 나쁜 엄마 나쁜 친구여도 좋은 배우인 편이 나아. 네가 용서 안 해줘도 세상은 나를 용서해. 일상은 전혀 안 중요해.'라는 말들로 자신을 방어한다. 40년간 일한 매니저 뤼크 역시 회고록에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도 담기지 않은 것이 섭섭해 일을 그만두자 딸 뤼미르가 파비안느를 수행하게 된다. 평행선이 서로에게 방향을 틀어 조금씩 교차하며  오해들도 하나씩 풀리기 시작한다. 뤼미르는 진심을 표현하기 힘든 엄마를 위해 연기라 생각하고 사과하라고 대사를 적어주기도 한다. 파비안느는 대사대로 연기할 수 없었지만 뤼크에게 손을 내밀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파비안느: 남자로서 당신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당사자한테 직접 말을 던진다는 거야.
자크: 미안 내가 잘못했어.
파비안느: 곧장 사과할 줄 안다는 게 당신의 유일한 장점이지.
자크: 그것 말고도 장점 많아.
파비안느: 어젯밤 그 디저트는 뭐였어?
자크: '카사타'였지
파비안느: 난 당신 티라미슈가 더 좋은 거 같아. 괜찮게 만들더라.
자크: 나의 두 번째 장점이로군.
피비안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장점이 두 가지면 사는데 충분하고도 남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중 -자크와 파비안느의 대화


'내가 한 번 안아줄게'란 그 말과 온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자 영화를 보고 싶어 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파비안네에 관한 진실'을 검색했다. 자크와 파비안느의 대화에 어젯밤 찍었던 영상이 머릿속으로 자동 재생되었다.

"엄마가 안아주는 게 싫어? 엄마가 싫어? 고혜령, 정말 섭섭하다."

잠자기 전 딸을 덮치려다 거부당하자 나는 저렇게 치사한 말을 내뱉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혜령이는  슬픈 척 울었고 나는 토라진 척 돌아누웠다.

"엄마 코가 막혀서 못 자겠어."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한 자전거에 브레이크 손잡이를 아무리 꽉 잡아도 바로 서 지지 않듯 감정이 그랬다.

"네 코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러고 불을 꺼버렸다. 아이는 정말 2분도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아무 일 없었던 듯 잠이 들었고 그런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일어나 나왔다. 내가 얼마나 치사했는지 남편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한바탕 울었다. 그리 '그래도 언제든 와서 먼저 안아주는 건 환영이야, 사랑해'라는 인사로 끝나는 편지를 한 통 썼다.


인생도 한평생 나라는 사람이 하는 연기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때 그때 주어진 배역에 충실할 의무, 내 방식은 아니지만 상대에게 맞는 맞춤 대사를 진심으로 해내는 것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예술처럼 은은하게 전하는 진심이든 직접적인 애정 공세든 상대방과 호흡을 잘 맞추어가면서도 내 개성을 잃지 않는 것, 참 어렵기에 해볼 만한 일이다. 상대의 연기에 감동받아 나도 몰랐던 진심이 표출되어 스스로 만족스러운 연기가 되었다 싶어도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으니 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엔딩 크레디트도 없고 다시 찍기도 어려운 삶이란 또 어떤가.


저녁에 다시 만났을 때 편지를 읽어보았느냐 물었다. '잊어버렸어. 엄마가 읽어줘.' 시치미를 뗀다. 셋이 앉아 간식을 먹으며 내가 쓴 편지를 내가 소리 내어 읽었다.

"엄마가 싫은 게 아니고 안아주는 게 싫어. 뽀뽀하기 싫거나 안아주기가 싫으면 싫다고 하라고 엄마가 읽어주고 말해줬잖아. 엄마가 정식으로 사과를 하면 그때부터 괜히 더 심각해지고 슬퍼져."

"편지는 어때?"

"그건 자주 써줘도 괜찮아."

내가 혜령이의 방식대로 은은하게 표현하자 혜령이가 엄마의 방식으로 응답해주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비안느는 딸에게 '너를 사라에게 뺏긴 것 같았어' 라며 연기자로서 열등감을 품으며 동경했던 친구 사라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딸을 향한 사랑 고백이기도 한 이 대사가 딸과 자신을 위한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파비안느는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장면을 다시 찍겠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번거롭고 힘들게 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배우란 그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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