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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l 15. 2022

33.손톱 대신 발톱을 깎고 온 은성에게

 오지윤 <작고 기특한 불행> 

은성아, 바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니? 세수하러 갔다가 물만 먹고 온 토끼처럼 손톱 깎으러 갔다가 발톱만 깎고 온 이야기 혼자 생각하며 웃었어. 안도의 웃음이랄까. 나 역시 오늘 아침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 카드를 잃어버리고 집안을 다 뒤졌으나 발견하지 못했어. 물 마시러 부엌에 들어갔다가 어질러진 식탁만 정리하고 나온다던지, 우유 사러 쇼핑앱에 들어갔다가 라면을 산다던지... 열 손가락 하나씩 다 오므려도 모자랄 예들을 만들어가며 살고 있네.


바쁘면 정말 더 그렇더라고. 며칠 전 인생에서 손꼽히게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며 "다시 책을 읽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행복하고 좋다"라고 했던 네 말이 떠오른다. 돈보다 시간, 삶의 큰 원칙을 잘 지켜나가는 너지만 인생도 날씨처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한 번씩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오는 거지. 하나씩 오면 즐겁게 타고 넘을 작은 파도에 불과한 것들이 거센 폭풍우처럼 뒤엉켜서 오는 순간. 그때는 먹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우산 받쳐 들고 잘 견디는 거밖에 없더라. 어쨌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니 기쁘다. 밀린 일을 하느라 우리도 책 읽기를 일주일간 쉬었잖아. 나도 그동안 읽다 만 책들을 욕심내서 많이 읽어보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새벽 기상은 말할 것도 없고. 역시 나의 빅브라더 '은성'의 존재는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어.


더위에 지쳤던 지난주. 토요일이 되니 꼼짝하기가 싫은 거야. 하루 종일 집에서 누워 굴며 책을 한 권을 읽었어. <작고 기특한 불행>, 7월 7일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야. 작년에 SNS에서 계단을 소재로 한 연작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 독특한 구도에 진한 색감, 정면으로 찍은 계단 사진들.

 '계단을 오르는 것만큼 일상적이고 역사 깊은 고난이 없다. 일정한 모양의 입체적인 물체를 오르는 행동. 그래서 고난이 잦은 동네는 집값이 싸다. 계단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모난 각들이 뭉개지고 평면만 남는다. 3차원의 고난이 1차원의 패턴이 되어버리는 장면. 그 미감이 좋아서 몇 년째 틈틈이 찍는다'

<작고 기특한 불행>의 저자 오지윤 인스타그램에서


사진 아래에 달린 짧은 글마저 좋아서 마음을 훅 빼앗겼지. 하트를 막 누르고 팔로우도 누르고 그렇게 팬이 되었지. '보낸 이 오지윤'이란 이름으로 발행되는 메일링 서비스도 신청했어. 주말에 자려고 누르면 울리는 메일 소리가 반가웠던 적은 아마 그녀에게서 온 글 편지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편안히 누워 한 주를 마감하며 읽는 글은 식상하지 않았고 과하게 길지 않았어. 공책에 옮겨적고 싶도록 부러워지는 문장들이 있었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정도의 여운이 매번 있었지. 무엇보다 좋았던 건 한 인간의 고유한 특성, 개성이란 걸 매력적으로 드러낼 줄 아는 세련된 젊은이를 만났다는 것어었어. 수필을 읽는 것은 작가, 바로 그 사람과 만나는 거잖아.


나는 스스로를 보편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내가 쓰는 글도 고만고만 다정하고 적당히 평범한 글이라 생각해. 그런 나를 싫어하지 않지만 크게 매력적이여기지도 않아. 펄떡펄떡 뛰는 갓 잡은 물고기같이 생명력 넘치는 문장을 쓰는 사람들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더라. 맞아,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들에게 끌려. 그렇다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조건 특이한 사람에게 끌리는 건 아니야. 가치관의 베이스는 비슷하나  쓰지 않는 단어를 쓰거나 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자기의 단어로 또박또박 말하는 사람에게 쉽게 매료돼. 서서히 물든다기보다 단번에 '붕괴'되는 거지. 자발적으로.


일본의 작가, 사노 요코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어.  <요코 씨의 말>을 읽을 때 요코 씨가 단박에 좋아지게 된 구절을 알려줄게.


나는 기분 전환을 하지 않는다.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고 행복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대부분 항상 한없이 우울하다. 게다가 몸은 게으르고 머리로만 괜히 바빠서 벌렁 드러누워 쉴 새 없이 걱정을 해 대느라 몸만 편했지 마음편할 날이 없다. 그렇게 살아서 뭐가 즐거우냐 싶겠지만 그게 즐거워서 그만두지 못 할 정도. 이러고 천년만년 살고 싶다.

기분 전환은 내 스스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멀리서 찾아오는 거다. 예를 들면 우연히 서점에서 유익하고 똑똑해질 것 같은 책을 산다고 하자. 읽기 시작하고 나는 깜짝 놀랄 만큼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읽으면서 소리친다.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부끄러운 줄을."
너무 화가 나서 화가 난 부분에 표시를 한다. 읽기는 계속 읽는다. 다 읽으면 씩씩거리며 책을 내던지고 다시 서점에 가서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을 사온다. 그 사람 책을 다 읽어 버린다. 물론 계속 화는 나는데, 화가 나서 있을 때는 스스로가 매우 멀쩡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운이 난다. 물론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아아, 글자를 읽을 수 있어 다행이야, 하고 따질 것 없이 행복해진다.

요전에 우체국에 들렀다가 예쁜 기념우표가 있어서 사 보았다. 그렇게 하나둘 사 모아 늘어놓고 보고 있으니 그 우표를 직접 써보고 싶어 지기에 시트를 조심조심 찢어 쓸 우표를 따로 떼어 냈다. 하지만 갑자기 편지를 보낼 만한 곳이 아무 데도 없어서 10년 넘게 만나지 못한 미국 사는 소꿉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가장 예쁜 우표를 골라 할짝 핥아서 붙였다. 갑자기 편지를 받으면 깜짝 놀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같은 집에 사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두 번째로 예쁜 우표를 골라 할짝 핥아서 붙였다. 그다음에는 일 때문에 써야 하는 엽서를 써서 가장 싫어하는 우표를 골라 할짝 핥아서 붙였다. 그리고 우체통에 집어넣고 또 기념우표를 신청하고 돌아왔다. 우표를 할짝 핥을 생각을 하면 기쁜 마음이 들어서 몸이 절로 벌떡 일어나 진다. 하지만 이 '할짝'도 올 데까지 온 모양인지 어제는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내 편지를 오늘 빨간 스쿠터가 나에게 배달해 주었다. 우표 핥기가 질리더라도 괜찮다. 또 다른 하찮은 뭔가가 알아서 찾아와 줄 테니 사이좋게 그 손을 잡고 꿋꿋하게 살아가야지.

사노 요코 <요코 씨의 말>


침으로 우표를 할짝 핥는 기쁨, 그 우표를 쓰고 싶어 편지를 쓰는 마음, 결국 자신에게 붙인 편지를 받는다는 것도 공감되고 좋았지만 여기 까지라면 그냥 그러려니 재밌게 읽고 넘어가버렸겠지. 이 이야기기에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기분 전환은 내 스스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멀리서 찾아오는 거다.'라는 문장에 있었어. 나라면 아마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기분 전환은 내 스스로 하는 거야.'라고.

그토록 아내를 울려온 사람이 아내가 병이 들자 모든 것을 뒷전에 두고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하고, 1주기에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내를 향한 글을 써서 주위에 돌렸다가 3주기 즈음에는 젊은 새 아내를 들여 알콩달콩 해지는 것을 알고 나면 곁에 가서 어깨를 다독여주고 비싼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어 진다.

사노 요코 <요코 씨의 말>


이 문단의 핵심 역시 마지막 문장 '곁에 가서 어깨를 다독여주고 비싼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어 진다.'에 있어. 나라면 아마도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저렇게 빨리 잊히는 거구나.'라고.

분명 나라면 젊은 새 아내를 들여 알콩달콩 하는 60대 아저씨를 연민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거야. 눈물의 덧없음, 사랑과 의리에 대해 말하며 또 잔뜩 무거워졌겠지. 아, 참을 수 없는 나의 식상함. 이런 건 문장을 따라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사람을 읽는 장르가 수필이 아닐까. 쓰는 사람을 바로 비춰주는 잘 닦은 거울같아. 사람이 멋지지 않고서야 멋진 글은 여지지 않는 거지. 무척 공평한 이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주는 글. 그런 글을 만나는 건 '작고 기특한 불행'처럼 역설적이다.


하지만 비비안 마이어와 사울 레이터는 조용히 키워온 능력을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았으니. 꾸준히 묵묵히 해내는 선비에게도 기회는 온다. 친구에게 보여주고, 친구의 친구에게 보여주고. 선비들의 소심한 방식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다 보면, 언젠가 임금님도 찾아오시겠지. 날이 좋으니, 보여주고 싶은 게 있거든 성급히 생각 말고 마당부터 나가보자고!

오지윤 <작고 기특한 불행>


<작고 기특한 불행>에는 나라면 어떻게 썼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표현들이 많았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베트남 쌀알처럼 활자들이 흩어져버리고' 잘 써질 때는 '찹쌀로 주먹밥을 만드는 기분'이라고 썼을 때도 고개를 끄덕였고, '외국 같아!' 란 말을 아주 웃기고 멍청한 감탄사'라 했을 때도 통쾌했지. 글은 어투도 표정도 담기지 않으니 자꾸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 봐 느낀 것을 과장하게 될 때가 종종 있어. 지겨운 엄마 잔소리를 몇 번이나 똑같은 문장으로 반복하고 있는 거야. 수탉을 그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못 그려 전혀 닮지 않자 그림 옆에다 <이것은 수탉이다>라고 대문자로 써놓았다는 화가처럼 말이야. 결말은 뻔해. 무겁거나 지루하거나. 그녀의 글은 계단 사진처럼 군더더기 없지만 시선을 붙잡아두는 힘이 있었어. 몸에 좋지만 자꾸 먹어도 무거워지지 않는 샐러드 같아. 특제 퓨전 소스까지 뿌려 쉽게 질리지 않는. '이슬아'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지윤'은 알아보았다는 자부심이 있다. 친구에게 보여주고, 친구가 친구에게 보여주고, 선비들의 소심한 방식이 먹힐 때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적극 권해 본다.


인터넷에서 본 심리테스트인데 "샤워할 때 어디를 먼저 씻나요?"라는 질문이었어. 1번 머리부터 감는다. 2번 세수부터 한다. 3번 몸부터 닦는다. 4번 이를 닦는다. 나는 머리를 먼저 감거든. 그런데 내가 하는 순서대로 혜령이를 씻기니 몸 닦으며, 세수하며 감아 둔 머리에 계속 비누가 묻는 거야. 그래서 몸을 먼저 씻기고 세수를 한 다음 머리를 감기면 효율적이겠구나 싶어 그렇게 해보았어. 훨씬 편하더라고. 나도 샤워 순서를 바꿔 봐야겠다 싶어서 시도를 했어. 의식을 할 때는 새로 정한 순서대로 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면 늘 하던 대로 하고 있더라고. 머리부터 감는 사람은 '이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주변에 친구도 많고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애정 표현에 서투르고 본인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우유부단한 스타일'이래. 뭔가 잘 맞는 것 같지 않아? 반대로 몸부터 씻는 사람은 '본인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알며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좋아하는 대상이나 일이 생기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뛰어드는 미적 감각이 있는 패셔니스타'라고 해. 동경하는 것까지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다니, 재밌지? 은성아 넌 몇 번?


어제는 도로를 걷고 있는데 이어폰을 끼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로 매미가 귀 옆에서 열정적으로 울어대더라. 아! 여름이다. 여름은 사랑을 나눈 젊은 연인들의 얼굴 같아. 뜨거울수록 빛이 나. 그 열기에 지레 겁먹고 집 안으로 숨어버릴 때가 많지만 태양의 강한 인력에 다시 끌려 나온다. 푹푹 찌는 날들이 또 시작되나 봐. 주말엔 무엇을 할거니? 오랜만에 맞이하는 여유를 즐기며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책을 읽을런지, 여름을 즐기러 집 밖을 나설건지 궁금하네. 여름을 사랑하는 은성아, 여름에 읽으면 좋을 책을 추천해주길 바라며 오늘은 이만 총총.


2022. 7월 14일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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