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윤 <작고 기특한 불행>
'계단을 오르는 것만큼 일상적이고 역사 깊은 고난이 없다. 일정한 모양의 입체적인 물체를 오르는 행동. 그래서 고난이 잦은 동네는 집값이 싸다. 계단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모난 각들이 뭉개지고 평면만 남는다. 3차원의 고난이 1차원의 패턴이 되어버리는 장면. 그 미감이 좋아서 몇 년째 틈틈이 찍는다'
<작고 기특한 불행>의 저자 오지윤 인스타그램에서
나는 기분 전환을 하지 않는다.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고 행복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대부분 항상 한없이 우울하다. 게다가 몸은 게으르고 머리로만 괜히 바빠서 벌렁 드러누워 쉴 새 없이 걱정을 해 대느라 몸만 편했지 마음편할 날이 없다. 그렇게 살아서 뭐가 즐거우냐 싶겠지만 그게 즐거워서 그만두지 못 할 정도. 이러고 천년만년 살고 싶다.
기분 전환은 내 스스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멀리서 찾아오는 거다. 예를 들면 우연히 서점에서 유익하고 똑똑해질 것 같은 책을 산다고 하자. 읽기 시작하고 나는 깜짝 놀랄 만큼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읽으면서 소리친다.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부끄러운 줄을."
너무 화가 나서 화가 난 부분에 표시를 한다. 읽기는 계속 읽는다. 다 읽으면 씩씩거리며 책을 내던지고 다시 서점에 가서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을 사온다. 그 사람 책을 다 읽어 버린다. 물론 계속 화는 나는데, 화가 나서 있을 때는 스스로가 매우 멀쩡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운이 난다. 물론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아아, 글자를 읽을 수 있어 다행이야, 하고 따질 것 없이 행복해진다.
요전에 우체국에 들렀다가 예쁜 기념우표가 있어서 사 보았다. 그렇게 하나둘 사 모아 늘어놓고 보고 있으니 그 우표를 직접 써보고 싶어 지기에 시트를 조심조심 찢어 쓸 우표를 따로 떼어 냈다. 하지만 갑자기 편지를 보낼 만한 곳이 아무 데도 없어서 10년 넘게 만나지 못한 미국 사는 소꿉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가장 예쁜 우표를 골라 할짝 핥아서 붙였다. 갑자기 편지를 받으면 깜짝 놀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같은 집에 사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두 번째로 예쁜 우표를 골라 할짝 핥아서 붙였다. 그다음에는 일 때문에 써야 하는 엽서를 써서 가장 싫어하는 우표를 골라 할짝 핥아서 붙였다. 그리고 우체통에 집어넣고 또 기념우표를 신청하고 돌아왔다. 우표를 할짝 핥을 생각을 하면 기쁜 마음이 들어서 몸이 절로 벌떡 일어나 진다. 하지만 이 '할짝'도 올 데까지 온 모양인지 어제는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내 편지를 오늘 빨간 스쿠터가 나에게 배달해 주었다. 우표 핥기가 질리더라도 괜찮다. 또 다른 하찮은 뭔가가 알아서 찾아와 줄 테니 사이좋게 그 손을 잡고 꿋꿋하게 살아가야지.
사노 요코 <요코 씨의 말>
그토록 아내를 울려온 사람이 아내가 병이 들자 모든 것을 뒷전에 두고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하고, 1주기에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내를 향한 글을 써서 주위에 돌렸다가 3주기 즈음에는 젊은 새 아내를 들여 알콩달콩 해지는 것을 알고 나면 곁에 가서 어깨를 다독여주고 비싼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어 진다.
사노 요코 <요코 씨의 말>
하지만 비비안 마이어와 사울 레이터는 조용히 키워온 능력을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았으니. 꾸준히 묵묵히 해내는 선비에게도 기회는 온다. 친구에게 보여주고, 친구의 친구에게 보여주고. 선비들의 소심한 방식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다 보면, 언젠가 임금님도 찾아오시겠지. 날이 좋으니, 보여주고 싶은 게 있거든 성급히 생각 말고 마당부터 나가보자고!
오지윤 <작고 기특한 불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