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헨리 소로 <월든>
은성아 안녕.
산엔 아카시아, 길엔 이팝. 봄의 후발 주자들이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날들이야. 5월은 독서에 몰두하기에는 다소 불리한 달이 아닌가 싶어. 산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저절로 마음도 푸르러져서 책 말고 다른 것들도 읽고 싶어지는 그런 달. 그래서 여유를 가지고 좀 놀아보라고 가정의 달을 5월로 정했을까? 어린이도, 어버이도, 스승도, 부처님까지 챙기느라 조금 정신이 없었어. 너는 어땠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냈어? 여행은 잘 다녀왔고?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여행에 대해서도 취향이 좀 달랐던 것 같아. 나는 낯선 곳에 나를 머물게 할 기회를 주면서 낯선 나를 만나는 게 여행의 묘미라 생각했었어. 너는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했고 나는 어디에 가느냐가 중요한 사람이었잖아. 너는 같은 곳을 다르게 보는 것을, 나는 새로운 곳에서 다른 것을 보는 걸 선호했어.
지난 주말 차 창 문을 활짝 열고 아카시아꽃 핀 시골집 뒷산길을 달려 내려오는데 꽃향기가 스프레이를 뿌린 것처럼 진하게 나는 거야. 바람에 실려 온 천연 향수에 흠뻑 취했어. 그 향을 잊지 못해 다음날 향기를 찾으러 그 길로 산책을 나섰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길에 섰음에도 어제와 같은 향기가 나지 않는 거야. 가지를 꺾어 꽃잎에 코를 파묻어 봐도 시원치 않았어. 바람의 방향과 시속 50km의 속도라는 독립변수가 우연히 향기로운 자연향을 만들어낸 것이더라. 내가 아쉬워하니 오빠가 나뭇가지를 덤벙덤벙 끊어서 거대한 꽃다발을 만들어주더라. “꽃을 함부로 꺾으면 어떡해.” 하고 예의상 핀잔을 주었지만 야생의 꽃다발을 받고 ‘너무 좋다’는 말을 남발했어. 옥수수 담아 파는 초록색 망에 꽃잎들만 넣어 차 안에 두었더니 차 문을 열 때마다 그 향이 그대로 남아있었어.
평야처럼 드넓은 호수는 대기에 깃든 정령을 드러낸다. 호수는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끊임없이 받아들인다. 땅과 하늘 사이에서 호수는 본성적으로 중재자다. 땅에서는 바람에 풀과 나무만 흔들리지만 호수에서는 물이 잔물결을 일으킨다. 빛줄기나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섬광만 보아도 산들바람이 수면을 스치고 지나는 곳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수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대기층의 표면을 한참 내려다보고 신묘한 정력이 어디를 스치고 지나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월든> 민음사 p276
시골집 바로 뒤에 꽤 넓은 저수지가 하나 있어. 투명한 호수가 아닌 초록색 저수지지만 잔잔한 수면엔 꽤 볼만한 영상이 항상 재생되고 있어. 한옥과 나무들이 말없이 쉬고 바람이 물결을 몰고 가면 햇빛이 같이 가자고 막 따라오는 내용, 같은 구간만 무한 반복되는 무성영화. <월든>의 문장들을 떠올리며 바라보는 저수지는 외국 유명 명소를 훑고 지나가는 것보다 더 진한 여행의 기분을 맛보게 해 주었어. 아카시아 향기도 저수지도 남편도 그리고 나도, 어느 것 하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 순간 변하는 종속변수이자 독립변수였어. 나도 너에게 점점 스며드나 봐. 한 곳을 오래 보게 되고,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읽게 되고, 비우고 질문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고. 나는 이런 변화들이 좋아. 그래서 너에게 무척 고마워.
너는 탐험을 끝내지 못한 섬 같아. 그 섬에 갈 때면 자주 발견하지 못한 정원이, 모래사장이, 절벽이 나타나곤 해서 깜짝 놀라게 돼. 엉덩이를 토닥여주는 다정한 친구였다가 질문을 던질 때는 선생님을 시험해보려는 짓궂은 전교 일등 학생 같기도 하고. 감정이 앞서는 나에게 정답이 맞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보라고 눈빛으로 힌트를 주는 시험감독관 같기도 해. 때로는 낯설어 25년이나 알고 지낸 그 섬이 맞을까 두리번거리게도 된다. 좋은 게 좋다고 항상 두루뭉술한 나와 달리 '나는 매력 없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아' 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네가 이해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 누구 하고나 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몇몇에게는 끔찍하게 애정을 주는 사람, 몇 시간이나 즐겁게 이야기할 정도로 대화를 좋아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도 산더미처럼 많은 사람이 너야. 마치 요리조리 돌리면 모양이 끊임없이 바뀌는 만화경 같아.
질문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을 껄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도 잘 알아. 사람들은 그런 이를 대충 말귀 알아듣고 살면 편한데 쓸데없이 심각하다고 한심하게 보기도 해. 나를 현실도 모르고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처음엔 상대방이 외계인인 것 같았거든. 그런데 사실은 내가 외계인이었던가 하고 놀라게 되는 때가 있잖아. 그때는 좀 외롭고 소외된 느낌이 들었어. 얼마 전 책에서 '사회성 좋은 사람이 위대한 철학자가 되고 예술가가 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네가 떠올랐고 조금 부러웠어. 평화롭기 VS 지혜롭기, 이 두 가지 선택길에서 나는 아직도 전자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 외로움을 감당해 낼 지혜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내게 종자기 역할을 맡겨준다면 네가 켜는 거문고 소리는 끝까지 잘 알아들으려고 노력할게. 네가 외롭지 않게 말이야.
참 나 글퇴기가 왔었잖아. 넌 좀 어때? 바쁜 일상 속에서 글쓰기가 숙제처럼 의무감으로 다가올 때면 나도 햄릿처럼 갈팡질팡 하게 되는 것 같아. 쓰지 않고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글쓰기와 책 읽기가 오히려 눈앞의 인연에게 소홀하게 되는 이유는 아닐까. 불가에서는 '평범하게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쉬어라, 이미 일어난 것은 이어가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도록 할 필요가 없으면 10년 동안 공부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능가할 것이다'라고 하잖아. 일(마음의 소란)을 일(용무)로 오독해가며 '글 빚도 남기지 마라'는 법정 스님의 유언을 방패막이로 삼기도 하면서 쓰지 않을 핑계를 막 만들어 내고 있어. 그러면 마음이 게을러지느냐, 그건 또 아니더라고. 그냥 몸만 게을러질 뿐이더라고. 그렇게 쓰기와 거리두기를 하며 읽기와 가까워지면 언제나 그렇듯 나의 수호천사 책님이 적당한 구절들을 적절한 때에 슬그머니 놔두고 가신다. 이번에는 두 분이서 번갈아가며 같은 말을 하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하지만 친애하는 스완 씨. 그때 저는 어린아이였고 당신은 이미 무덤 가까이에 있는 분이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한낱 어리석은 아이로 생각했을 존재가, 이제 당신을 자신이 쓴 소설의 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다시 당신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신은 오래도록 살아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 2 p13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지 않겠나.
<중략>
인생도 다르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인생을 풀 full로 보는 게 아니라 불현듯 뛰어들어가 후반부 영화만 보는 것 같지. 영화가 끝나고 'the end' 마크가 찍힐 때마다 나는 생각했네. 나라면 저기에 꽃봉오리를 놓을 텐데. 그러면 끝이 난 줄 알았던 그 자리에 누군가 와서 언제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 텐데.
이어령의 마지막 편지 p49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으로 보호하려는 행동'이라고 마르쿠스가 '사명'과 '의무'를 구별하잖아. 두 대가들이 자꾸 예술이 죽음을 유예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글쓰기에 '사명'을 부여해. 프루스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일상적 인물을 마냥 사랑할 수도 또 미워할 수 없는 입체적이고 개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당신은 내 글의 주인공으로서 오래도록 살아남으리라는 마치 예언 같은 말을 해. 100년 훌쩍 넘어 한국에 사는 내가 그가 쓴 글을 읽으며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했지만 지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탁월한 인물이었던 스완'의 초상을 그림에서 찾아보며 죽음을 함께 애도해. 화가는 그림 속에서, 음악가는 자신이 그린 음표 속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게 한다는 그 말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어.
타인의 죽음 앞에 꽃봉오리를 놓을 만큼 성숙하진 못했지만, 친구와 가족의 '엔딩 마크' 앞에는 꽃 한 송이 정성껏 놓고 싶어. 내가 받칠 수 있는 헌사가 나와 그들을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글쓰기가 '의무'가 아닌 '사명'으로서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어. 손이 막 근질근질해지더라. 글이 자신의 성찰 도구와 삶의 기록으로 쓰임이 있고, 재미난 놀이에 불과했다면 힘들게 하나도 없었단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여정도 슬슬 종착점이 보이려고 하네. '소돔과 고모라'라는 조금 지루한 길을 거쳐 '갇힌 여인' 편으로 오면서 길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어. 뱅퇴유의 칠중주 곡에 대한 거의 30페이지에 걸친 예술에 대한 서술은 단연코 내가 읽은 글 중의 최고의 환희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 부분을 내 목소리로 녹음하여 며칠이나 출근길에 걸으며 듣고 있어. 이 부분이 마치 '작곡가가 환생하여 자신의 음악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보물지도처럼 느껴져.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보물지도를 잘 해석해 낼 수 있을까 싶지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읽고 쓰기에 대한 수다를 한 없이 너에게 늘어놓을 수 있어서 기쁘다. 못다 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하지만 괜찮아. 우리는 내일 만나잖아. 난 음악회에 가기 전에 연주될 곡을 공부하듯 듣는 편인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어. 마르쉘이 뱅퇴유의 미발표 곡을 듣고 자유로운 감상에 빠지잖아. 나도 그러고싶더라. 연주자들의 머리카락이 어느 부분에서 흘러내리는지도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싶기도 하고. 내일이 너무 기대된다. 편지가 너무 길었네. 아쉽지만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추신.
그날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그날의 문장으로 꼽았던 (정말 30페이지가 다 좋은데, 한 문장은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 부분을 다시 한번 손으로 옮겨볼게.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 하나의 '청춘'의 샘은 새로운 풍경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고, 타자의 눈을 통해 다른 수백 명의 눈을 통해 우주를 보며 그들 각각이 보고 그들 각각이 존재하는 수백 개의 우주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우리는 한 사람의 엘스티르, 한 사람의 뱅퇴유, 그들의 동류인 예술가들과 더불어 할 수 있으며, 정말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다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민음사 p114
2022. 5.14
소중한 지음(知音), 은성에게
승희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