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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Feb 25. 2023

짝사랑

며칠 전 학교 앞에 볼일을 보러 갔다. 차를 타고 자주 지나는 길이지만 걸어서 학교 주변을 걸어보는 일은 졸업 후 거의 없었다. 토요일 오후, 학교 앞은 조용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름만 바뀐 술집이, 이름도 그대로인 밥집이, 키 큰 소나무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쇠락해 가는 사립대학교의 위상을 보여주듯 '임대'라는 글을 써붙인 텅 비고 불 꺼진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세월은 이제 눈치 보지 않고 내 머리에 당당히 흰머리를 심듯 거리도 늙게 만들어 버렸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건널목 앞에 섰다. 갓 내린 커피 향이 진하게 났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바로 뒤에 작은 카페에서 바깥쪽으로 내단 스피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그것은 과거에만 존재하던 한 조각의 낭만.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던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한 입 베어 물자 시간이 멈추었다. 요정 바람돌이가 만든 과거로 통하는 모래 구멍이 눈앞에 있었다. 한 발을 디디자 몸은 회오리바람에 정신없이 이끌려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스무 살로 돌아와 있었다.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확실히 기억한다. 그날은 수강신청을 하는 날이었다. 친구와 함께 선배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내 기억으로 '컴퓨터'라는 신문물 앞에 처음 앉아보는 날이었던 것도 같다. 긴장하지 않았을 리 없다. 버벅거리는 새내기들을 위해 도우미 선배들이 나섰다. 누군가 뒤에서 어색하게 마우스를 잡고 있는 내 손 위에 자연스레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당연스러워서 놀라는 것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딸깍, 클릭 몇 번의 순간. 롤러코스터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처럼 쿵 하고 정말 가슴이 수직 하강했다. 사랑에 빠지는 속도, 초속 5km. 그 말은 진짜였다.


그는 몸이 말라 키가 더 커 보이는 남자였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다. 긴 손가락으로 쓴 글씨체는 바람에 날려 한 발짝씩 옆으로 밀려나는 꽃잎처럼 가볍고 아름다웠다. 항상 야구 모자를 썼다. 가려진 이마만큼 살짝 과묵했고 비밀스러웠다. 때때로 과방에 와서 긴 다리를 꼬고 기타 줄을 튕겼다. 그리고 가끔 '띠앗머리'라는 방명록 같은 공책에 짧은 글을 남겼다. 오늘은 길게 늘인 뒤 말아 올린 'ㅣ'모음을 볼 수 있을까 하며 나는 매일 몇 번씩 띠앗머리를 넘기곤 했다.


그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드라마에서 보던 대학생들처럼 말이다. 소설을 공부하는 학과동아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 건 결단코 우연이었다. 그랬기에 그것을 인연으로 믿어버렸다. 학회수업은 주로 토요일 오후에 있었다. 몇 시간에 걸쳐 누군가의 소설을 난도질하거나 예찬하며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가 어두워지면 근처 술집으로 술을 마시러 갔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은 위대한 비유가 아닌가. 자기장 방향은 항상 그를 향했다. 내 눈은 그를 흘깃거리다가 이성의 저항에 제자리로 밀려왔다.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그가 왼쪽에 앉으면 넙치가 되었다가 그가 오른쪽에 앉으면 도다리가 되었다.


그 시기의 일기는 '맑음, 흐림', 날씨 기록을 대신해 '선배에게 삐삐가 옴, 삐삐가 오지 않음'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선배들은 Y선배, T선배 이름이 있었지만 그만이 선배라는 대명사이자 고유명사로 등장하고 있었다. 짝사랑은 일기장 속에서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나의 것은 꽁꽁 숨기고 남의 것은 밝혀내고 싶은 것이 비밀의 속성인가. 비밀은 때론 사람을 집요하게 만든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손쉽게 알아낸 번호 2580. 그의 삐삐 비밀번호가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엉큼한 도둑이 되었다. 밤이면 그의 메시지를 몰래 훔쳐 들었다. 메시지 저장 기능을 예찬하거나 원망하며 스스로 멈출 수 없던 그 관음증에 파르르 떨리곤 했다. 그가 제발 비밀번호를 바꿔주기를 얼마나 진심으로 원했던지.


술과 꿈과 사랑, 이 무시무시한 것들이 미숙한 젊은이 속으로 한꺼번에 쳐들어왔다. 나는 흔들렸다. 어지럽지만 황홀했다. 폭발할 것만 같던 그 감정들에 기꺼이 복종했어도 좋았을 텐데. 부글거리는 용암은 진정시켜야 하는 것이지 터트려 남김없이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만큼 달아오르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지만 뒷감당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꿈도 사랑도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묻어두는 쪽을 택했다. 그 부글거림은 한 번씩 들썩이며 북덕 북덕 끓어오르며 넘쳐흐르려 했다. 그때마다 찌개 뚜껑 열고 닫거나 불 세기 조절 칸을 미세하게 낮추면 스르르 잠잠해졌다.


그렇게 확실했던 출발 신호와 달리 그 비이성적이던 달리기의 종점에 어떻게 도달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신입생들이 두 차례 들어올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여전히 키가 컸고 모자를 썼고 말이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동아리 여자 후배들 몇몇을 울렸다. 모두들 짝사랑은 상대방에게만 비밀스러웠으므로 일기장 앞이나 여자들끼리의 수다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윤대녕을 좋아하던 문학청년은 공무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기장에서 그는 대명사 대신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짜증 난다, 우울하다, 기쁘다' 같은 날 감정의 단어들도 천천히 줄어들었다. 규칙적인 만남들이 그의 모자 벗은 얼굴을 볼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었다. 비밀은 더 이상 비밀스럽지 않았다. 하루에 열 번 보고 싶던 사람은 그렇게 세월에 풍화되어 갔다.

  

건널목 저편에 밤새 쓴 소설 복사본을 들고 합평을 받으러 가는 내가 서 있다.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Alone again'을 들으며 그를 만나러 갈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나는 노래처럼 부드럽고 감미롭고 경쾌해진다. 그 노래 가사가 쓸쓸했다는 것은 이제 다 잊었다. 바람에 깎여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던 것들이 한 번씩 바람을 타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같은 바람일 수는 없다. 스무 살의 커피는 씁쓸해서 마시기 쉽지 않은 진한 농도의 에스프레소였다.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우유를 따르면 고소하고 달콤한 라떼가 된다. 세월에 희석된 기억은 때때로 꾸며진 라떼아트처럼 아름답다. 드디어 신호등이 바뀌고 나는 앞을 향해 걷는다. 커피 향과 음악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모래 구멍을 쏙 빠져나오자 순식간에 마법의 문이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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