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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26. 2023

즐거운 나의 점심시간

도미-파파-솔솔 미솔-파미파레도-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든 침 흘리고 자던 걸 수습하고 일어나 놀 시간임을 알리는 것이든 빠르고 경쾌하게 이 소리가 울리면 안도감이 몰려왔다. '너희들은 잠시 자유인이야'하고 하는 쉬는 시간을 알리는 신호음 중에서도 제일 반가운 것은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친구가 무슨 반찬을 사 왔을까 하는 기대감, 엄마가 싸 준 반찬을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던 기쁨. 둘이서, 넷이서, 여섯이서 책상을 돌려 붙이고 수다를 떠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어도 매일 새롭게 느껴지던 그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시간을 사랑했다. 친구와 음식. 지금도 내가 무척 애정하는 대상들이다. 하지만 다른 것들도 비등비등한 넓이로 내 마음과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엔 친구, 음식, 다이어트가 80%를 차지했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사회에서 사귄 친구들보다 더 오래가고 허물없는 이유는 함께 먹은 밥의 양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땐 두 개의 도시락을 싸 다녔으니 일 년에 적어도 1200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은 셈이다.  오전 8시에서 저녁 10시까지, 학교 안에서 지내야 했던 우리에게 무언가를 친구와 나누어 먹는 즐거움은 여름날 문득 불어오는 바람과 같았다. 음식과 관련된 추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앞둔 온화한 할아버지셨다. 귀도 잘 들리지 않아 큰 소리로 말을 하셨지만 아이들 일에 크게 관심이 없으셨고 화도 잘 내지 않으셨다. 키가 커서 덩치도 작아 보이진 않았다. 뒤돌아 서서 무언가를 적으면 칠판을 제법 많이 가렸다. 미술 필기 수업 시간엔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내용을, 느릿느릿 시골길 산책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가끔 뒤를 돌아보고 우리의 반응을 살필 법도 하건만 한참을 판서에 열중을 하시곤 했다. 그러면 나는 점심으로 싸 온 김밥 도시락의 문을 열고 고개를 푹 숙인 뒤 입 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그리고 눈치를 조금 살핀 뒤, 앞이나 뒤로 도시락 통을 넘기곤 했다. 2 분단 끝에서 돌기 시작한 김밥통이 4 분단 앞에서 끝이 나면 우리는 완전범죄를 완성한 공범의 미소를 교환했다. 과도를 연필꽂이 사이에 꽂아두고 생활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사과나 배 등을 하나씩 챙겨 와 만만한 선생님 시간에 책상 아래에서 돌려 깎아 쪽지 전달하듯 돌려가며 하나씩 입안에 넣어 나누어 먹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미니 얼음기계가 유행을 했다. 청소물품 등을 넣어 놓는 곳에 빙수기를 넣어 두었다. '나는 아빠가 차를 태워주니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얼려올게.', '그럼 나는 팥을 맡을게.' '그럼 나는 우유.' 분담한 물품들을 학교에 가져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팥빙수를 만들었다. 얼음은 느리게 갈리고 숟가락 개수는 많았다. 얼음을 가는 일을 맡은 친구에게 자기가 먹던 숟가락에 팥빙수를 가득 떠서 입에 넣어 주곤 했다. 참기름과 고추장, 큰 양푼이를 챙겨 와 잡탕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귀찮거나 번거로운 일이었다는 생각도 드는데 젊음의 에너지는 온도 자체가 달랐던 모양이다.

 

 중학교 2학년, 친한 친구들 네다섯이서 쉬는 시간마다 도시락을 하나씩 꺼내어 먹는 재미에 한참 열을 올리던 때였다. 도시락 하나에 숟가락 네다섯개면 10분이란 시간도 넉넉했다. 다 먹고 호주머니 안에 꽂아 둔 만년 이쑤시개인 옷핀으로 치아에 낀 고춧가루까지 정돈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다음 시간 선생님들이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서면 얼굴을 찌푸리며 창문을 열게 하시곤 했지만 크게 혼을 내거나 하진 않으셨다. 점심시간이 되면 이미 도시락은 두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 여유롭게 남은 도시락을 먹어치고 나면 돈을 뿜빠이했다. 당시 용돈이 귀하긴 했지만 매점이란 천국에 들어갈 돈이 조금씩은 모였다. 어떨 때는 친구들에게 회수권을 팔아 매점 갈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다섯이 모여 도시락을 까기에 제일 좋았던 곳은 교실 앞 쪽 선생님들 전용 책상이었다. 교과 선생님들도 사용하는 책상이라 담임 선생님 물건이 놓여있지 않았다. 그곳을 식탁 삼아 밥을 먹었지만 칠칠치 못한 범인들은 곳곳에 먹은 흔적을 잔뜩 남겼다. 그 일로 쉬는 시간에 밥을 먹지 말라는 경고를 담임 선생님께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당도 무서워한다는 중 2가 아닌가. 그때도 중 2의 파워는 막강했다. 안 들킬 거란 생각을 했던 건지, 들켜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을 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세 번의 경고를 받았고 끝내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강력한 벌이 우리에게 내려졌다. 부모님을 모셔오는 건 일진들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모이면 강한 군대지만 흩어지면 소심한 졸병 무리들에 불과했던 우리는 겁이 났다. '그것만은 제발'이라고 읍소했고 한 달간 교실 청소를 하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김밥 냄새, 사과 냄새를 모른 척해주셨던 선생님처럼 담임선생님도 부러 '부모님을 모셔오라' 하셨다는 건 좀 더 세근이 들고 난 후였다. 다 아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철부지 시절들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십여 년 전 일본의 맥도널드에 처음 방문했을 때 놀라웠던 점이 있었다. 다들 각자 주문을 하고 식판에 음식을 받아와 자기 것만 얌전히 먹는 모습이 참 낯설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또래의 문화는 각자 자기 몫의 돈을 한꺼번에 모은 다음 한 두 명이 가서 주문을 했다. 그러면 같은 트레이에 담긴 각자의 햄버거를 챙긴 뒤 감자를 한 곳에 털어 모았다. 케첩을 짜서 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내 침과 너의 침이 섞이는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감자에 케첩을 찍어 반을 배워 물고 남은 쪽에 또 케첩을 찍고 하였다. 음료수 역시 하나 시켜 갈라 먹었고 먹던 걸 받아먹어도 크게 경우에 어긋나지 않았다.


식탐(여기서의 식탐은 음식에 대한 탐구심)이 있는 나는 친구와 다른 것을 시켜 갈라 먹거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 음식은 도대체 어떤 맛일까 하는 궁금증을 해결할 만큼이면 될 정도, 그렇니까 딱 한 번의 맛보기를 좋아했다. 얼마 전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했다.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파는 가게였다. 왜 반반메뉴 같은 걸 만들지 않아 나를 즐거운 시험에 들게 하는 걸까. 샌드위치와 샐러드 중에 무엇을 고를까 망설였다. 나는 샐러드를, 친구는 샌드위치를 선택했다.


 우리 음식 문화도 청결과 위생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고 코로나를 겪으며 더 철저해졌다. 이제 같은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그거나 철판 볶음밥의 눌은밥을 자기 숟가락으로 긁어서 모아 주는 일 같은 건 기본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진다. 아무리 친해도 '한 입 먹어봐도 돼?" 같은 말을 먼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 거 맛있어 좀 먹어봐.'라는 인사말에 친구는 '그냥 내 것만 먹을게.'라고 답했다. 잘라진 돈가스 한 점을 상대의 접시에 올려주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너 한 입, 나 한 입 같은 건 이제 가족들 간에도 꺼리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서로 다른 반찬을 챙겨 오는 일이 없이 모두 똑같은 반찬을 자기 앞의 식판에 받아먹는 교실 풍경. 누구나 혼자 먹기에 소외됨도 없고 질서도, 위생도 잘 지켜질 테지만 젓가락 하나만 들고 교실을 빙빙 돌아다녀도 배가 부르던 그때가 한 번씩 그립다.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추억들을 모아 조각조각 이어 붙이니 멋진 퀼트 탁자보가 완성되었다.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그중에 몇 조각 어그러진다 한들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기엔 미미한 실수들일뿐이다. 내 것이 예쁘지 않냐고 자랑하고 싶어도 시대에 맞지 않는 촌스러운 물건 취급을 당할까 염려된다. 가끔 꺼내서 나만의 만족으로 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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