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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06. 2023

커피 그리고 우리

J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26년 지기 친구다. 양산과 부산, 엄밀히 따지면 시를 넘어가야 하는 원거리 만남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1시간이 안 되어 도착할 수 있어 운전을 하는 내가 주로 J를 만나러 양산으로 간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대체로 일정하다. 12시에 만나 점심을 먹고 날이 좋으면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돈 뒤 '오늘의 커피'를 마시러 간다. 둘 다 커피를 사랑하지만 목까지 차오른 이야기보따리를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이면 족하다. 어디가 좋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들어간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가 취향에 맞으면 '우와, 대박이다' 하고 그 우연에 감사하고 기뻐한다.


이제 내 곁에 남은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다 각별하지만 J는 조금 더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 친구다. 커피와 책을 끔찍이 좋아하고 글 쓰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J는 말하길 좋아하고 나는 듣기를 즐기는 편이라 궁합이 잘 맞는다. 하지만 유독 J를 만나면 나도 함께 수다스러워진다.

"있잖아, 너 요코 씨의 말 읽어봤어? 그 책에 아내를 사랑하는 중년 남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내가 병으로 죽었어. 지극히 간호했고 많이 슬퍼했지.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1여 년 정도 지났을 땐가 젊은 여자와 환하게 웃고 있는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온 거야. 나 같으면 이 장면에서 '사랑이 그렇게 쉽게 잊히는 거라니'하며 씁쓸해했을 장면에서 요코 씨가 뭐라 했게? 한 번 읽어 봐. 반할 거야. 사람이 멋있어야 멋진 글이 나오나 봐. 문장은 따라 할 수 있어도 사고의 멋짐은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것 같아. 네 생각나더라."

한 달간 읽고 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 시간은 달콤한 커피 한 모금 마시간 순간처럼 빨리 흘렀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간단히 저녁이나 먹고 혜어지자며 밖을 나온다. 그래도 목구멍에 남은 이야기를 아쉬워하며 다음 달에 만날 약속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소중한 것들을 함께 사랑할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산책길 말동무 정도에 비할 바가 못된다. 어두운 산길 홀로 걷는 산행자의 이마에 달린 랜턴불 같은 것이다.


첫인상은 평범했다. J가 데리고 간 그 카페는 4차선 도로 앞 대단지를 앞에 두고 있는 대형 카페였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고 J가 음악도 참 좋은 곳인데 커피도 맛있었다고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넓은 주차장에 편하게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형 카페인지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중앙의 오디오 시설이 눈이 띄었다. 내 키보다 더 큰 스피커가 양쪽에 버티고 섰고 그 가운데에 앰프와 소스기기가 두 대씩, 그 위로 중형 스피커 두 개가 놓여있었다. 토요일 오후임에도 2층은 한산했고 드뷔시의 달빛이 고요히 흘러나왔다. 원두는 묵직한 다크초콜릿향의 젠틀리노, 베리류 산미맛의 플로레스 두 가지였다. 베리류 산미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셨을 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우와, 지금까지 마셔 본 커피 중에 최고 맛있어." 한 모금을 채 넘기기도 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마실 때까지 몇 번이고 '너무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두고두고 생각이 날 맛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양산시 물금읍. 자주 마시러 올 수 없는 거리. 원두를 파는지 카운터에 문의를 했지만 팔지 않는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섬의 커피라고 했다. 파는 곳이 많이 없고 해외배송을 이용하면 450g에 9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일단 보류. 그 후에도 J에게 '그때 그 집 커피 정말 맛있었어'란 말을 몇 번이고 했고 우리는 저절로 물금에서 식사를 하면 '빅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나에게도 '몽카페(나의 카페)'가 생겼다.


"몸이 커피를 거부해."

내 몫의 커피를 맛있게 마시자 그제야 거의 줄지 않은 그녀의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J야, 커피를 왜 안 마셔?"

의아해서 물었다. J는 큰 수술을 받고 회복단계에 있었다. 커피 한 잔이 주는 그 행복감을 누구보다 제대로 만끽할 줄 아는 그녀였기에 나는 그녀가 몇 모금 마시지 않고 남긴 커피 속에서  가득 찬 검은 슬픔을 보았다. 아, 이제 둘이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함께 환호할 날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네가 내 몫까지 마셔주면 되지."

J는 밝게 말했고 나는 남은 커피를 내 쪽으로 덜어놓았지만 도무지 그 커피를 맛있게 마실 수가 없었다. '내게 왜 이런 큰 병이' 하며 원인을 따져 볼 수밖에 없었다는 J. 단정할 수 없지만 잦은 외식과 하루에 한 잔 행복감에 젖어 마시던 종이컵에 담긴 테이크아웃 커피로도 의심이 향하자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도 마시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고 했다.


"브라자 후쿠를 못 채우겠더라고."

"자다가 열이 오르고 땀이 나기 시작하면 그날 잠은 다 잔 거야.

"혹이 12cm라 큰 접시 가득 살점이 가득하더라."

"설거지하려고 물을 트는데 갑자기 요의가 밀려오는 거야. 마저 헹굴 때까지는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화장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 다음엔 어디로 여행 갈까, 무슨 책을 읽을까' 하던 우리의 대화에 갱년기, 오십견, 자궁근종, 골다공증, 요실금 등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맨발로 걷는 게 좋다 카더라, 브로콜리는 여성암에는 안 좋다 카더라, 7시간은 꼭 자야 된다 카더라.' 같은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을 공유했다. 다른 사람 앞에 놓인 작은 알갱이도 내 앞에 놓이면 커다란 바위가 된다. 혼자서 옷을 입기 힘들어지고, 화장실이 염려되어 장거리 운전이 두렵고, 눈이 흐릿해져 책 보기가 불편하고, 이른 저녁에 마신 커피 한 잔에도 잠을 설치게 되는 일이 내게 벌어져야 고통의 시기를 거쳐온 인생 선배들이 돌아 보인다. 그제야 그들의 경험과 조언에 눈과 귀를 열게 된다. 마라톤도 반환점을 돌면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당연지사. 가쁜 숨을 참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옆에서 달리던 지인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뭣이 중헌디'라는 말이 자꾸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러면서 목표를 1등이 아닌 완주로 수정하게 되는 것이 지금이 나이가 아닐까.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었다.


"나는 글 쓸 때 자기 검열을 여전히 많이 하는 것 같아. 좋았던 걸 쓰면 잘난 척하는 것 같고 사소한 걸 쓰면 뭐 저런 것까지 쓰나 할 것 같고."

"내 글의 애독자는 내가 되어야 해. 나중에 내가 그걸 읽고 그 순간을 생생히 되살려보며 웃고 울 수 있으면 그게 자신에게 솔직한 글, 좋은 글이 아닐까."

이런 대화를 나누며 '90살까지 살고 싶어' 하며 J가 웃는다. 내 앞엔 아이스커피, J앞엔 따뜻한 허브티가 놓였다. '삶'의 소중함을 몸이 알아버린 J와 달리 나는 여전히 커피와 사투 중이었다. 함께 있을 때 혼자만 마시는 '플로레스 커피'는 맛이 없다는 걸 알기에 서로를 위해서 건강히 오래 살아내야만 한다.

"커피 한 잔, 걱정하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몸을 기르자."

서로 다짐하자 자연스레 근력운동으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몽카페'는 우리의 변해가는 이야기들을 많이 엿듣고 기억해 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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