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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06. 2023

여름이 있어 수박도 있다


지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시베리아가 아닌 펄펄 끓는 사막이 떠오르는 건 여름을 싫어하기 때문인 걸까. 까탈스럽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계절에 대한 호불호만은 강했다. 푸르른 바다, 눈부신 청춘, 불타는 열정,  달콤한 햇살. 지금이야 여름 하면 이런 단어들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여름은 도려낼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도려내 버릴 환부 같은 계절이었다. 우중충한 장마, 무자비한 더위, 눈치 없이 흐르는 땀 노이로제를 불러오는 모기의 앵앵거림,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계절이 석 달이나 계속되면 '밥맛이 없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던 나도 입맛을 잃기 십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비만으로 고생해 온 내 몸에 튼살의 흔적은 은근히 새긴 레터링 타투가 아니었다. 난잡하고 무자비한 점령군처럼 몸 곳곳에 숨어 있었다. 아무리 더워도 소매 없는 셔츠나 반바지를 입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금방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도 5분이 못되어 이마에선 헐겁게 잠가 둔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듯 땀이 똑똑 떨어졌다. 런닝을 입어도 티셔츠 등 쪽의 색이 화선지에 먹 번지듯 스며들었다. 그렇기에 여름은 또 다이어트와 시름할 수밖에 없는 계절이었다. 3일 동안 하나의 음식만 먹는 다이어트가 한창 유행했다. 여름이면 바나나를 가득 사두고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하루만 되어도 물리고 힘이 빠져 대체로 이튿날 밤이 되면 정신은 녹은 엿가락처럼 무기력해졌다. 그럴 때면 힘이 없어 밖에 놀러 다닐 수도 없었다. 선풍기 하나에 의지에 오후에 낮잠을 자면 가위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끈적였다. 배가 고파서인지 낮잠을 자서인지 모르지만 길고 긴 여름밤, 불 꺼진 방에서 모기와 사투를 벌이면 불덩이 같은 것이 커져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양이 적어 포만감을 누릴 수 없던 바나나나 포도, 너무 달아 살이 찔까 함부로 먹을 수 없던 복숭아 대신 찾아낸 과일은 수박이었다. 다이어트 성공요인의 1순위는 영양밸런스가 아니라 기분이다. 기분 좋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다이어트 지속의 관건이다. 수박은 생김새부터가 시원시원하니 마음에 들었다. 시장 리어카 가득히 수박이 파라솔을 쓰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녹음으로 뒤덮인 여름산이 떠오른다. 큰 수박에 칼집을 힘겹게 내서 반정도 자른 후 양손으로 수박을 조심스레 가르면 제우스가 내리친 번개 같은 검은색 줄무늬 때문인가 '쩍'하고 땅이 갈라지듯 나누어지는 모습이 통쾌했다. 자르지 않은 반통을 큰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벌집 모양으로 칼집을 내서 한 입씩 먹기 좋게 썰어도, 반달 모양으로 잘라 하모니카 옥수수 먹듯 가로로 우적우적 먹어도 좋았다. 요즘 카페엔 수박 주스 메뉴가 인기가 있다.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않고 수박만 갈아도 시원하고 달콤하니 내 입맛에도 딱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내게 수박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입 안에서 우적우적 거리는 느낌이 주는 만족감, 뒤이어 오는 포만감에 있기 때문이었다. 배가 빨리 꺼져버린다 해도 일단 포만감이 생기면 화라는 불이 피시식 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박만으로 여름을 연명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박의 단점은 모기와 함께 밤잠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남들보다 화장실 가는 횟수가 두 배나 많은데, 하루 종일 수박을 먹어대니 도저히 귀찮아서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콩깍지는 단점만을 걸러내는 거름종이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다 쓰러진다'는 엄마 말은 듣지 않고 방광염에 도움을 준다더라, 부종을 없앤다더라 하며 응수했다. 그렇다고 수박을 먹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기억은 없다. 엄마의 잔소리가 없더라도 다이어트는 스스로 3일을 넘기기 어려웠다. 한 끼만 밥으로 대체해서 먹다가 결국엔 후식이 되었다. 외출 후 돌아와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수박 한 조각은 정신의 보약이었다. 여름 내도록 수박에 의지했다.


7월, 유난히 길고 무서운 장마 기간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곧 무더위가 닥칠 예정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경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잠깐 잊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과일 가게 앞을 지나는데 가게 풍경이 사뭇 바뀌었다. 토마토나 딸기가 가장자리로 물러나고 복숭아나 자두가 중간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제일 상석 자리는 뭐니 뭐니 해도 수박차지다. 무시무시한 여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만 반가웠다. 며칠 뒤 시골에 가져갈 과일을 사러 마트에 들렀다. 7월엔 아버님 생신이 있어 가족들이 시골집에서 다 모인다. 모여 앉아 먹을 과일로 무엇을 살까 하며 두리번거렸다. 복숭아는 알레르기가 있어 꺼려지고 망고는 이국적인 과일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참외는 맛이 좀 심심하고 자두는 어르신들이 드시기엔 좀 시지 않을까 싶었다. 여러 사람이 먹어도 될 정도로 양이 많고 적당히 달며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인 수박. 역시 여름 과일의 간판은 수박이다. 장마에 수박이 맛있게 익었을까, 열심히 두드려보며 한 덩이를 골라 차에 실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사막의 수박을 먹으면 한국의 수박이 싱겁고 영국과 독일의 수박은 거의 맹물 수준이라 한다. 강한 시련을 겪은 자의 내면이 더 알차고 실속 있다는 것은 큰 위로다. 우리가 고른 수박은 어떤 햇살을 받고 자란 녀석일까 궁금해하며 배를 갈랐다. '쩌억'. 소리가 경쾌한 것이 예감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입에 넣으면 부스러질 정도로 달달했다. 장마 속에서도 잘 자란 녀석이었다. 아이들은 놀이 삼아 수박을 파내고 그곳에 밀키스를 부어 화채를 만들었다. 덩치도 작은 녀석들이 큰 양푼이를 하나씩 끼고 고개를 처박고 무엇이 우스운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와, 잘 익었네요.' 어른들도 한 마디씩 하며 수박을 하나씩 가져갔다. 쟁반 가득하던 수박이 손놀림 몇 번에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박의 꽃말은 '큰마음'이라는데 왠지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후 제목을 붙이면 어울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을 먹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살다 보니 여름에도 좋은 추억들이 생기기 시작해서 여름이 좋아졌다고 낭만적으로 꾸며댈 수도 없다. 내가 여름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된 것은 취직을 하면서부터였다. 에어컨 없는 집에서 탈출하여 방학에도 시원한 곳에서 기거할 수 있게 되면서이다. 지겹던 장마가 끝날 무렵 유럽에서는 사상 초유의 무더위에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여전히 파리에는 에어컨 없는 집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름의 고통을 과거의 내 일처럼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40도에 가까운 더위를 무작정 견딘다는 그들에게 냉장고 속 수박을 나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여름이 기다려지고 여름이 다 지나는 것이 아쉬워지는 이유가 내게도 하나 정도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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