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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Mar 29. 2021

본분과 본능 사이

육아에 대한 내 마음 나도 알 수 없어요

 혜령이가 '엄마'를 몇 번 부르는지 세어보자 싶었다. 밖에서 두 팔을 벌리고 '엄마'하고 다가오면 세상 다 가진 것 같았는데 하루 종일 붙어있으니 '엄마, 엄마, 엄마' 소리가 대답을 요하지 않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내일은 '엄마'를 몇 번이나 부르려나 정확히 세어보려고 책상 위에 종이와 펜을 두었다. 바를 정자가 몇 개나 그려질까 하며 씩씩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혜령이는 역할놀이를 무척 좋아한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눈 뜨고 있을 때는 무슨 역할이든 맡아 아주 충실하게 해 내려고 노력한다. 한 살 아기가 되어 기어 다니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어 나를 아주 살뜰히 챙기기도 한다. 나와 남편에게도 그 놀이에 집중하길 바라는데 한 살 아기 돌보는 엄마 역할을 주면 고역이 따로 없다. 아기 놀이에서 언니, 오빠 놀이, 학교 놀이, 마니또 놀이까지 번갈아 가며 하면서 잘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정말 잘 논다.

"엄마, 아빠, 우리 아기 놀이하자."

'아, 또 시작인가. '

주말 아침엔 더 빨리 눈이 떠지는 게 고의는 아닐 텐데 이 때는 여덟 살 딸이 얄밉다.

"엄마가 너 이 만큼 키운다고 힘이 다 빠져서 다시 아기는 못 기른다. " 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마음이 소란스러워질 때가 종종 있다. 드러난 고성방가가 아니라 내 마음속 시끄러움이 소음의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머리로는 다 이해하지만 가슴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들이 그런 소음을 만들어낸다. 남의 집 육아 이야기는 공감도 쉽고 조언도 쉽고 험담도 쉬웠건만 나는 왜 남들에게 조언하듯 살지 못하는 것일까.


먹는 것 제대로 못 먹고 잠잘 것 제대로 못 자던 신생아 시기도 아니고 이제는 제법 의젓하여 친구 같은 느낌도 드는 딸이다. 벌써 이만큼 키운 것이 다행이다 싶다. 그러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대신 혜령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를 때, 내가 읽고 싶은 책 대신 읽어달라고 조르는 책을 집어 들어야 할 때, 가사 있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사정없이 스피커를 꺼 버릴 때 어찌 보면 참 시시한 때, 시시때때로 울컥한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엄마, 아빠 놀이에 평소보다 예민해지는 것은 부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일터로 커피가 두 잔 배달되어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의 어머니가 한 주 수고하셨다고 시원하게 드시라고 보내신 것이다. 인사를 전하려 문자를 드려야겠다 하니 "엄마 지금 여행 가고 집에 없어요." 한다. 평소 커피고 간식이고 많이 챙겨주시기도 하지만 말하는 걸 보면 사람의 품격이 느껴진다고 한 번씩 보내오는 문자에서는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있는 학부모였다. 막내가 일곱 살인 애 엄마가, 남편이 집을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애들 둘 만 놔두고 여행을 가셨단다.

 

조금 놀라서 "너희들 밥은 어떻게 하니?" 하고 물었다.

"아, 엄마가 시간 맞춰 요기요에서 시켜주세요."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하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요기요에서 밥을 배달시키는 엄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세련되고 스마트한 행동이다.

'애들을 저렇게 두고 가도 되나? 걱정도 안 되나?'

내가 남편이나 시어머니도 아닌데 괜히 그녀를 책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딱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나는 나를 또 나무랐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애매하기만 한 감정들로 불타오르는 금요일 밤이었다.


"너는 일도 하니 주말에 하고 싶은 거 있음 다 해라. 애는 내가 봐주마."

아이를 맡길 때면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당연히 여기시는 엄마가 같은 아파트에 사신다.

"나는 요즘 혜령이 보는 재미로 산다."

자진해서 데리고 밖으로 나가 주는 언니가 있다.

"내 딸 내가 보는 데 왜 매번 미안하다고 그러니."

놀만큼 놀다 오라고 절대 연락도 안 하고 애를 보는 남편도 있다.

 "넌 딸 거저 키웠다."는 말을 스스로 인정하는 내가 있다.


그럼에도 약속을 잡을 땐 눈치가 보인다. 매주 나가지 않도록 나 혼자 스케줄을 짜 본다. 어제는 남편이 애를 봤으니 남편도 자유를 좀 누리게 내일은 내가 혜령이를 데리고 한 바퀴 돌고 와야지. 이번 주는 집에서 셋이서 좀 쉬면서 보내야겠지. 혼자 집 나가 있으면 몸은 밖에 있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저녁은 좀 챙겨줘야지 하는 그 시간대가 넘어서면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죄책감이 느껴진다. 당당하지 못할 일이 아닌데 빚지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는 자신이 못나게 느껴진다.


이런 마음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뭐든지 하고 싶다. 친구도 만나고 모임도 나가고 혼자서 영화도 보고 도서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싶다. 오늘처럼 집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날에도 딸의 눈을 피해 잠시라도 책을 펼치고 싶다. 혜령이랑 놀아주지 않고 혼자서 좋아하는 책 읽고 음악 듣고 자유를 만끽한다고 내 삶이 더 고상해질까? 안 보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떠나가 보고 싶은 것, 이런 감정을 일컫는 단어를 없을까?


이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아빠랑 한참 놀던 딸이 나에게 온다.

"엄마 같이 놀자."

자기 딴엔 혼자 책 보는 내가 안쓰러워 놀이에 끼워주려는 것이다. 핸드폰이랑 책은 놔두고 얼른 오라고 재촉한다. 도돌이표 같은 이 놀이도 이 반성도 언젠가 끝나겠지. 수십 번 부르던 엄마를 한 번도 부르지 않을 때,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하고 나를 두고 놀러 갈 때, 내가 느낄 섭섭함을 미리 상상해본다. 엄마에게 진 빚을 딸에게 갚는구나 하고도 생각해본다.  


"엄마 어서 가자, 엄마 언니 오빠 놀이할 거야. 엄마가 첫째 정할 때 먼저 손 들어, 알았지 엄마?"

방금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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