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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Mar 05. 2021

가방의 무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현아야, 가족들이 모두 잠든 아침에 혼자 일어나 씻고서는 식사도 거르고 그 무거운 가방을 다시 짊어졌구나. 대한민국 고3의 신학기는 3월이 아니라 선배들의 수능이 끝나는 순간부터인가. 마치 바통을 넘겨받듯 1년이라는 긴 시간의 장거리 경주에 나서는 너의 모습을 보니 이 고난의 여정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바통을 넘겨준 선배들이 다시 이어받은 레이스의 끝은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구나. 두 손으로 들기도 힘든 그 가방의 무게를 너의 작은 어깨가 감당할 수 있을까. 너에 대한 나의 애착이 걱정과 불안을 동반하며 마음을 흐리게 한다.


현아야, 수없이 많은 영감들을 불러일으키던 나의 첫사랑, 꼬마 뮤즈가 어느새 자라서 십 대의 마지막 해를 맞았네. 내 배 위에서 잠든 너의 작은 심장이 내 심장과 하나가 되던 그 숭고한 시간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숨을 들이쉴 때 함께 올라왔다 내쉴 때 따라 내려오던,  작고 작던 네가 잠에서 깰까 봐 숨조차 머금던 때가 있었다. 배 위에서 잠든 이 존재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경이로운 감정을 너는 내게 선물했단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 이토록 확실할 수 있다는 것에 참 놀랐었지.


첫 옹알이, 첫 여행, 첫 입학과 첫 졸업까지 너의 모든 처음의 순간들을 함께 해 왔다. 너의 모든 처음은 나에게도 처음인 순간들이더구나. 말은 안 했지만 '우리 현아가 잘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 걱정이 앞서는 편이었는데 너는 언젠가부터 '우리 현아는 잘할 수 있을 거야.'는 믿음을 주는 아이로 성장해가더구나. 덕분에 현준이와 혜령이는 알아서 잘하겠지 하며 마음 편하게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 맏이로서 제일 많은 사랑과 제일 많은 걱정을 받고 자란 너이다 보니 네 가방의 무게에 어른들의 기대라는 것도 더해져 있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노력한 만큼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결정한 대로 하려니 마음이 약해진다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신경이 자꾸 날카로워진다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너를 보니 고3병이란 말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구나 싶다. 그 병이 다들 겪는다고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련만 왜 아픈지도 모르니 엄살도 부리지 못하고 정체 불분명한 고통에 시달리는 너를 보니 내 마음도 아프네.


 "사람이 마음이 편해야지. 공부가 전부가 아니다. 긴 인생이다, 지금이 제일 큰 시련인 것 같지만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더라.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해나가자." 하는 진심이 상투적인 위로밖에 되지 못했던 것 같아 안타깝다. '욕심을 내려놓아라.'는 성인군자 같은 처방법은 고리타분하게만 들려 너의 반발심만 불러일으킬까 염려스럽다. 차라리 현실적으로 옆에 앉아서 수학 문제나 국어 문제의 답에 빨리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당장 더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한심한 생각도 하게 된다. 마음만 앞서고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나의 언어와 지혜가 어찌 이리 궁색한가 난감하네.


주인으로 살고 싶니, 노예로 살고 싶니 하고 물은 철학자가 있단다. 그 철학자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주인, 남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정의를 내리더라.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눈치 보는 사람이 노예다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고 당당히 나아가는, 주인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마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기기 위해 노예의 삶을 자처하고 마는가 보다. 일등을 원하는 것은 사회임에도 내가 일등을 원한다고 굳게 믿고서는 의심하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리지. 타인의 기준에 맞춰진 목표의 결승선은 과연 존재할까. 그 마라톤에서 뒤처지거나 벗어나면 인생이 실패라도 한 것처럼 불안해하면서 말이야. 다른 길이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지만 그 길 역시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가야 하는 길이지. 한참 달리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길이며 달린 길에 대한 미련으로 찾았어도 쉽게 들어서 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새로운 것을 배워서 기쁘고 그 지식이나 지혜가 작게라도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주인으로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속상해한다면 그건 내 기쁨과 성장의 결과가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는 거지. 네가 밥 먹는 시간까지 아까워하며 책을 보는 것이 좋아서 하는 공부라면 얼마나 스스로 얼마나 신이 날까. 그러나 모든 과목을 다 잘하는 사람은 어느 한 분야를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 과목을 즐겁게 잘 해낼 수 없을 거야.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 힘 빼기보다 나만이 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과목 그것 하나 발견해가는 과정의 공부가 되었으면 한다.


아직 내 길을 발견하지 못해 즐겁지 않아도 이 길을 달릴 수밖에 없다면 견디는 게 아니라 즐겼으면 좋겠어. 열심히 하되 결과를 억울해하진 말자. 너는 아직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해서 즐기며 공부하진 않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의 힘을 쏟고 있잖니. 나는 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옆에서 잘 봐 온 사람이잖아. 나는 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해.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욕심도 많고.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다 칭찬해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천천히 고민해. 네가 생각하는 멋진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거야.


적당히 돈을 벌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삶도 편안하고 안락할 거야. 그렇게 평범하게 살기가 제일 어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 꿈을 돈 버는 직업의 도구로만 여기는 것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굶어도 좋아라고 무시하는 것도 저울 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운 듯 불안하다. 둘의 조화를 맞추려 하면 오히려 꿈은 다시 어정쩡해져 버리고. 항상 물건을 살 때도 어른들의 경제 사정을 살펴봐주는 너를 보며 그 마음씀에 모순된 감정이 인다. 직업의 선택이 꿈꾸기와  동일하게끔 여기도록 만든 것이 물질적 결핍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라고 말하지만 너는 이미 어른의 삶의 무게까지 배려하는 철든 아이란 것을 알기에 너무 많이 따져보고 재어보는 겁쟁이가 된 건 아닐까.  


나는 너의 꿈을 찾는 데는 조금 이기적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단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자잘한 평판들과 맞바꿀 줄 아는 용기 같거든. 나는 네게서 무언지 잘 모르지만 혁명적인 삶을 살고 싶은 이상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때가 종종 있어.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뛰었던 레이스가 아닌 다른 길을 발견하여 앞서 걸어가 보고 싶은 너의 포부를 나라고 어찌 모를까.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을 찾으면 응원하고 축복해줄 테야. 원래 공부 못했던 어른은 그것이 아쉬워 공부하라 그러는 법이야. 나는 주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았지만 그걸 실천할 용기가 없었고 꿈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부족했지. 그래서 너에게 나처럼 살지 마라 꼰대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 마음이 부대낄 때, 네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내가 주인이 되려는 선택인지  노예를 자처하고 마는 결정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어. 나 역시 사는 모습으로 증명해 보이도록 노력할게.  얼마 전 어떤 이의 강연을 듣는데 그 강연자가 어른의 말은 반만 들어라, 고 하더라. 어찌나 맞는 말인지 무릎을 쳤다.


'소리에 놀라지 않은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축복의 말을 담아 열아홉 살의 생일을 격하게 축하한다.

많이 많이 사랑해.


2021년 3월 어느 날, 나의 첫사랑 현아에게 이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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