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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pr 15. 2021

편지-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하늘이 푸르른 날이다. 주말 아침 길은 한적하고 내 발걸음은 가벼워. 귀에선 015B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별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란 가사를 따라 흥얼거렸어. 그 가사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파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라. 너를 그리는 여정, 오늘 산책의 제목은 이미 정해두었어. 그 여정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어젯밤 네 편지 상자를 꺼내와 두 시간이 넘도록 읽었단다. 네가 좋아하던 '서태지와 그 떨거지들'의 슬픈 예감을 들어볼까 잠깐 망설였어. 이오공감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나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가 아닌 015B의 노래를 고르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칭찬받을 것 같은데.


일주일분의 날씨를 손가락 하나로 미리 알 수 있는 세상이 될 거라 넌 상상했었니. 지금도 날씨를 미리 체크하는 꼼꼼함은 없는 나지만 한 번씩 미리 보게 되는 한 주 날씨에 '비'그림이 많으면 그만 의기소침해지고 만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대로 좋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이 불어 좋다고 누군가 물으면 그렇게 '다 좋아요'하고 모범답안처럼 대답하겠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늘 푸르러 높고 머리가 살랑거리는 오늘 같은 늦봄의 공기를 절절히 좋아해. 글벗과의 평생 글쓰기를 약속하며 첫 소재로 친구가 '비'를 선택했을 때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느낌이 들었어. 너를 나의 현재로 불러올 때가 이렇게 우연히 찾아오는구나 싶었단다.


  감천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 위치한 학교는 어릴 적 던 명랑소설의 기숙학교처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았어. 늘어선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고 있던 신관 건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테네 신전 같았고 감천 쪽 정문에서 운동장 옆길로 난 길은 잘 갖꾼 식물원의 산책길 마냥 단정했었어. 면 교정은 동네 사람들의 벚꽃 명소가 되었고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다소 느려지게 만들었지. 훗날 텔레토비 동산이라 불렸다던 잔디밭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때의 사진을 한 번씩 들춰본다. 자유를 침해당한 입시생의 고단함도 없고 친구에 대한 독점욕으로 질투란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던 어설픈 우정이 주던 피곤함도 없다. 안 팍으로 '여인천하'의 한 장면을 온몸으로 견디곤 했던 우리의 속사정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 우정의 맹서는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는 듯 즐거운 표정들뿐이야.


학교의 많은 곳을 사랑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한 곳은 괴정 쪽으로 나 있던 후문 바로 앞의 짧은 숲길이었어. 사실 100m도 되지 않은 짧은 길에 흙길도 아니었기에 숲길이라 하기엔 과장인 듯하네. 아침형 인간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일찍 일어나 공부를 했고 학교도 남들보다 빨리 가는 편이었어. 아침에 갈아입은 교복 셔츠가 땀으로 젖곤 할 정도의 고바위 길을 올라서면 나를 반기는 것들은 나무들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 나무 숲길로 성큼 발을 디디면 산 정상에 선 듯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곤 했. 내리막길을 앞두고 숨을 고르면 아,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 의 지저귐도 상쾌한 노래 같았어. 숲에 한 발 들여놓으면 딴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듯 설레기도 했었던가. 우르르 몰려 북적이던 하교 시간에는 느낄 수 없던 비로움이 좋았어.


신학기가 되면 신경성 스트레스로 자주 배에 가스가 차서 구글거렸고 장경련도 잦았어. 친한 친구 한 명만이라도 같은 반에 배정받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건만 내게 그런 행운은 초중고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지. 쉬는 시간만 되면 나는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을 찾아 방황했어. 혼자 있는 시간은 좋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은 내가 제일 두려워하던 것이었.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큰 덩치 탓에 남의 시선에 민감했기에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던 때였지. 학기가 끝나갈 즈음엔 반의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아이로 적응했지만 잔인한 3,4월은 매년 그렇게 길게 느껴졌어. 고등학교 입학식 날, 같은 중학교 출신인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웠다는 말을 네 편지에서 다시 읽었을 때 나도 생생히 떠올랐어. 반에서 키가 제일 크다는 이유로 짝 없는 51번이 되어, 서글퍼졌던 그 순간이 말이야.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아이들은 감천 쪽 정문을 이용했으나 너는 괴정 쪽 길을 통해 하교를 했지. 자연스레 같이 하교를 하는 친구가 한 명 생겨서 다행스러웠어. 기억 속 그 날의 배경이 환한 것을 보면 토요일이었던 걸까. 토요일 오후는 마음도 홀가분했던 것 같다. 그날도 만화책을 빌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한껏 들떠 있었을 거야. 아니면 모의고사가 끝나고  일찍 마친 어느 날의 오후였을 수도 있겠다. 너와 나 그리고 또 누군가, 이서 팔짱을 끼고 그 짧은 숲길의 시작점에 들어섰을 때 난데없이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어. 평소 나는 우산을 잘 챙기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날 가방 속에 우산이 있던 아이는 나 밖에 없었어. 우산을 펼치고 우리들은 바짝 붙어섰어. 후드득후드득. 쏴--소나기는 금세 더 기세 등등해졌어. 덩치는 제일 큰 내가 우산 주인이라고 중간에 섰으니 너희들 어깨는 흠뻑 젖기 시작했지.

 "우리 그냥 비 맞고 갈까?"

나는 우산을 접었버렸어. 우리는 손을 잡고 내리막길을 리듯 내려갔지. 비를 맞는다는 게, 함께 뛴다는 게 그렇게나 재미가 있었을까 싶은데, 웃음소리 오랫동안 우리 뒤따라왔어.


밀란 쿤데라의 '사랑'을 읽으며 어렵다고 투덜대던  너, '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하던 너, 이정하와 김남주와 유치환의 시를 암송하던 너, 수학 시간만 되면 나에게 편지를 쓰던 너, 혼자서 울산행 기차표를 끊던 너, 지리산, 설악산을 벗하며 자유를 갈망하던 너, 내가 잘 모르던 단어들이 멋지게 어우러지던 글쓰기를 하던 너. 그런 너를 동경했어. 너를 따라 폭풍의 언덕을 읽었고 류시화의 시집을 건넸으며 흰 종이 있어도 어디서든 편지를 썼지. 주제를 정해 쓴 글을 서로에게 선물하던 내 첫 글 벗. 한산도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우리를 기다리던 너를 나는 사랑했었네. 여행의 마지막 날 함께 먹은 라면이 잊히지 않는다며 다음엔 꼭 네가 좋아하는 산으로 가자고 해서 나를 들뜨게 했었어. 별을 보고 밤을 새우며 꿈을 이야기하던 그때의 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너는 1학년 때부터 꿈으로 정해 둔 특수교육학과가 있는 대구의 어느 대학교로 입학을 했고 우리는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고등학교 3년 내도록 나의 펜팔 친구가 되어준 너를 찾지 못했지만 잊진 않았어. 살면서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했지. 인터넷 검색창에 네 이름을 쳐보곤 하 때도 있었어. 그러나 지금 너와의 연결고리는 정말 내게 남겨진 수십 통의 편지밖에 없구나. 20년이 훌쩍 지나 처음으로 펼쳐 본 네 편지는 빛바래지 않았더라. 편지 귀퉁이들 곳곳에 숨겨진 시와 너의 그림들을 보물찾기 하듯 하나하나 찾아봤어. 네게 받은 초콜릿의 껍질까지도 봉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보니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번지더라. 사랑을 담아 우정을 다짐하는 너의 말들, 시험기간에 받는 스트레스와 시험이 끝난 후의 홀가분함, 방학 계획과 선생님들 뒷담화에 강백호에 대한 애정까지도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지 뭐니.


소낙비 내리던 그 교정 앞에 다시 섰어. 그로부터 스물일곱 해가 지났네. 수령이 100살을 넘었다는 은행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어본다. 겉모습은 변했지만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은 나와는 반대로 나무는 늙지도 않는지, 예전 그 모습 그대로다. 비는 오지 않고 화창하기만 한 봄날, 벚꽃과 녹음이 서로 자리 바꾸기에 한이야. 비를 싫어하는 나에게 '비'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 준 너. 그 비는 그렇게 몸살을 앓던 잔인한 4월이 지나고 한없이 푸르러도 좋을 삶의 전성기가 펼쳐지리라는 신호탄이었어.  내가 우산을 접던 순간,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던 너의 말을 평생 고마워하며 살았다는 걸 전하고 싶다. 우체국 소인이 찍힌 봉투에서 너희 집 옛 주소가 남아 있더라. 그 봉투의 우리 집 주소는 여전한데. 내일 우체국에 가서 이 그리운 마음을 너에게 띄어볼래.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PS. 나의 그리움이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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