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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17. 2021

유혹-불혹과 유혹

 

배꼽이 빠지게 크게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저는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구르는 돌만 봐도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로 웃음꽃이 피었던 시절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그 시기가 짧아지더니 극히 드문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불혹을 맞이한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습니다. 불혹(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 공자를 처음으로 읽던 시절, 그가 내린 마흔에 대한 정의가 참으로 근사했습니다. 갈대처럼 연약하게 흔들리던 젊은 날엔 그런 굳건함을 동경했지요. 자의 불혹에는 얼씬도 못했지만 점점 남의 일에 무관심해지고 내 삶에도 심드렁해지는 것을 보면 나잇값 하며 살고 있는 건가 쓴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불혹(不惑미혹되지 못하는)한 삶이라, 김 빠진 사이다처럼 상투적입니다. 불혹이란 말을 되뇌어보니 반대급부로 꽁무늬에 '유혹'이란 단어를 매달고 옵니다.  


'유혹(誘마음을 꾀어내어 惑미혹시킴)'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을 하염없이 혜매고 다닌 어느 날입니다. 그림이 많은 미술관 잘 차려진 뷔페입니다. 여행객 입장에서의 미술관은 다시는 맛보지 못할 음식을 제 몫의 양보다 더 먹으리라 기대하며 설레지만 이것저것 먹고 나면 남은 음식은 시큰둥해져 버리는 식당럼요.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다리는 아프고 그 그림이 그 그림이라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가로 세로 50cm가량의 자그마한 크기임에도 보는 순간 눈길을 멈추게 하는 한 점의 그림을 마주하고 발길이 멈추었습니다.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나, 가치 있는 그림과 잘 그린 그림의 차이 등을 구별하는 나름의 식견을 갖추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혼돈스러운 그림이었습니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 그림이 자꾸 더 다가오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노골적인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쉬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구한테 인지 모를 체면을 차리느라 당당하게 보지 못하고 저는 멀찍이 떨어져 당당히 유혹을 즐기는 한 여인의 사진만을 남겼습니다.



처음으로 남녀의 정사장면을 영화에서 본 것은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던 시절입니다.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도 모르던 나이였지요. 무심코 튼 비디오 테이프에 비친 영상은 이해불가의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능일까요. 무언가 보면 안 되는 것을 보았다는 죄책감에 화들짝 놀라 비디오를 껐습니다. 분명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까닭 모르게 부끄럽고 하면 안 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그 영상을 본 것이 우리 엄마, 아빠라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포르노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남았습니다. 부모님이 곤란해질 것 같아 그 일을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은밀하게 각인되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그 부끄러움의 기원에 대해 마주하라고 스스로를 유혹하는 그림이었던 걸까요. 여전히 지하철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e북으로 보면서도 남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유혹당하는 것이 미혹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혹'하면 떠오르는  있습니다. 40여분 간 역순행적 구성의 소설 한 편을 읽는 기분이 드는 곡입니다. 스릴러 치정 로맨스 이야기를 끊어 읽지 못하듯  음악을 듣고 있으면 지루할 틈 없이 시간이 흘러갑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입니다. 1악장은 사랑의 파멸을 노래합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격렬히 대립합니다. 폭풍우 속을 뚫고 가는 기차처럼 멈추고 싶어도 멈추어지지 않는 격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합니다. 이어지는 2악장은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립니다. 사랑의 시작은 은은하고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은은히 비치고 새는 노래합니다. 바람은 화답합니다. 다정한 두 연인이 사랑을 속삭입니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주인공들이 사랑을 확인하기 전 밀당의 달달함을 즐기는 부분에 매료되듯 제일 좋아하는 악장입니다. 불륜의 끝을 알고 있더라도 끝내 달려갈 수밖에 없었을 듯 한 사랑의 한 장면을 그려 보여줍니다. 3악장은 사랑을 확인한 연인들의 기쁨과 파국의 서막이 번갈아 반복되는 듯 이제는 이미 익숙한 선율들이 반복됩니다. 주인공들이 사귀기 시작하면 금세 흥미를 잃는 것은 저만의 기호인가요. 개인적으로 3악장의 다소 지루합니다.

 

'음악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톨스토이의 경고는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격정적 멜로디에 푹 빠져들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호강에 좋았지만 3악장까지 달리고 나면 지친 기분이 듭니다. 반복 청취는 불가합니다. 불혹(不惑)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들어야 합니다. 이 곡을 '영혼을 자극하는 음악'이라 평했던 톨스토이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이름을 따서 중편소설을 짓습니다. 아내와 그의 애인인 바이올리니스트가 합주하는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듣고 질투에 눈이 먼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는 두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는 데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 음악이었다고 믿습니다. 스토이는 눈물을 흘리며 음악을 들을 정도로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피아노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인간을 유혹하여 살인과 불륜을 정당화한다고 톨스토이는 경고합니다. 그 역시 음악의 유혹에 정신을 놓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위 그림은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은 화가 르네 프리넷이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유혹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소설의 결말을 알기에 더 가슴 조이는 떨림의 순간입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주고받는 치열하기까지 한 그 선율들은 격렬한 유혹과 그에 맞서는 이성의 끈질긴 저항은 아닐까요. 갈 데까지 간 싸움에서 승자가 따로 있을 리 없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끝까지 대등하게 접전을 펼치며 화려하게 막을 내립니다.


 유혹(誘惑) 언제든 반갑기만 한 손님은 아니었기에 유혹(有惑) 정도로 타협을 보고 싶은 어중간한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유혹이 금기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어 다가온다고 느끼는 건 손에 무언가를 쥐고 한참 불혹의 나이를 지나고 있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유혹은 강렬한 매혹에 이끌려 끝 간데없이 따라갔다가는,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을 함께 품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천상의 기쁨을 맛본 사람만에게 만 추락이란 것도 있을 테지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 충실하고픈 격정적 사랑을 꿈꾸시나요?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한가요? 한쪽 발에 매인 족쇄를 끊고 비상하고 싶으신가요? 무언가를 얻을지 날개 없이 추락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늘 유혹과 불혹 사이에서 널을 뜁니다. 당당하게 유혹당할 수 있으려면 정말 불혹의 정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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