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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10. 2021

일-일의 슬픔과 기쁨

 

나는 일하는 데 부대낌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대가가 오가는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애를 쓰게 되는 것'이 버겁다.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공부라는 것을 억지로 시켜야 돈을 벌 수 있는 그 일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느낀다.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선생으로서 불운이다. 그러나 이 일에 행운아도 드물 것이다. '아이들이 공를 좋아하게끔 이끄는 것이 너의 몫이야.'라고 일을 계속하기 위해 스스로 사명감을 조작해내는 것에도 지쳤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편히 살 경제적 형편도 아니거니와 쌓아둔 기반으로 이제는 많든 적든 일정 수입은 보장해주는 일터를 포기하기도 힘들다. 물론 장점이 단점보다 훨씬 많다고 철저히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 도달한 결론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그래, 참고 감사히 일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다짐은 다짐일 뿐, 저절로 우러나는 진심이 아니기에 땅 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잘한 바람에도 쉬이 흔들리고 만다. 지금껏 그리 살았듯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게 될 그날이 오기까지 누웠다 울고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바람에 나부낄 것이다.


명리학으로 보면 운명은 타고난 팔자에 운이  더해져 결정된다. 운은 태어난 달부터 시작하여 여름, 가을, 겨울 순행하는 사람이 있고  여름, 봄, 겨울로 역행하는 사람이 있다. 한 계절에 삼십 년이니 보통 사계절 운을 다 거치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바야흐로 여름은 젊음을 상징하며 노동의 계절이다. 여름에 태어 난 사람은 겨울 운이 도래하기까지 길게는 60여 년을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야 한다. 여름에 태어나 순행하여 결실의 계절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한 사람은 일구어 놓은 성과 만족하며 물러나 여생을 즐긴다. 반면 역행하여 봄을 지나 겨울을 맞게 되는 나 같은 사람의 운은 열심히 일하다 갑작스러운 일로 일을 그만두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명리에서 해석해 보는 나는 쉬운 일거리를 타고난 명은 아니다. 심성을 갈고 닦아 받아들이고 인내해야 보람이 기다고 있다. 것을 한탄할 수도 없는 게, 그 힘든 손님들이 내 목숨줄 이어주는 은인이기 때문이다. 뚝심이 부족한 자아이기에 같은 일에 다른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체감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인생 숙제이다. 모든 팔자와 운의 흐름에는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없이 쓰이다가 힘이 빠져 쓰일 수 없을 때, 조기 강제퇴직을 당한다니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누구의 인생인들 크게 다를 바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예순 즈음되면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고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될 기회가 공평하게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먼 나중의 일,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확실성 위의 한 점에 불과했다. 남 이야기 같았다. 그때만 해도 아직도 그렇게나 더 오래 일해야 하는 거야, 라며 투덜거린 기억이 생생하다.


'일'에 대한 글쓰기 주제를 받아 들고 돌아보니 이번 기회에 내 일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제적 상황은 예전과 달라서 일이 간절한 생계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몸에서 이상반응이 일어나는 때가 잦아졌다. 일할 때 숨이 가빠지기도 하고 가르쳐주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대할 때면 가슴이 막히듯 통증도 느껴졌다. 왜 일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하루의 삼분의 일을 즐기는 시간이 아닌 견디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단 말인가. 그게 손해인 것을 충분히 알고 그 시간을 즐기자고 매번 생각하지만 이십 년이 지나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그 근본 원인을 밝혀 해결점을 찾아봐야겠다. 정면돌파를 각오했다. 도서관에서 일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며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사고의 진전도 방향의 전환 기회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정면돌파라 말하면서도 사실 일을 수월하게 잘 이어나가기 위한 방편을 찾는 중이란 것을 뇌보다 똑똑한 마음이 몰랐을 리 없다. 어차피 그만 두지 못할 상황, '업(業)'을 잘 받아들일 지혜가 간절히 필요했다.


주제를 들고 낑낑거리던 어느 날, 영화를 보는데 그의 말과 표정이 잊히지 않고 여운을 남겼다.

제 마지막 날입니다.
조기퇴직을 하거든요.

오늘요?



오늘이 공장 마지막 날인가요?



지금 절벽 앞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오늘 저녁에 뛰어내리겠죠.

오, 안돼요.

새로운 것도 많이 찾겠죠.
완전히 다른 삶을 살 테고요.
문득 집에 있는 저를 발견할 테고요.

내일은 뭘 할 건가요?

내일요?
아마도 푹 자겠죠.

내일은 푹 주무 쉬고, 모레는요?

은퇴는 처음이라서요.
앞이 텅 비어 있죠.


'내일은 뭘 할 건가요?' 남자가 한참 대답하길 망설인 그 물음에 나는 어떤 답을 했을까.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미소 짓지만 쓸쓸해 보이는 저 얼굴은 미래의 내 것일 터였다. 애쓴 만큼 주름의 깊이도 동공의 깊이도 미소의 처량함도 깊어지겠지. 앞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은퇴 후엔 내가 꿈꾸던 마음의 평화와 경제적 자유와 관계의 원만함이 대기하고 있을까. 며칠 푹 자고 나면 애쓸 무언가를 또 찾아 헤매는 건 아닐까. 텅 빈 앞 날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까 하는 상상은 자주 해 보았다. '자의로 일을 다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해볼까.'하고 인생의 후반기를 알차게 꾸릴 다른 일을 상상해 보는 것은 작은 숨구멍 하나 더 트는 일과 비슷했다.


언젠가 자동재생된 유튜브 동영상 즉문즉설을 듣다가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재미도 있고 유익해야 한다. 모든 순간이 그래야 한다.'라는 말을 적어둔 적이 있다. 일에 관한 말씀이 아니었는데 나는 목적어가 일로 바뀌어 들렸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다른 사람의 직업들은 제법 근사해 보이고 장점만 보였기에 초등학생 장래희망 적어내듯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직업을 고르는 게 아니라도 나의 내일이 텅 비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어도 무료하지 않을 사람이라 자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를 떠나 혼자만의 시간에 침잠하면 완벽히 행복할까. 평소에 책 읽기, 글쓰기 할 시간이 부족해서 시간만 많으면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고작 두세 시간 보내고 나면 지쳐서 이어가기 힘들었다. 여행도 일상이나 일이 되면 간절하던 그때처럼 좋하할 자신이 없었다. 사진이나 미술 관람, 음악회는 어떤가. 소통이나 창조 없는, 향유만 하는 문화생활 역시 쉽게 질릴 것이다. 육아는 여전히 주업이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가 않았다. 좋아하는 모든 것이 나를 이루는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일 하는 그 시간들을 대체하여 채우기에 꽉 찬, 미치게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을 희생하지 않으며 미래를 대비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유익한 일은 존재할까? 눈 벌겋게 뜨고 찾는다면 찾아지는 것일까?


얼마 전 지인과 오전에 짧은 만남을 가지며 서로를 부러워했다. 일하러 가는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너. 과연 누가 더 나은가 따져 보았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어 보였지만 때로 아니 자주 나는 어리석어지곤 하니까. 스스로 수학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온, 나를 행운아로 만들어 준 제자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을까, 안부와 함께 카톡으로 보낸 아이스크림 기프티 콘 하나가 중3 소녀가 용돈 아껴 보내는 책 선물로 돌아왔다. 공부할 때 잘 못 알아들어서 실랑이도 겁나게 많이 한 남학생이 미용사가 되는 길로 접어들어 너무나 재밌다고 군대 가기 전에 찾아왔을 때는 그 아이 자랑에 몇 날 며칠 수다스러워졌다. 방학이 되어 부산에 내려왔다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고, 산책 삼아 동네 한 바퀴 돌다가도 찾아오는 어른이 된 아이들. 그들이 나의 슬픔이었고 기쁨이 되었다. 100번의 자잘한 괴로움과 1번의 큰 기쁨, 그 빈도 차이 때문에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멀게만 느껴지던 조기 퇴직자의 운명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착착 다가오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십 년이나 해 온 일을 자유자재 가지고 놀지도 못하고 여전히 일에 놀아나고 있지만 그래도 내 사정에 잘 맞으며 보람도 챙기는 일이다 싶어 지며 세월 가는 게 아쉬워진다. 결국 '일'은 아무 말 없이 고요한데 나 스스로 시끄러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일은 일일 뿐 휘둘리지 말자. 더 이상 너덜거리게 놔두면 나만 괴로울 뿐이겠지. 인생은 해석이요, 생각이 길이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생각 잘하기' 뿐이다. 봄을 찾아 평생 온 세상을 혜매고 다녔으나 고향집 마당, 한 그루 매화나무에 봄이 있더라는, 파랑새 이야기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한다면 무책임한 결론일까. '고작 그것?' '결국 이것!' 같은 되돌이표 고민과 인생이다. 결국 정면돌파는 하지 못하고 물음은 물음표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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