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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Mar 02. 2022

영업, 타협하지 않는 고집쟁이 출판사, 수류산방

박상일 방장&심세중 실장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공장처럼 변했다. ‘사람보다 돈 먼저!’ 이 논리는 어느덧 책의 세계에도 침투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책들도 마구 찍혀 나오는 바람에 세상엔 책이 넘쳐나지만, 정작 인간에게 필요한 양질의 책은 없는 때도 부지기수다. 이런 심각한 불균형의 아이러니에 ‘그러려니’하고 살아가는 게 대부분의 삶이다. 하지만 ‘그러려니’에 저항하는 출판사가 있으니, 바로 수류산방이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될 거라면 굳이 우리가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수류산방 박상일 방장은 말한다. 수류산방은 <현대건축의 모험>을 첫 책으로 <의재미술관 개관기념 화집>, <예술사구술총서>, <박수근과 미술관 총서> 등에 이르기까지 기획과 디자인에 고집스레 그들만의 색을 담아왔다. 그들이 낸 책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수류산방 구성원의 존재 증명이다. 자본주의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향 탓에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들이지만 이제는 ‘수류산방’이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단계에 까지 왔다. 수류산방을 움직이는 얼굴들은 누구일까? 서울 청운동에 자리잡은 조용하고 아늑한 수류산방 사무실에서 박상일 방장과 심세중 실장을 만났다.


돈 번 후, 출판 일 하자 했건만…

Q 수류산방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박상일 : 2001년 디자인하우스에서 광주 의재 미술관 도록을 만든 이들-당시 DES사업부장이었던 나와 <디자인>지 기자였던 심세중 실장, 디자이너 김용한 실장, 사진 이한구 실장-이 각각 퇴사 후에도 만나 놀며 자주 모이게 됐다. 당시에는 처음부터 출판사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나중에 돈 벌면 그때 출판하자고 했었다.

Q 나무 수(樹)에 흐를 류(流)자를 쓰는 수류산방이란 이름에 담긴 특별한 뜻이 있을 것 같다.

박상일 : 2003년 겨울 어느 날, 앞에서 말한 멤버들이 성북아파트에 있던 작업실 공간에 모여 술 마시고 있었다. 이야기 화제로 성북동에 이태준 선생의 수연산방, 김환기 선생의 수향산방도 있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도 그들의 이름을 물려 받기로 했고, 의재 허백련 선생님이 쓰신 문장 중 ‘공산무인 수류화계(빈 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라는 문장에서 ‘수류’를 따와 ‘수류산방’이란 이름을 지었다.

Q 수류산방 하면 기획과 디자인이 함께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상일 : 기획으로부터 동시에 틀이 생성되는 것이라 이 둘이 분리될 수는 없다. 지금껏 우리가 디자인만 한 경우는 2~3% 정도로 극히 드물다. 상대가 디자인만 의뢰하러 오더라도 기획부터 우리가 하도록 유도한다. 그 말은 우리가 하는 기획의 성격이 굉장히 강하다는 거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책이라면 굳이 우리가 할 필요는 없다. 

Q 클라이언트들을 주로 어떻게 만나나?

박상일 : 대부분 뭔가 해결이 잘 안된 사람들이, 어찌 알고 알음알음 찾아온다. 따로 영업을 하진 않아서 주로 클라이언트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편이다.

Q 알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을 테니 갈등은 별로 없지 않나?

박상일 : 그렇진 않다. 우리의 강한 표현을 그분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면 부딪히는 거다. 우리가 유도하는 것과 그 분들 생각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당황하고, 그 후에도 계속 조정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Q 수류산방과 클라이언트의 뜻이 맞지 않을 때 어떻게 해결 하나?

박상일 : 그냥 밀고 나간다. 중간에 파토 날 때도 있다.

Q 일이 어그러지면 그때까지 작업한 게 아깝지 않나?

심세중 : 그게 아깝단 생각 때문에 결국 지게 된다. 우리는 그걸 함으로써 그 시간에 정말 해야 하는 다른 일을 못하게 된다. 상대가 평등하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시켜 나가고 행동 한다고 느껴서 작업을 중단했는데, 결국 같이 일을 안 한 게 맞았다고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았다.

Q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서 디자이너는 ‘을’로 많이 취급한다.

심세중 : 클라이언트는 실현하고 싶은 바에 대한 추상적 생각까지만 하는 거고, 그게 뭔지를 구체화 시켜주는 사람이 디자이너다. 최소한 우리가 일을 하는 동안은 공정하자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정말 좋은데, 왜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안 들어주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걸 들어주면 우리 디자인이 안 나오는 거니까 양립 불가능한 거다. 착하고, 음식도 잘하고, 예쁘고, 섹시한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이념을 지향한 건 아니지만, 과정에서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Q 누구나 자존감을 지키고 살고 싶어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심세중 : 영업도 안 하고, 기업이나 관공서도 찾아오는 일만 하는 우리가 이걸 계속할 수 있는 길은 각 프로젝트에 올인 하는 것, 한마디로 진짜 잘 하는 것뿐이다. 상대가 나한테 하는 요구들이 부당할 때 “지금 내게 부당하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으로 손해일 때도 생긴다. 예를 들어 500만원 짜리 일이면 투입된 비용으로 2주 안에 끝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최고의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한다.

박상일 : 운대도 있다.(웃음) 힘들게 10년을 하면 좋아지겠지 했는데 안 좋아진다. 그나마 좋아진 건 몇몇 마니아들이 알아주기 시작한 거다.


가로로 눕혀서 읽는 시집?!

Q 책 얘길 해보자. <민선5기 공공임대주택 8만호> 백서는 서울시 행정 보고서 용역 작업이었다. 입찰은 안 넣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관공서 일을 하게 된건가? 

박상일 : 건축가 조성용 선생님이 계신 성균건축도시설계원에서 서울시 공공임대주택사업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용역을 받았고, 우리는 그 결과를 책으로 내는 일을 맡았다, 비용을 따지면 있는 자료로 디자인만 해주면 끝이었다. 하지만 있는 자료만으로 책을 내면 세상에 이상한 책이 한 권 더 생기는 거다. 집 설계 도면을 일체 같은 스케일로 다시 그리고, 주택 중 몇 가구는 직접 방문해 인터뷰를 하면서 작업을 거의 다시 했다. 주민들의 민원을 대신 듣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2~3개월에 끝날 것이 1년 가까이 갔다.


<민선5기 공공임대주택 8만호 백서> (사진제공 : 수류산방)


Q 보통 관공서 작업은 완성도 보다는 납기일 맞추는 게 중요한데, 마찰은 없었나?

심세중 : 책이 언제 완성되냐는 독촉을 심하게 당했다. “책을 도대체 왜 못 내냐”, “벌금을 내게 하겠다”, “법적 조처를 하겠다” 그 앞에서 때론 바보짓도 하고, 모른 체 하면서 계속 했다. ‘이 책이 최소한 이렇게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전까진 계속 했다. 한 명이라도 이게 맞다고 하는 공무원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경우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Q 수류산방은 그동안 <20세기 건축의 모험>, <이남규> 화집, <이응노의 집, 이야기>, <박수근 100장면> 등, 보통 미술이나 건축 계통 작업을 많이 해왔다.

심세중 : 그 계통의 사람들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아귀를 맞추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걸 더 잘 받아주기 때문인 것 같다. 감각적으로 자신의 책이 달랐으면 하는 욕구가 있으니까 우리랑 더 잘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미술, 건축 분야 아니면 안 한다 그런 것은 없다.



<문학동네 시인선>(사진제공 : 수류산방)


Q <문학동네 시인선>은 10호까지는 책을 가로로 눕혀 위로 넘겨 읽는 파격적 형태로 디자인을 해 화제가 됐는데, 그 후로는 시인마다 단색을 배치하는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시를 직접 읽고 연상되는 색깔을 배치한 건가?

박상일 : 시에 너무 깊게 빠지면 오리무중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 처음에는 핸드폰으로 넘기다가 몇몇 시들을 주의 깊게 읽었고, 다음에는 한편씩 주의 깊게 봤다. 한 가지에 꽂혀 이미지가 너무 단정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자유롭게 연상하려 했다.


예술사 구술 총서 <예술인‧生>(사진제공 : 수류산방)


Q 예술사 구술 총서 <예술인‧生> 작업은 2011년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심세중 : 예술자료원 측에서 처음에 원한 건 가벼운 옛날이야기 정도의 콘셉트였다. 한 사람의 생애와 그 시절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추후에 그림으로 그리면 만화가 되는 콘텐츠를 원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구술의 아카이브적 성격을 살려 원문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게 공공기관이 할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학술서 같은 형식을 제안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우리 제안을 우수하다고 평가해 주었다.

박상일 : 예술자료원에서 채록 사업을 2003년부터 해왔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쌓여 있었다. 초창기에 한 건 좀 허술했다. 보통 사업이 종료되면 내용을 더 이상 다듬지 않고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였다.

심세중 : 조판, 인쇄비 밖에 안 되는 금액에 모든 공정을 다 해냈다. 박완서 편 작업 땐 박완서 선생님의 단편, 장편, 산문집까지 전작을 다 읽었다. 그렇게 처음 3권이 어렵게 나오고 나서 자료원은 인기폭발이었다. 그 책을 보고 다른 원로들이 본인도 구술사업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 해왔기 때문이다. 그때 책을 낸 예술인 중 좋은 관계가 돼서 다른 일들을 하거나 자신들이 가진 책을 우리에게 다 주겠다고 한 분도 계셨다.


Q 최근 세 권으로 ’박수근과 미술관 총서’(<새로 보는 박수근-박수근 100장면>, <박수근 파빌리온>, <양구, 박수근과 미술관>)가 나왔다.

박상일 : 책을 만들면서 박수근 선생의 모든 평전과 자료들을 거의 다 읽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오류도 바로 잡았다. 박수근 선생님이 PX건물 앞에서 찍었다고 전해지는 사진에서 어느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사진 속 건물이 과거 PX였던 지금 신세계 건물과 계단이나 기둥 모양이 다른 거다. 결국 그 사진은 과거 PX 앞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고 밝혀졌다. 박수근 선생은 매해 선전에 입상한 작품을 들고 동일한 구도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던 거다.

Q 수류산방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아무도 모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심세중 : 디자인연구자 박해천 씨가 한 매체에 쓴 박완서 선생 구술사 책 서평에서 우릴 덕후 출판사라고 칭할 정도로, 그 책 할 때 박완서에 관해서는 다 읽었다. 그래서 <박수근과 미술관 총서>를 하면서 박완서랑 좀 연결을 해서 볼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을 했었는데. 박완서가 묘사한 박수근 PX생활과, 박수근 연구자들의 기록이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바로 잡은 것들이 있었다. 최소한 우리가 다루는 책에서는 한 가지라도 억울함을 풀어서 다음 책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류산방 책이 예술이라는 건 부분적인 접근이다. 형식 하나에 내용이 담긴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일뿐 장식적인 것은 아니다.

수류산방을 돕는 낭창낭창 펀딩

Q 수류산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낭창낭창 펀딩’이란 모임이 있다고 들었다.

박상일 :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분들-조성룡(건축가), 김인환(문학평론가), 황현산(문학평론가), 조성택(고려대 교수), 조애리(카이스트 교수), 이형대(고려대 교수), 최은진(아리랑), 이선(한국전통문화대 교수), 한재영(한신대 교수), 박찬일(쉐프), 이한구(사진가), 이원(시인), 김용한(디자이너), 함돈균(문학평론가), 김민정(시인)-의 모임이다. 상징적인 거다. 용기를 주는 의미에서 돈을 모아 주셨고, 이 돈을 어디에 쓸까 하다가 <세상에 이런 책!>을 만드는 데 썼다. 가급적이면 일 년에 분기별로 보자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계속해서 다양한 일을 도모할 예정이다.

Q 마지막으로 계획을 말해 준다면?

심상중 : 수류산방에서 디자이너를 구하고 있다.(웃음)

박상일 :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책과 조성룡 선생님 책을 모아서 도서관을 열어 동네 주민 모두가 자유롭게 와서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그곳에서 다른 관점으로 사회를 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을 것 같다.

<월간 건축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월마다 나오는 잡지단행본도 준비 중이다. 3년 동안 숫자를 거꾸로 매겨서 첫 호가 33호고. 끝나는 호가 00호다. 제목은 건축과 민주주의지만 건축이나 도시에 대해 만들어질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을 다룰 예정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단지 조금 별난 출판사의 매커니즘을 접한 게 아니라, 세상과 대면하는 중요한 태도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세상과 접하는 자세, 책을 만들면서 흘린 땀 방울이 고스란히 그리드 속에, 활자의 배치 속에, 어떤 종이를 쓰는지에 녹아 있을 것이다. 이들의 고집이 만들어 낸, 그리고 만들어 낼 결과물들에 시선이 가는 이유다.

※ 수류산방은 제4회 파주북어워드 출판미술상을 수상했다. 동아시아 4개국 대상으로 하는 아시아출판문화상에서 수류산방은 출판미술부문 첫 번째 한국 수상자로 선정됐다.


북DB 2015. 8. 19

http://news.bookdb.co.kr/bdb/starCast.do?_method=detail&sc.page=1&sc.row=10&sc.webzNo=23899&sc.orderTp=1&listPage=&listRow=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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