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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May 27. 2021

철학자 이동용 “삼포세대, 누구 탓도 해선 안 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는 오늘도 행복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스타일리시하고 예쁜 얼굴로 찍은 셀카, 맛있는 음식, 호화로운 여행지 사진들, 글과 사진 밑에 달리는 많은 수의 댓글과 ‘좋아요’의 행렬. 하지만 사실 그 반대편엔 보기 싫고 피하고만 싶은 현실이 존재한다. 어쩌면 오히려 그 과장된 행복은 아픔과 상처, 고통을 꼭꼭 숨기기 위한 위장술일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남의 전시된 ‘행복’과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 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아프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런 의문을 가져본 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지금껏 우리에게 부정적인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통으로 가득 찬 우리의 실제 삶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 절망적인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한 것이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이다.

철학자 이동용은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한 책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를 냈다. 지난해 출간되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다룬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의 후속작이다. 이 책은 삶은 고통이고 그것이 바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화려하고 사탕발림 같은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단 나의 내면에 집중하라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Q 쇼펜하우어를 읽는다고 하니 염세주의를 떠올리고 “너 우울하니?” 하며 친구가 지레 겁먹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대체 어떤 인물이고 염세주의 철학은 무엇인가요?

쇼펜하우어는 독일에 불교를 유입시킨 철학자라 할 수 있어요. 쇼펜하우어 철학은 불교 철학과 밀접합니다. 그의 염세주의 철학은 견뎌내면 해탈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죠. 견뎌내면 깨달음이 온다는 거예요. 낙천적인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헤겔 같은 철학자의 방식이 도움되지만 “내일은 더 나빠질 것 같다”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낙천주의 철학을 내밀어도 위로가 안 돼요. 이럴 경우에 오히려 염세주의 철학을 손대는 게 낫죠.

Q 그래서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오히려 염세주의 철학이 도움되는 것이군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다 보면 느낄 수 있는 게 ‘중력의 문제’예요. 삶의 짐을 지고 가는 게 우리 인생인데 중력이 있기에 김연아 같은 선수는 점프하고, 자기표현을 하고. 완벽한 자세에 도전할 수도 있죠. 그걸 해낼 때 느끼는 건 이성을 가진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쾌감일 것이고요. 책을 왜 읽어요? 이해가 안 되면 고통이잖아요. 그런데도 책을 읽는 이유는 이해가 되면 엄청나게 성취욕도 느낄 수 있고 즐겁고. 이렇게 중력을 극복하면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이 어렵지만 회피하지 말고 즐길 힘을 키우라는 거예요.

Q 하지만 모든 고통이 다 의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회피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맞부딪히는 자발적 고통은 나를 강화하고, “나 하기 싫어. 내가 왜 이걸 해야 해” 회피하면 그야말로 고통이 되는 거죠. 다만 자발적 고통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 연민이에요. “내가 왜 아플까?”, “나는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하는 식의 연민이죠.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고요. 

Q 자발적으로 부딪히는 고통이 가장 중요하단 거군요.

르네상스인 단테가 쓴 <신곡>에서 첫 번째 여행지가 지옥이잖아요. 그리고 지옥에서 연옥으로 또 천국으로. ‘지옥’, 즉 고통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중심이 된 르네상스적인 발상이에요. 중세 때는 생각한다고 하면 무조건 천당이나 영생. 영원히 살 것이라는 낙천적인 생각만을 했는데, 르네상스적 발상으로는 이 세상이 지옥 같아도 그걸 감당하면 힘이 생기고 정신력이 생긴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물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수영선수가 되고, 이 세상이 지옥 같고 힘들다면 그걸 감당해버리면 되는데 그걸 회피하려 하니까 힘들어지는 거예요. 

Q 결국 인간적인 것과 고통을 연결 짓는 발상이 르네상스 기부터 쇼펜하우어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네요.

‘지극히 인간적인 삶’이란 다시 말해 ‘지극히 고통스러운 삶’이라 할 수 있죠. 결국, 인생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거예요.




Q 고통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화제와 동시에 비판도 받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비슷한 논리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요?

고통의 대가를 재산이나 명예, 부와 같은 외부에서 기대하면 안 돼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외부의 것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게 하고, 나를 찾아가는 길을 찾게 하고, 나를 찾았으면 그 지점에서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이거든요. 그때 비로소 나의 주체적인 삶이 시작되는 거고요. 예를 들어 지하철 성형외과 광고를 보면 ‘비포앤애프터’ 사진이 붙어있고 수술 후 ‘애프터’가 정답인 것처럼, 사진 속 모습처럼 바뀌어야 할 것처럼 광고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외부에서 나온 정답일 뿐이에요. 내 안에서 나온 정답을 찾아야 해요. 그건 아무나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해야 해요. 철학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아니라 길을 제시하는 거고. 그 길을 선택하느냐 마느냐는 자기 책임인 거예요.

Q 외부로부터 성과와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 나에서 시작해서 나에서 끝나는 거네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아프니까 인간인 거예요.

Q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에서 보면 쇼펜하우어가 건강, 가난, 독서, 성욕 등 매우 실질적인 삶의 요소들에 관해 얘기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철학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철학의 ‘이성’이 지닌 대표적 능력이 바로 ‘언어’인데, 보통 말로 진리를 보여주려 하고, 말로 구원을 하고 위로하려 하죠. 쇼펜하우어는 말로 하는 위로보단 본질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정말로 구원을 해야 한다고 말해요. 남의 말에 의해서 내가 간접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고통을 직면하고 지옥과 같은 삶에 직면하다 보면 스스로가 구원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고,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Q 저성장시대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청년들은 386세대의 자녀들인데, 386세대는 데모해도 사회가 안 바뀐다는 걸 경험한 집단이에요.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식은 사회를 바꾸려 하지 말고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교육을 했죠. 그 결과 이제는 청년세대가 스스로 성공하지 않으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하지만 누구의 탓도 해서는 안 돼요. 윗세대야 그런 교육을 했지만 따라온 건 청년세대 본인 책임이에요. 엄마가 사준 동화전집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책방을 찾아가서 어려운 책을 찾아가면서 자기가 읽고 싶은 걸 찾아가며 성숙해질 시간을 보냈더라면 지금의 모습은 달라졌을 거예요.





Q 그럼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현대 우리나라만이 가진 독특한 고통인데 이 고통을 깨는 방법은 하늘만 보는 낭만주의를 깨고 정치가 제시하는 비전들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 인생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사람을 속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논리로 설득하는 건데, 그 논리에 설득당하면 안돼요.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가 중요하죠.

Q 독일의 대학에서 릴케를 공부하고, 그 후 한국에서 니체, 바그너, 쇼펜하우어에 관련된 연구와 강의를 지속해 오셨는데,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지금 니체 전집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결과물들을 책으로 출판하고 싶고, 또 <바그너의 혁명과 사랑>이란 책을 냈는데, 이 책은 바그너 책 10권 중에 절반 정도만을 다루고 있어요. 아직 다루지 못한 나머지 연구를 마쳐서 책으로 낼 계획이에요. 그게 완성이 되면 내가 박사학위 논문 쓰면서 공부한 릴케에 관한 책을 서너 권 더 내고 싶어요.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죽음의 시기를 고려할 때 우리 아버지 인생을 기준으로 하면 차후 20년 정도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인데, 그 시간 배분을 잘해야 할 것 같아요. 나만의 호흡을 잃고 보폭을 놓치면 마라톤을 끝까지 할 수 없듯이 집필 계획을 잘 짜야 목표를 이룰 수 있어요. 줄 타는 광대처럼 일회적이고 반복할 수 없는 인생이니까요.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 북DB 2015.7.1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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