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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May 27. 2021

이어령이 말하는 아시아 문화의 열쇠는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문명론> 출간 이어령 인터뷰


이어령은 대한민국 문화사의 주요 장면마다 있었다.

스물 둘의 젊은 나이에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써서 문단 권력을 정면에서 신랄하게 비판했고, 시인 김수영과 ‘불온시’ 논쟁이 맞붙어 몇 차례 격렬한 글 사위가 오고 간 것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스물 여섯 살에 신문사 논설위원 자리에 올라 국내 주요 일간지를 거쳤고, 1972년 <문학사상> 월간지를 만들었다. 88올림픽 개막식 행사를 주관해 텅 빈 운동장에 굴렁쇠 소년을 등장시켜 ‘정적’만으로 술렁거림을 만들 수 있단 걸 보여줬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으며 2000년대를 맞아 새천년준비위원장이 돼 전 세계에 즈믄둥이가 탄생하는 장면을 전세계에 생중계하는 이벤트를 기획한다. ‘디지로그 선언’,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은 유명한 그의 작품이다. 그가 없었다면 뼈도 살도 앙상했을 우리나라 문화사가 눈앞에 선하다. 최근에는 딸을 잃은 후 기독교로 귀의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던 그다.

이어령을 <가위바위보 문명론> 출간일인 8월 19일에 만났다. 인터뷰 장소는 평창동에 자리잡은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벽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연구소에 기자가 도착하자 이어령 선생이 나타났다. 백발의 모습이었지만 정정했다. 그의 사상(思想)만으로 짐작했던 존재감이 워낙 커서였을까? 지면이나 TV를 통해 보고 짐작한 것보다는 작은 체구라 느껴졌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동서고금, 철학, 예술, 정치를 자유자재로 횡단하는 그의 담론이 펼쳐졌다.







<가위바위보 문명론>은 이어령이 국제 일본문화연구센터의 초청을 받아 일본 교토에 머무르며 일 년간 직접 일본어로 쓴 책이다. 2005년 4월 일본의 유명 출판사 신조사에서 《ジャンケン文明論》라는 제목으로 발간됐고, 마로니에 출판사에서 십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출간된 한일 합본판은 번역가 허숙이 우리말로 옮겼다. 한 책이 지닌 이력으로선 상당히 특이한 셈. 마침 책 출간 시기가 8.15 전후라 그것에 대한 질문부터 던져 보았다.

Q <가위바위보 문명론> 한국어판이 드디어 출간됐습니다. 얼마 전이 8.15였는데, ‘광복’ 70주년에 의미를 두고 책 출간 날짜를 맞추신 건가요?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70년 전 해방되던 그날이 돼서야 한국어 글쓰기를 배우고 한국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이에요.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운 한국어, 한국 이름, 우리 문자까지 일본 식민통치 때문에 빼앗긴 채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잠꼬대도 일본말로 할 정도로 훈련을 받았죠. 그런 사람이 그때 배운 일본어로 일본에서 책을 내고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매년 일본에서는 그 책에서 국어시험문제가 나오고 있어요. 그것 참 극적이지 않아요? 출판사에서 출간 날짜를 정하긴 하지만, 참 감개무량하네요.



Q 책 서문에 ‘내가 일본말로 쓴 <가위바위보 문명론>을 나 자신이 번역한다면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경우가 된다.’라고 쓰셨습니다. 그 결과 본인이 일본어로 쓴 문명론 책이 번역돼 지금에야 한·일 합본판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이 있는데요. 한국어로 책이 나오기까지 10년이나 걸린 이유가 있습니까?



이게 번역 안 되거든요. 전문 용어가 좀 많아요? 도끼찌껭이니. 기스네껭이니 쇼야니. 도저히 문화가 달라서 그런 용어들을 우리말로 번역을 못 해요. 그래서 원래는 우리 식으로 새로 쓸려고 한 거죠. 일본 거 어느 정도 빼고 한국사람 알아듣게요. 그런데 내가 늙어서 80이 되니까 이 책이 죽을 때까지 못 나올 것 같았어요. 내가 이걸 바꿔 쓰려면 언제 다시 쓰겠어요? 그래서 한국어 번역본에 일본어 원본을 붙여서 내기로 했어요. 원본을 붙이면 증거가 나오니까.



Q 일본 문화기관의 초청으로 지원을 받아 쓰신 책입니다.



국내에 있으면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전화 강연 각종 회의 그리고 사람 만나는 일로 지긋이 책 한 권을 기획하여 출간하기 힘듭니다. 또 국내에서는 한번도 연구비나 지원을 받는 기회도 없었고요.



그러나 일본에 가 있으면 24시간 모두를 집필에만 몰두 할 수 있지요. 찾아오는 사람도 회의 하자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나의 아시아 문명론은 세 권 가량되는데 모두 일본 국제교류기금이나 연구소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모두 다 상을 탔지요. 일본 비판한 건데–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인에게도 약이 되리라 믿습니다. 순수한 학문적 입장에서 쓴 글들이니까요.







가위바위보는 신조차 이길 수 없다

책 제목처럼 어린아이들의 단순한 놀이인 가위바위보로부터 그의 문명론이 시작되고 끝난다. 이어령은 이 책에서 세 가지 층위 - ‘손의 이야기’, ‘공작의 이야기’, ‘아시아 삼국의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끌어내고자 했다.

Q 서양의 동전 던지기 문화와 아시아의 가위바위보를 비교하면서 서양과 아시아의 차이점을 설명하셨습니다.

기존 문명론. 특히 서양의 동전 던지기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잖아요. 그런데 가위바위보는 내가 주먹을 냈을 때 상대방이 보자기를 내면 내가 지는 거고, 가위를 내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서로 상대방이 무엇을 내놓느냐의 상호성에 의해서 승부가 결정돼요. 문화론으로 보면 저쪽은 운명결정론, 즉 이거 아니면 저거. 그러니까 서부 활극 같은데 보면 결투할 때나, 축구 시합할 때 누가 먼저 공격할지를 결정할 때도 동전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가위바위보로 하죠.

한중일이 언어도 문화도 달라도 중국은 “차이 차이 차이”, 일본은 “짱 켄 폰”, 우리는 “가위 바위 보”라 하잖아요. 핵 가지고 싸우고, 항공모함으로 싸우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통하는 건 이거란 말이에요. 약자도 여자도 남자도, 어른도 애도 가위바위보 앞에서는 평등해요. 컴퓨터, 로봇도 못 이겨요. 심지어 전체 인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하나님도 못 이겨요. 상대가 무엇을 낼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 놀라운 사실은 ‘윤관’이라고 하는 도교 사상에서 시작해요. ‘뱀은 두꺼비를 잡아먹고, 두꺼비는 지네를 잡아먹고. 지네는 뱀을 이긴다’고 하는 옛날 사상이 있거든요. 그렇게 돌고 도는 거지. 금은동의 피라미드 계층이 아니지요.

Q 어린 시절 즐기던 가위바위보라는 놀이문화가 각국의 역사, 문화, 정치까지 폭넓게 해석하는 열쇠가 된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원래 애들 속에 미래가 있는 거예요. 아이들의 본능 속에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질서나 과학 이론들이 있다고 하잖아요. 아기들이 언제 나올 줄을 알아서 어머니 뱃속에서 아홉 달 후 날짜 맞춰 나오나요? 엄마 뱃속엔 달력도 없고 학원 선생도 없는데 놀라운 거죠. 그 안에 우주가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다 우주의 미션이고, 천사들이에요. 36억 년 동안 진행된 생명의 신비를 1분 동안만 생각해 보세요. 100년 전에 없었고, 100년 후에도 없을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보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걸 전부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우주로부터 받은 미션이 있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 걸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이게 내가 말한 생명자본이지.

Q 21세기에 가위바위보 문명론이 특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지금까지 유효했던 합리적 이항 대립으로는 이제는 문제가 안 풀리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과학으로 수학으로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거죠. 슈퍼 컴퓨터가 있고, 어마어마한 연구소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리먼 브러더스 같은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하느냐는 거예요. 리먼 브러더스는 100년도 넘은, 유대인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인데 말이죠.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상은 선 아니면 악, 왼손 아니면 오른손, 밤과 낮 같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이 있는 아침이 있고, 저녁 속에 빛이 있는 저녁노을인 거예요. 서양은 플라톤 때부터 형이상학-형이하학, 관념-육체의 이분법으로 사고 시스템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음식을 먹어도, 짬뽕도 아니고 짜장면도 아닌 짬짜면을 먹어요. 국물이 없는 스파게티가 한국에 들어오면 뚝배기 파스타가 돼요. 이렇듯 한국문화는 양극화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중간언어가 있어요. 즉, 주먹, 다 쥐었죠? 보자기, 다 폈죠? 주먹과 보만 있으면 이기는 놈은 맨날 이기고, 지는 놈은 맨날 지는데 중간에 반은 피고 반은 접은 가위가 있으니까 돌고 도는 순환이 생기는 거예요.







“갈등의 서구 넘어, 아시아가 새 스타일 제시해야”

도중 말을 끊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그의 대답은 지속될 경우가 많았다. 인터뷰는 가위바위보의 철학적 사유로부터 조금 더 현실적인 면으로 흘러갔다.

Q 아시아에서 관계론이 통하는 이유, 상대적으로 아시아가 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이 상황에서 아시아인들의 한계와 과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한국은 이 정도의 고도산업주의에 돌입해서도 사람들끼리 서로 ‘정’도 있고, 보증서 없이 남에게 돈도 꾸고, 계도 들고. 모든 걸 법으로 하는 사회에서도 인간적인 숨을 쉴 수 있잖아요. 이것 역시 아시아적 특성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는 거의 바닥이 났는데 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뜨는 거죠. 그렇다고 아시아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올림픽만 해도 제일 먼저 일본이 아테네에서 한 걸 받아들이고, 그걸 한국이 하고, 중국이 했잖아요. 우리는 서양문명의 찌꺼기를 받아들인 거예요. 청출어람이라고, 남빛은 청에서 나왔지만, 더 푸른 것처럼 이제는 서양이 못 하는 걸 우리가 해야 해요. 지금까지는 서양사람 뒤통수만 보고 뛰면 됐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란 말이에요. 서양인들이 낭떠러지에 있는데 같이 떨어져 죽을 거예요?

이제 강남 스타일이 아니라 인류 문명 스타일이 문제인 거예요. 인류 문명 스타일에서 우리의 춤을 만들어야 해요. 온 인류의 방향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아시아 사람이 줘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서양의 썩은 동아줄 쥐다가 함께 떨어져 죽는 길밖에 없어요. 그 동안 그들이 만든 기계문명, 근대문명으로 보릿고개도 넘기고 재미를 톡톡히 봤잖아요. 좋은 점도 받아들였지만, 부작용도 또한 받아왔어요. 서양은 모든 분야에서 싸우면서 갈등 구조로 발전하는 문화거든요. 우리는 모든 걸 화하면서 하는 나라인데, 갈등 구조로 가니까 한국 사회가 전부 찢어진 거예요.

지금 한국사회엔 주먹 보자기, 갑을 밖엔 없어요. 이런 국면에 주먹이 절대 패자가 아니고, 보자기가 절대 승자가 아닌 서로 고루고루 맞물려서 돌아가는 순환적 평등성이 필요하다는 거죠. 

Q 그렇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론에서 관계론으로 가는 것이 발전하는 방향일까요?

아니지.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게 서양 사관이에요. 우리는 순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전론이나 성장론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서양처럼 돼요. 우리가 지금 성장론 얘기하는데. 언제까지 성장해서 매년 몇 퍼센트씩 올라간다는 신화 속에서 이렇게 고단하잖아요. 옛날에는 성장이란 게 없었어요. 성장을 꼭 해야 해요? 행복하게 살면 되지. 그런 서양적 발전사관 때문에 결국 자연이 거덜나고, 기후는 이렇게 망가지고, 인륜도덕은 땅에 떨어지게 된 거잖아요. 우리나라만 해도 아들이 아비를 고발해 서로 법정에서 만나고, 가정은 해체되고, 그게 우리가 지난 100년 동안 서구를 좇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니에요?

Q 요즘 사람들이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들 얘기하는데요. 위기의식도 많이 엿보이고요. 선생님은 지금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그건 언제나 그랬어요. 우리만 어려운 걸까요? 사람 사는 데 다 어려움이 있는 것이고,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다 우리 마음에 있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우리 미래가 있어요. 세월호는 액시던트로 국내문제로 끝났지만, 후쿠시마의 원전, 톈진 항 사고는 그 독극물이 어디로 가서 누가 죽을지 몰라요.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고 슬기롭게 넘어가고 극복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옛날 독재시대에는 단 한 사람에게 사회의 운명이 달려 있었지만. 이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어요. 이제는 남의 탓 못 해요. 역설적으로 일제시대에 산 사람들은 행복했어요. 모든 걸 일본 놈 탓으로 돌리니 변명의 여지가 있잖아요. 내가 못났어도 일본 놈들이 이랬기 때문이라고 욕할 대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해방이 되면 한국인이 하는 일은 전부 한국인 책임이에요. 자꾸 미래가 어떻고, 누구 책임인지를 말하는 한 미래는 없어요. 바로 내가 주체자가 되어서 미래를, 내 운명을 바꾸는 거지 남이 운명을 바꿔줄 순 없어요. 수정구슬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어떤 사람도 미래 예측 못 해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지요. 

Q 트위터에 이어령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다고 예고를 했더니 예의바른 악당(@Bawerk)님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주셨습니다.

“아베가 식민지배와 종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를 얼버무렸음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기존 담화를 인정하고 아쉽다고만 의견표명을 했고, 중국 전승절에도 참석해야 할 처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위가 아닌, 중국 일본의 경쟁 관계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런 처지인 것은 아닐까요? 말씀하신 중국과 일본의 조정자 같은 지위에 있으려면 영예로운 고립을 택했던 영국 정도의 국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조정자는 꼭 힘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지요? 예를 들어 중국이 항공모함 건조에 성공을 하고 금년에는 일본이 이즈모라는 거함을 진수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군비 경쟁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조선 시대 왜군의 침공에 맞서10만 양병설을 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적이 침공하기 전에 경제가 무너졌겠지요. 조선조의 정책은 문승지효 즉 무력을 문화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었는데 사실상 그것으로 조선조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500년 왕조를 지탱해 왔거든요 무력으로 강했던 몽골 만주족 다 어떻게 되었나요. 중국을 제패하고서도 결과는 구가나 종족 자체가 궤멸된 상태지요. 문승지효의 철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50여개의 소수민족이 살아요. 그 중에 아직도 조국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조선족 정도지요. 오히려 자크 아탈리 같은 미래 학자는 한국이 강대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기 때문에 어부지리를 볼 수 도 있다고 했어요. 만약 아시아 공동체가 생긴다고 할 때 그 본부를 베이징에 둔다고 하면 일본이 반대할 것이고 도쿄에 둔다고 하면 중국이 반대 할 겁니다. 하지만 서울로 하자고 하면 동의 할 거라는 것이지요. 군사적으로 약하니까 오히려 위협과 경계대상에서 벗어나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의지만 있다면요. 실제로  EU의 본부는 파리도 베를린도 아닌 벨기에에 있잖아요.

내가 말한 조정자란 거 딴 게 아니에요. 우리 국력이 일본을 위협하고, 중국을 위협해도 우리가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중국이 나쁜 짓 하면 일본과 손잡고 견제하고 일본이 나쁜 짓 하면 중국과 손잡아서 견제하여 평화의 캐스팅 보트를 우리가 쥘 수 있다는 거죠. 더군다나 미국과의 관계도 있어요. 미국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영토 야심 없어요. 앞으로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팍스 아메리카로 해양세력이 옮겨오면서 하와이 일본으로 그리고 한반도까지 시 파워가 형성되었지만 몇 년 사이에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의 변화와 함께 랜드 파워가 급부상하고 있어요. 한국은 해양도 대륙도 아닌 반도잖아요. 강력한 반도 파워가 생기면 해양-대륙의 관계는 대결에서 공존으로 상생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분단된 반도가 대륙과 해양의 각축전이 된다면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전체에 불행한 종말극이 벌어지게 돼요.




이어령은 팔순을 넘겼다. 인터뷰 첫 질문에 그의 대답처럼, 식민지 현실에서 태어나 조금씩 대한민국 문화의 뼈대를 만들고, 또 지배국의 언어인 일본어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까지 만든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증언이다. 인생의 저녁에서, 그는 지난날을 어떻게 반추하고 있을까? 또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Q 선생님의 인생은 우리나라 문화계의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겹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문사 논설위원, <문학사상> 주간,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이화여대 교수, 시인 등 다양한 일을 하셨는데요.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항상 말해 온 것처럼 나는 우물을 파는 사람이지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면 얼른 다른 일을 시작해요. 지적 호기심이 그 성과보다 강하기 떄문입니다. 제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영혼을 걸고 일할 수 있는 거지요. 시켜서 하는 일은 아무리 성과가 있어도 재미 없잖아요. 88 올림픽 개막식 준비도 내가 좋아서 했으니까 새벽 3시까지 회합을 했죠. 돈 얼마라도 보수를 받고 한 일이 아니에요. 물론 새천년 준비위원장도 무보수예요 내가 지금 동아시아문화도시 청주 명예위원장인데 그것도 돈 안 받고 하고 있어요. 물론 보수를 주려고 하지만 내가 사양해요. 돈 받고 일하는 것은 구속이라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요. 내가 좋아서 벌인 일이라면 오히려 내가 돈을 줘야지요. 창조의 보상은 돈이 아니라 즐거움이거든요. 

Q 1967년 ‘조선일보’에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라는 글을 실으면서 김수영 시인과 ‘불온시’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그 때 일을 어떻게 반추하시나요?

난 4.19전에 저항의 문학으로 이승만 독재와 싸웠던 사람이에요. 최인훈의 <광장>도 내가 ‘새벽’에 있었을 때 게재한 거지요. 그런데 막상 4.19가 벌어지고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니까 갑자기 참여문학자가 되어 이승만 사진을 찢어 밑씻개를 하라는 과격한 시를 쓰더군요. 그러면서  ‘불온시가 책상 서랍에 있는데 이 시가 발표되는 날 한국의 문학은 시작되는 것’이라고 해요.. 그때 내 주장은 이런 것이었어요. “서랍에 든 불온시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탄압을 받으며 그것이 발표될 때 비로소 참여문학이 되는 것이다”, “그 불온시가 발표되는 시대가 오면 시인은 이번에는 다른 불온시를 준비해야 하는 거다” 이것이 불온시 논쟁의 핵심인데 사람들은 내가 김수영 시를 불온시라고 공격한 것으로 왜곡되어 있어요. 이 논쟁은 이제 명백한 결말이 난 것이라 더 이상 거론할 게 못되지요. 왜냐하면 정말 불온시가 발표되는 날 비로소 진정한 문학이 나온다고 했는데 어디 지금 탄압받아 발표 못하는 시 있어요? 문학은 요순 때라고 해도 영원히 불온시로 맞서는 것이지요. 네트없이 테니스 칠 수 없는 것처럼 항상 문학은 그 억압의 장벽 안에서 게임을 하는 거죠. 테니스에 네트를 이용한 여러 기술이 생기는 것처럼 문학의 레토릭이 생기는 것이지요.

Q 집단주의를 비판해 오셨습니다.

현대인은 외로운 걸 못 참아요.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하고 문자를 쏘고 댓글 달고 채팅해요. “외로움 없는 곳에서는 명작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 한 것은 피카소였어요. 정치 경제는 그렇다 쳐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패거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지극이 개인적인 것이고 밀실에서 산출되는 가장 원시적 생산품이니까요. 문학생산을 하는데 노조가 필요합니까? 작업은 혼자서 완성하는 거잖아요. 나의 경우 이미 작품으로도 썼지만, 여섯 살 때 여름 대낮 속에서 굴렁쇠를 굴리다가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어요. 평생 그 때의 이유 없는 눈물을 잊을 수 없었지요. 당시 우리 집 괜찮게 살고 친구도 있고 형제들 많은데 왜 나는 대낮에 굴렁쇠 굴리다 말고 울었을까? 그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면 내가 기획했던 88올림픽 개막식 때 떠들썩하다가 갑작스레 조용해지면서 어린애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지나는 장면으로 이어져요. 어린 시절 메멘토 모리의 경험이 없었으면 못했죠. 일본이 어떻게 이걸 뺏어가겠어요? 집단은 뺏어갈 수 있어요.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은 못 뺏어가요. 절대로.

Q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내가 더는 컴퓨터도 할 수 없게 되고, 눈도 어두워지면 구술을 하겠죠. 내 마지막 계획은 ‘마지막 수업’을 해서 책으로 내는 거예요. 그게 몇 권이 될지 모르지만. 병들고 더 이상 못 쓰면 ‘마지막 수업’ 책을 낼 거예요. 숨 넘어갈 때 나오는 책이 마지막 수업이 될 거예요. 이번에 KBS에서 8월 말부터 ‘이어령의 100년 서재’ 방송 나가지요. 그걸 하는 이유도 글쓰기가 어려우니까 말이라도 해서 메시지를 전하려고 시작한 거예요. 까뮈가 한 말 아시잖아요.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다.”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 시인은 한 걸음 더 나가요. 그 절망을 글로 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 북DB 2015.8.3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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