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 저자 요시카와 나기 인터뷰
(사진제공 : 도서출판 비채)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1920년대, 신기술이 발명되고 인간 이성으로 이룩한 문명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 기대했지만, 결국 그 기술이 제1차 세계 대전 때 무참히 인간을 살육하는데 쓰인다. 그 광경을 목격한 예술인과 지식인들은 절망했다.
이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최초로 등장한 ‘다다’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자 한 문학과 미술의 한 사조였다. 지금까지 유럽에만 존재했다고 알았던 ‘다다’가 당시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있었던 일본과 한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에 주목한 일본의 번역가가 있으니 바로 요시카와 나기(吉川 凪)다. 그녀가 직접 한국어로 쓴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는 조선의 다다이스트였던 고한용을 중심으로 해서 당대 양국의 예술가들에 주목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잠시 우리는 1920년대 경성과 동경의 거리를 걷는 기분에 빠져든다. 정치적 혼란기였지만 ‘다다’라는 예술을 통해 자유로움을 꿈꿨던 조선의 고한용, 일본의 쓰지 준, 다카하시 신키치를 직접 마주대하는 듯한 느낌에 젖는다. 이런 경험을 선사한 <동경의 다다, 경성의 다다>를 쓴 일본의 작가 요시카와 나기를 서면 인터뷰를 통해 만났다. 한-일 언어로 활발히 저술/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그녀가 처음 한국에 온 사연, 식민지 지배-피지배 관계 하에 있었던 경성과 동경의 예술가들에게 ‘다다’의 의미 등을 밝혀 주었다.
한국 근대시를 전공한 이유
Q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는 책 내용뿐 아니라 작가님이 한국에 와서 이 책을 쓰기까지의 사연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신문사에 근무하다가 한국에 오셨는데요. 한국에 온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만둔 후에 할 것을 고민하다가 외국어라도 하나 제대로 배워볼까 해서 연세대 어학당에서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을 택한 이유는 먼저, 당시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한일 간의 교류가 많아지면 한국어 실력을 살려서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워서 심리적으로 편했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문학을 포함해서 한국 문화에도 얼마간의 관심은 있었지만 잘 몰랐어요. 어학당에 들어가기 전에도 한국어를 조금 공부한 경험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한국어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Q 한국 문학과 인연을 맺어서, 97년에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문학까지 전공하셨는데요. 큰 결심이셨을 것 같아요.
어학당을 졸업하고 일단 귀국했는데 1년쯤 더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모 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연구생 생활을 1년 했어요. 당시 무엇을 전공하는지는 큰 상관이 없었고, 좀 쉬워보였던 신방과를 택했죠. 그런데,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영어로 된 논문을 보고 미국에서 나온 이론만을 배우고,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는 게 없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한국문학이나 공부해 볼까 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강좌에 다니기 시작했고 거기서 시인 신경림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곳에서 시를 쓰고 배우는 게 재미있었어요.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에 들어가게 된 것도 신경림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거예요. 예전에 일본근대시를 공부한 적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근대시를 전공하기로 했어요.
다다, 고정관념 파괴하고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Q 이 책을 보고 나서야 한국에도 ‘다다’ 예술운동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인하대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정지용 시 연구’였는데, 어떻게 다다로 관심사가 이어진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국에서는 다다가 예술운동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다이스트를 자칭하는 젊은이들은 좀 있었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다다이스트 다카하시 신키치(高橋新吉)의 시를 좋아했었어요. 신키치하고 교류가 있었던 고한용이라는 청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지요.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고한용에 관한 자료도 조금씩 찾았어요. 고한용은 정지용과 같은 세대라 정지용이 젊었을 때의 상황을 조사하면 고한용에 관한 정보도 나와요.
Q 책에서 1920년대 예술가들의 생활상을 꼼꼼히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자료는 주로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수집하셨나요? 조사에 소요된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부터, 다다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문학을 비교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자료를 조금씩 모았어요. 책을 쓸 때 단편적인 정보의 메모를 모아서 정리하고 또 다시 조사하는 거지요. 그 기간이 15년 쯤이니 조사기간이 길다고 하면 긴 셈인데 대부분은, 그냥, 어쩌다가 자료가 나오면 적어 두는 정도의 조사예요.
Q 책에선 객관적 자료에 열거해서 서술하셨습니다. 작가님 개인적으론 일제 식민지배 시기에, ‘다다’가 당대 경성과 동경의 지식인 혹은 예술가들에게 어떤 의미였다고 평가하시나요?
그들이 자라면서 몸에 익힌 모든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그 속박에서부터 해방시켜 준 것. 그리고 다다끼리 심리적인 국경을 넘게 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 일본판 표지
1920년대, 문학청년 개성 억압한 권력은 조선총독부
Q 모든 것을 부정하고자 한 ‘다다’의 정신은 예술적 가치는 있지만, 식민지 현실을 가리도록 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다다는 모든 권력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당시 문학청년들의 개성을 억압하는 권력 중 가장 큰 것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지배였어요. 그러니 무엇보다 먼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감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민족주의, 공산주의처럼 개인을 억압하는 이념도 싫은 거예요. 그래서 다다 청년들은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직접적인 변혁의 힘을 가지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식민지 현실을 허용한 것은 전혀 아니에요.
Q 책에서 쓰신 바에 따르면 한국의 다다는 1924년에 시작해 1926년에 끝나는 짧은 역사를 가지는데요. 한일 양국의 다다를 이끈 주역 3인방 중 다카하시 신키치는 선불교로 귀의하고, 쓰지 준은 파멸의 길로, 고한용은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 서로 영영 만나지 못했어요. 이런 다다의 최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세요?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다는 모든 권력을 부정하지만, 인간은, 어쨌든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체제에 어느 정도는 순응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다다는 본디 오래 계속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Q 1920년대 동경과 경성의 예술운동에 대해 한일 양국의 독자 반응에 다른 점이 있었나요?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듣는 반응은, “재미있다”, “문인들이 이런 식으로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너무 놀랐다”, “다다이스트들이 멋있어 보인다.” 등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평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Q 책에서 1920년대에 활약한 많은 수의 예술가들이 등장하는데요. 이 시기 가장 매력적이라고 평가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한 사람만 고른다면 역시 쓰지 준(辻潤)이죠. 그대로 가면 멸망한다고 알면서도 자신의 사상에 충실했으니까요. 그 모습은, 말하자면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의 음화(陰畵), 혹은 희화(戱畵)입니다.
Q 지금까지 한국문학 연구와 더불어 <사과에 대한 고집>,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 왔다-신경림-다니카와 슌타로 대시집>,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등의 번역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앞으로 작가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시미즈 지사코(淸水知佐子) 씨와 공동으로 완역할 계획이 있어요. 7년쯤 걸릴 거예요. 또 현대작가나 시인들의 작품도 조금씩 번역하고 싶어요. 연구는 지금 구체적인 계획이 없지만, 뭔가를 쓴다면 학술논문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읽어 주는 글을 쓰고 싶네요. 독자 여러분이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 속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들을 친한 친구처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북DB 2015.6.22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