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터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혜진 Jun 06. 2021

'감성 이야기꾼' 황경신이 책과 음악에 보내는 러브레터

<국경의 도서관> 출간 황경신 인터뷰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 1] 황경신의 말말말


“좋은 책은 마음이든 몸이든 움직이게 하는 것.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게 하는 것이에요.”

“슬픔을 이겨내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거기 깔린 전제는 슬프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슬프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예요.”

“정말 현실 조건 때문에 사랑을 못한다면 그건 연애지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만날 수 없다면, 거래나 계산 같은 건 아닌가 싶은 거죠.”



[프리즘 2] 황경신과 <국경의 도서관>


▷ 황경신 작가는 누구? : 1995년 ‘스트리트 매거진’을 표방하며 청년문화를 대변하는 문화잡지 ‘페이퍼’를 창간해, 2012년까지 편집장으로 잡지 제작을 총괄했다. ‘페이퍼’는 수많은 마니아층을 만들어내며, 단순한 잡지를 넘어 특유의 감성을 공유하는 독자들 사이에 견고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작가 황경신에 대한 팬층도 두텁다. <모두에게 해피엔딩> <초콜릿 우체국> <그림 같은 신화> <생각이 나서>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슬프지만 안녕> 등은 그녀의 감성을 찾는 독자들로부터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 어떤 책을 냈지? : <국경의 도서관>이다. 모두 38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떤 글은 삶에 대한 한 조각의 진실을 담고 있는 동화 혹은 우화 같기도, 어떤 글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감성적인 에세이 같기도 한 느낌이다. 작가 황경신이 그녀가 사랑한 책과 음악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 슈베르트, 베르테르 같은 예술 작품의 주인공들이나 작가들이 이야기 곳곳에서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녀와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이라면 더욱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다.

▷ 지금 왜 황경신 작가를 만났나 : ‘페이퍼’ 편집장 직을 그만둔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아가 90년대 비주류 문화를 이끈 그녀가 지금 다시 불어오는 90년대 문화 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과거 그녀의 글에서 느낀 따뜻한 감성이 그 글을 쓴 사람에게선 어떻게 묻어나는지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 인터뷰 현장 스케치 : ‘어느 좋은 날’이란 이름의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카페에 놓여 있던 나무 테이블이 그녀의 아날로그적 느낌과 몹시 잘 어울렸다. 그녀 글의 느낌과 같이 결코 기성에 편입되지 않는, 영원히 꿈을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수많은 인터뷰를 지휘해본 전직 기자답게 인터뷰 하는 기자를 고려해 편안하고 질서정연하게 답변을 해줬다.





[프리즘 3]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페이퍼’와 황경신을 떼어놓고 말하기란 어려운데요. 잡지 일 그만두신 후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일과가 궁금합니다.

책 내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 읽고, 수영 다니고, 심플하게 살아요. ‘페이퍼’ 안 한다고 하면 뭐하냐고 묻는 분이 있어요. 그래서 책 낸다고 하면 그걸로 먹고살 수 있냐고 물어보세요. 저는 전업작가라는 말이 이상해요. 세상에 전업의사라는 말은 없잖아요. 일단은 제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많은 경제력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니까 "조금 먹고 산다"고 해요. 비싼 거 관심 없으니까 조금 먹고 살아요.(웃음)



Q 1995년 창간한 ‘페이퍼’도 90년대의 아이콘 중 하나였잖아요. 요즘에 ’응답하라’ 드라마가 세 개의 시리즈로 제작되면서 큰 인기인데요.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방송한 ‘토토가’ 특집을 통해 90년대 가요가 다시 유행하기도 했고요. 요새 다시 부는 90년대 문화 열풍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사실 그 드라마를 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복고풍’ 같은 말로 진단은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다 드러난 현상을 보고 진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안에서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전 ’복고’는 잘 모르겠고, 시대에 상관없이 주류, 비주류에 흔들리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결국 자기도 행복해지는 길이라 생각해요.



Q 거의 매년 책을 내시는 부지런한 작가이신 것 같아요.

요새는 다른 일이 없고 글만 쓰니까 하루에 원고지 10매만 써도 1년이면 3천 매가 넘거든요. 거기서 걷어낼 것만 걷어내도, 책이 두 권은 나와요. 그러니까 사실 다작이라고 할 수는 없죠.



Q 이번에 나온 책 얘길 해볼게요. 작가님만의 취향이 명확히 드러나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약간 걱정이 됐어요. 일단 원작을 알아야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거든요.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아무런 재미를 못 느끼는 거죠. 실제 캐릭터가 어떤지 모르니 어떤 얘긴지 모를 수도 있고요.



Q 이런 취향이 언제 완성된 것 같으세요?

취향은 계속 변하는 거라서 아직 완성이 안 됐을걸요? 제가 어릴 때 학교 들어가기 직전 직후에 읽었던 안데르센이나, 집에서 아빠가 항상 틀어놓았던 클래식 음악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오히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린 시절에 누렸던 게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만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 기형도, 성석제 이런 선배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좋다고 한 작가들을 직접 읽으며 영향 받았어요.





Q ’바나나리브즈’에는 "먼저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이 있어요. 비행기나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싫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잠을 자는 것도 싫고, 여행 가방에 넣어 가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이요.”라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이 부분을 읽으며 작가님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밴드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씨가 떠올랐어요. 여행을 무척 동경하지만 실제로는 여행을 하지 못하는 특징이 닮아서요.

이제 여행도 곧잘 해요.(웃음) 이 이야기는 이석원씨랑은 전혀 상관이 없고, 제가 되게 좋아하는 작가인 샐린저의 단편 ’바나나 피쉬의 완벽한 하루’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바나나리브즈’란 말이 떠올랐어요.



Q 이석원씨는 인터뷰 때마다, 황경신 작가님이 쓰신 인터뷰 기사가 본인에게 큰 위로가 됐다고 언급하시더라고요. 당시 작가님에게 이석원이라는 사람, 또 그의 글은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처음 인연을 맺은 게 석원씨 새 앨범이 나왔을 때였어요. 기획사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몇 줄의 글을 써달란 요청을 해왔어요. 그 곡이 ‘가장 보통의 존재’였어요. 곡을 듣는데 처음엔 되게 밍밍한데도 계속 반복해서 듣다 보니까 뭔가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앨범 완성되고 음반을 받아서 전곡을 듣는데 다 좋은 거예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을 인터뷰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엄청 예민하고 까다롭고 기자들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어요.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너무나 여리고 착한 사람이더라고요.

당시 석원씨가 본인 블로그에 일기를 올리고 있었어요. 인터뷰 준비로 그 글을 좀 봤는데 문장이 유려하다거나 스토리가 드라마틱한 건 아닌데, 뭐 하나가 있어요. 일단은 남들처럼 쓰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잡지에 연재를 제안했더니 처음엔 자신 없어 했어요. 일단 원고를 달라고 해서 받았는데, 사람이 글을 자기 블로그에 올릴 때와 잡지에 낼 때랑은 마음이 달라지거든요. 글에 힘이 들어가고 다른 사람 글 같아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얘기하고 그때부터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매번 글을 세 편씩 보내와요. 피드백을 보내면 고쳐서 보내오고, 몇 번을 주고받다가 한 달에 한 편의 글이 나오는 거예요. 계속 질문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고, 글도 계속 좋아지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갔죠.



Q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국경의 도서관>은 이야기 모음집인데요. 허구의 이야기를 쓸 때와 일반적인 산문을 쓸 때 느낌이 다른가요?

저는 모르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어요. 산문을 쓰다보면 자꾸 “인생은 이런 거야” 같은 얘길 하게 돼요. 그런데 아직은 그런 얘길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나이가 든다고 해서 현명해진다는 보장도 없고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게 재미가 없어요. 모르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재밌지. 그건 마치 내가 스토리를 알고 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거죠.



Q 우체통(’시인이 된 우체통’)이나 책갈피(’나는 책갈피다’)의 입장에서 의인화해 쓴 글들이 엉뚱하기도 하고 재미있었어요. 평소 사물의 입장에 서서 상상을 많이 하시나요?

예전에 한 친구에게 책을 냈다고 말했더니 “또 꽃이 말하고 그런 거지?”라고 말해서 ‘빵 터진’ 적이 있었어요.(웃음) 이야기라는 것은, 그게 사람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다른 삶을 상상해보는 거잖아요. 사람은 그래도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써보는 거죠. 가끔 길 가다가 멍하게 다른 생각에 잠길 때가 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신기하지만, 모든 사물이 자기 고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잖아요.



Q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요?

제가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즐거울 때는 자극을 받을 때예요. 내가 지금 요만큼 보고 있던 것에서 시야가 달라지거나 넓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저에게 좋은 책은 마음이든, 몸이든, 행동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게 하는 것이에요. 누군가 제 글을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죠. 아침에 눈을 떴을 떴으니까 형식적으로 밥 먹고, 일하고, 퇴근하는 게 아니라, "나 오늘 아무 것도 안 할래. 팡팡 놀아버리겠어."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Q ’루앙프라방의 푸른 이별’에서는 ’그리움과 싸운다’는 표현이 멋지더라고요. 마지막 부분에선 어쩔 수 없이 씁쓸하고 슬픈 감정이 들었고요. 그동안 여러 편의 글에서 슬픔을 언급하셨죠. 작가님만이 알고 있는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 같은 게 있을까요?

그걸 어떻게 이겨내요. 못 이겨내요. 하지만 전 슬픔을 이겨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거기 깔린 전제는 슬프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슬프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예요. 우리 모두는 유한한 생명을 타고 났고, 길가다가 오토바이가 와서 툭 치기만 해도 병원에 실려가고, 누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도 상처를 받는 게 인간인데 어떻게 안 슬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슬픔과 싸우려 드는 거죠. "나는 슬프면 안돼" 하면서 분노하는 거죠.

예전에 제가 되게 힘들었던 시기에 누가 정현종 시인의 ‘견딜 수 없네’란 시를 보여줬어요. 정현종 선생님을 가끔 뵙는데 그때마다 항상 긍정적이세요. 그런데 그 시는 ‘가는 일월도, 오는 이월도 다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이거든요. 그게 저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됐어요. ‘선생님도 견딜 수 없구나. 그런데 내가 뭘 견디겠다고 이렇게 안간힘을 써야 하나. 이러지 않아도 되는구나.’ 만약에 선생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견뎌야 하고 힘내야 한다’고 했다면 저는 더욱 힘들었을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슬픔은 이길 수 없는 걸로.(웃음)

네. 슬픔은 이겨낼 수 없는 걸로.(웃음) 아무도 못 이겨냈잖아요. 예수님도 못 이겨냈는데.



Q 그동안 작가님께서 쓰신 글들 중에 사랑에 관한 글이 많았고 또 그 글들이 무척 매혹적이더라고요. 근래 청년들이 여러 현실적 조건들 때문에 사랑을 못 하는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보세요?

저는 현실 조건 때문에 사랑을 못한다는 게 정말 그런가 싶어요. 정말 그렇다면 그건 연애지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상대를 만날 수 없다면, 나쁜 표현이지만 거래나 계산 같은 건 아닌가 싶은 거죠. 누군가를 만났는데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음도 무릅쓸 수밖에 없잖아요. 물론 그게 좋은 거고 이게 나쁜 거라곤 생각지 않아요. 그냥 그만큼만 좋아하는 거겠죠. 마치 두 개를 저울에 올려놓듯이,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면 그만큼만 좋아하는 거죠.



Q 책에서 여러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을 실제 현실에 소환해서 만날 수 있다고 하면 누굴 만나고 싶으세요?

글쎄요. 저는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요. 헤세의 작품보다는 그의 삶을 좋아해요. 그가 나중에 혼자서 시골에서 식물과 같이 정원일 하고 그림 그리면서 살았잖아요. 거기 한번 놀러가서 옆에서 그림 그리는 것 구경하고, 밀짚모자 쓰고 정원일도 같이 해보고 싶어요. 샐린저도 좋아하긴 하는데, 이 사람은 너무 은둔자라서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하고 싶어요.(웃음) 헤세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괜찮을 것 같아요. 릴케를 좋아하긴 하는데 너무 ‘찌질’해요. 너무 예민하고 만날 찡찡대고. 시는 좋아하는데 만나고 싶진 않은 작가예요.



Q 18년간의 페이퍼 편집장 생활을 마무리 짓고, 그 다음 계획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사실 전 인생에 계획이 없는 사람이에요. 예전부터 인터뷰 마지막 부분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질문 받으면 “별게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니까 서로 맥이 빠졌어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 "지금 30대 중반인데, 마흔이 되기 전에 춤을 배우고, 쉰이 되기 전에 그림을 그리고, 예순이 되기 전에 노래를 만들고, 일흔이 되면 별을 볼 거예요"라고 지어서 얘기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실제로 30대 중반 넘어가고 나서 플라멩코를 배우기 시작했고, 40대 때 그림을 배우게 됐어요. 그리고 이제 제가 50인데, 기타를 배우면서 노래를 만들고 있어요. 직접 만든 노래를 지난번 팬미팅 때 부르기도 했고요. 그때마다 선생님이 ’짠’ 하고 나타나서 ’탁’ 하게 됐네요.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북DB 2016.1.15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1601

매거진의 이전글 웃음 유전자와 농부 유전자... '이야기꾼' 성석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