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출간 박흥수 인터뷰
"기차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좋습니다."
인터뷰 장소를 어디로 하면 좋겠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박흥수는 20년 차 코레일 기관사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탄 기차 중 하나도 그의 핸들에 의지해 철길 위를 달려 종착지에 닿았을지 모른다. 철도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을 꿰고 있는 ’철도 덕후’(덕후 : 일본어 ‘오타쿠’를 우리말로 변형한 ‘오덕후’의 준말)이기도 한 그는, 기차 이야기라면 이틀 밤을 새우면서 늘어놓을 수 있다 자부한다. 또한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철도 시스템을 위해 글 쓰고 연구하는 일도 한다.
2013년에 펴낸 저서 <철도의 눈물>에서 정부의 철도 민영화 정책에 대한 날 선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그다. 이번 신간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에서 그의 시선은 역사적이며 인문학적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고대 피라미드 건설에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에서 철도는 인류의 모든 부분에 관여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거대한 기계장치는 사람들의 삶과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근대문명의 견인차 구실을 해온 철도 이야기가 사뭇 흥미진진하다.
박흥수는 이번 책을 ’본인이 읽고 싶었던 책’이라 이야기한다. 서점에서 본인이 원하는 철도에 관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일까? 철도를 축으로 하여 그가 보유한 지식은 곳곳에서 빛이 난다. 물론 기차 운행이 없는 날이면 밤이고 낮이고 원고를 붙들고 끙끙댄 그의 노력도 한몫했다. 덕분에 이 책을 읽고 나면 철도가 그냥 철도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철도 덕후인 그를 만나 철도 위에서 그가 꾸는 꿈들에 귀 기울여봤다.
"기차 움직이는 것, 안에 탄 수백 명의 사연도 함께 나르는 것"
Q 늘 승객으로 기차를 타니까 기관사님들을 볼 기회는 없었는데요, 기관사의 생활은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열차 기관사는 노선이 매일 바뀌고 출퇴근 시간도 일정치 않아요. 가령, 운행노선은 장항선, 경부선, 호남선, 출근 시간이 새벽 6시 22분 출근, 밤 9시, 낮 12시 반, 새벽 4시 이렇게 계속 바뀌니까 월요병이 없어요. 공휴일에 상관없이 스케줄에 따라 일을 하고 명절 같은 특별 수송기간에는 임시열차까지 동원되죠.
Q 그럼에도 기관사로서 20년이나 일하셨고 또 철도를 사랑하시죠. 기차의 어떤 매력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도록 하고, 더 깊은 관심을 갖게 한 건가요?
기차는 100억 원이 넘는 거대한 기계장치인데(KTX는 330억 원), 운전석에 앉으면 로봇 태권브이의 주인공 훈이가 된 기분이 들어요. 내 손으로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단순히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탄 수백 명 사람들의 사연도 함께 나르는 거잖아요. 그런 기계장치의 맨 앞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재밌고 신기하죠.
Q 스스로 ’철도 덕후’, ‘철덕’이라고 밝히셨는데요. 철덕이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대학 시절엔 기차에 그렇게 빠져 있지도 않고, 기관사가 될 걸로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20년 전 코레일에 입사해 기관사로 일하면서 철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게 됐죠. 철도노조에서 철도 민영화 정책의 문제점을 밝히는 일을 했죠. 그러다가 다시 현장에 들어와 일하면서 철도에 관련된 하나하나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여기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들이 모인 책이 있을까 해서 봤는데 그런 책이 없었어요. 철도에 관한 연구나 학술 서적은 많이 있지만, 대중적으로 접근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었어요.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모아서 얘기해보자’ 해서 프레시안에 철도 관련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거예요.
Q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읽어보셨나요? 그 책에서 주인공 직업이 역 설계자이잖아요.
네. 읽어봤죠. 그 책에는 안 쓰여 있지만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가 JR동일본이에요. 책 속에 "신주쿠 역이 내려다보이는 회사에서…"라고 묘사한 대목을 보고 ’이건 JR동일본 6층쯤에서 내려다본 풍경’일 거라고 생각했죠.(웃음)
Q 일본은 또한 철도의 나라잖아요. 일본의 발전된 철도문화가 부럽진 않으세요?
소설 속 다자키 쓰쿠루가 근무했던 곳에서 길을 건너면 기쿠노미야라는 대형서점이 있어요. 거기 5층에 철도 코너가 있어요. 에세이부터 만화, 학술서에 이르기까지 철도에 관해 정말 많은 책이 있어요. 오죽하면 <한국철도의 역사>란 책도 거기서 샀을 정도로요. 그런 건 정말 부러워요. 한국 대형서점 철도 코너에 가면 ‘도시철도공사 5급’ 같은 수험서가 대부분이잖아요. 한국도 철도에 꽤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문화적인 것들을 기억하거나 보존하는 데 소홀한 점은 아쉬워요.
황소의 엉덩이에서 오늘날 철도 선로 폭이 결정됐다?
Q 신간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이야길 해볼게요. 기차의 역사를 다룬 책이란 얘길 듣고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차에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선사시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더라고요. 피라미드조차도 철도가 관련이 있고요.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이용한 말이나 황소 두 마리 엉덩이 폭이 오늘날 선로의 폭을 결정했고, 그때의 흔적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죠.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찾아가려 했던 근원엔 인간의 호기심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동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해요. 뭔가를 움직이기 위해 도구나 장치를 쓴 거죠. 기차도 이동수단 중 하나이고요.
Q 19세기 초 영국에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대성공을 거두고, 각종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너도나도 철도업에 뛰어든 적이 있었죠. 그때 상업적 이익을 마다하고 끝내 공공의 이익을 고수했던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 이야기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작가님의 스티븐슨을 향한 경외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스티븐슨은 따로 전문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자존감과 명예를 중시한 사람이었어요. 당시 여러 회사가 철도업에 끼어들어서 선로를 놓고 경쟁하는 걸 보고 "철도를 이해 못 하고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철도를 역규정해서 저런 행동을 하고 있다"라고 비판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명언을 남기죠. "조화할 수 있는 곳에 경쟁하지 않는다." 저는 그 말이, 경쟁이 공기처럼 흐르는 한국사회에도 통하는 것 같아요.
Q 기차는 전혀 의외의 분야까지 변화시킨 것 같아요. 철도의 등장이 사람들에게 ’시간’ 관념을 심어준 것도 새롭게 알게 됐어요.
시간은 철도 등장 이전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용어였어요. 조선시대에도 유럽에서도 종 치는 소리로 때를 구분했을 뿐 정확하게 구획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시간을 놓쳤다’라고 할 때 ’놓쳤다’는 건 열차를 놓쳤다는 의미예요. 철도가 등장하면서 시간 놓칠 일이 없던 사람들이 시간을 놓치게 된 거죠. ’떠나보낸 열차는 잡을 수 없다’와 ’떠나버린 시간은 잡을 수 없다’는 동의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시간과 열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죠. 그로부터 표준시가 생겨나 영국 그리니치가 표준시의 중심이 됐고요.
Q 철도의 등장으로 부르주아들이나 지식인 사이에 문고판 책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는 대목도 흥미롭더라고요. 철도와 책이 연관 있을 거라고 예상 못 했거든요.
근대 이전에 글을 아는 것, 글씨를 쓰는 것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어요. 1세계 선진국의 문맹률도 90%에 달했고요. 그때까지 책을 읽는 행위는 노동하지 않음을 전제로 했지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책 읽을 시간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책은 귀족을 위한 것이니까 표지를 가죽으로 세심하게 세공하고 종이도 양피지를 써서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도 했죠. 철도가 상용화되면서 역에서 책을 대여할 수 있게 되었고, 기차에서 보기 편하도록 문고판이 일상화 되었죠. 따라서 철도 덕분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권력을 해체하는 시기였던 근대에, 권력 해체에 가장 중요한 문자해독능력을 제공한 것이지요.
Q 철도가 정치사회적으로도 중요하게 이용됐다죠. 협궤를 쓰는 일본이 우리나라엔 표준궤 선로를 놓은 데에 이유가 있다고요?
일본의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는, 일본은 협궤를 쓰는데 한국에는 표준궤를 깐 까닭을 한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해요. 저는 그런 얘길 들으면 혈압이 막 오르죠. 왜냐하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표준궤를 놓은 것은 만주나 중국의 철도가 표준궤였기 때문에 그곳에 진출하기 위한 선택이었거든요. 우리나라를 침략의 전진기지화하기 위해 근대 운송수단의 가장 중요한 장치인 철도의 하드웨어를 그들이 진출하려는 지점과 동일화시킨 것이었거든요.
"청소년·대학생들이 눈높이로 국경 넘는 경험 했으면..."
Q 철도가 근대의 포문을 열었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교통수단이라는 작가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많이 흘렀고 또 다른 편리한 교통수단도 여럿 등장했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철도를 고수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근에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혁명 이전보다 2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하는 데 합의했잖아요. 그 방법 중 가장 좋은 건 철도를 중심으로 교통체계를 바꾸고 도로에서 자동차를 몰아내는 거예요. 80년대 말부터 유럽에서는 철도가 고속화되고 환경오염에 대비할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서 경쟁력을 갖기 시작하니까 철도가 공공교통으로서 미래지향적 대안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철도에 대한 투자가 더 많아지면서 다시 부흥기가 왔죠.
몰락할 줄 알았던 산업인데, 지속가능한 산업이 된 거죠. 중국 같은 경우도 철도를 국가 역점산업으로 삼고 있고요. 무궁화호, 새마을호는 한 번에 500~600명을 한꺼번에 나를 수 있는데요, 그 인원이 모두 자동차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도로는 어떻게 되겠어요? 교통사고 처리비용, 혼잡비용, 유류비용, 환경오염 비용까지 따지면 자동차는 정말 반인간적 교통수단인 거죠.
Q 책 마지막 부분에서 식민지 침탈과 전쟁의 도구였던 철도가, 소통과 연대의 도구가 되길 희망한다고 쓰셨어요. 철도가 어떤 점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원래 남한에서 개성까지 열차가 다녔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때 사업 시작해서 노무현 대통령 때 개통식을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 때 끊겼죠. 당시 도라산역을 만들고 개성으로 향하는 철로를 놓으면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중무장 부대가 이전했고, 살상무기인 지뢰도 다 제거했어요. 이렇게 철도가 평화에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한 것이죠. 이런 철도가 평양이나 신의주를 넘어 중국까지 연결된다면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이 눈높이로 국경을 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리적 조건이 사람들의 상상력까지 제한한다고 보거든요. 지금은 섬처럼 갇혀 있다가 보니까 우리의 상상력도 작아졌는데, 만약에 철도길이 열리면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열리게 되고, 그 열린 공간을 통해 우리의 꿈이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행기 타고 언제 국경을 넘는지도 모르고, 기내식 몇 번 먹고 자다가 일어나서 외국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눈높이로 국경을 넘어가는 거예요. 70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역은 국제역(international station)이었거든요. "서울역에서 런던행 두 장 침대칸으로요." 이렇게 기차표를 예약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철도는 근대를 돌파한 교통수단이었지만, 사실 근대는 인류에게 아픈 역사의 시간이었어요. 홀로코스트나 세계대전이라는 살육의 역사를 겪었으니까요. 특히 우리 식민지 시기 한국 철도의 역사에는 선로 마디마디마다 조선 사람들의 피가 어려 있어요. 철길은 굉장히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철길이기도 한 거죠. 그런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해요.
우린 너무 빠르게 모든 걸 쉽게 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잖아요. 세월호도 빨리 잊으라고 하고, 위안부 소녀상도 빨리 없애고 화합으로 가자고 하는데, 진정한 화합은 오히려 그런 걸 잊지 않는 거예요. 가슴 속에 담아두고, 그런 사건들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서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진정한 화합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북DB 2016.1.29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