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GV빌런 고태경>을 읽고
GV를 아십니까? Guest Visit의 약자로 영화의 상영이 끝난 뒤 감독 등 제작진과 관객이 만나 대화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스스로 씨네필이라 자부한다면 한 번쯤 GV에 참석해 보셨을 텐데요. 저 역시도 영화제나 특별 상영 등에서 영화가 끝난 뒤 감독님이나 배우들과 갖는 이 특별한 시간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GV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평가하고 싶을 뿐 만든 이의 이야기는 굳이 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핑계) 게다가 사회자가 "질문 있으신 분 편하게 손 들고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말했는데 관객석에서 아무 질문도 나오지 않을 때의 그 뻘쭘함이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GV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푼 이유는 얼마 전 읽은 장편소설 <GV빌런 고태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볼게요.
이 책의 주인공인 조혜나 감독은 200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에 영화과에 입학해, 후에 한국영화교육센터를 졸업한 신인 영화감독입니다. 그녀의 나이는 서른셋. 이제껏 단편, 독립 영화도 몇 편 찍었지만 소위 대박 난 작품은 없었습니다. 현재 영화 입시학원에서 수업을 하며 여전히 배고픈 꿈을 꾸는 중입니다. 돈이 없어서 중고 책도 내다 팔죠. ㅜㅜ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자신이 찍은 영화의 GV 행사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GV 빌런 고태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선 영화 잘 봤습니다."
"두 번째 영화 <히치하이킹> 말인데요. 콘티는 그리고 촬영했습니까? 콘티 없이 찍은 것 같은데요?"
“컷들이 튀지 않습니까. 시선도 안 맞고, 남녀 주인공이 공원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 180도 라인은 일부러 넘긴 건가요? 왜 편집에서 그대로 남겨뒀죠?"
꼼꼼하면서도 살벌한 질문을 던지는 중년의 남성 고태경의 등장에 당황한 조혜나 감독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눈새라고 아세요? 모르시죠. 인터넷에서 찾아보세요."
신인 감독과 GV 빌런의 팽팽한 대립은 화제가 되며 유튜브 화제의 영상에 오릅니다.
후일 고태경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조혜나. 알고 보니 고태경은 조혜나를 영화계로 이끌었던 '초록 사과'라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참여한 조감독 출신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감독을 꿈꿨지만 여태껏 운이 따라주지 않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했고,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고태경은 결국 영화관을 성실히 드나들며 질문을 던지는 GV빌런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조혜나 감독은 고태경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처음엔 쉽사리 조혜나 감독에게 마음을 열지 않던 고태경은 긴 시간 대화를 하고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갑니다. 조혜나 감독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고태경을 이해해 가고 그에게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면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과연 신인감독 조혜나는 고태경에 관한 다큐를 무사히 완성할 수 있을까요?
조혜나와 고태경은 과연 그들이 몹시도 사랑하는 영화를 만들리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3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GV빌런 고태경>을 쓴 정대건 작가는 영화 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몇 편의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만든 감독 출신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설 속 주인공인 조혜나와 겹쳐지네요. 아무래도 영화감독으로서 저자의 경험이 녹아있기에 소설 속에서는 스크린 뒤편 영화계의 모습이 비교적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2) 모든 분야가 그렇듯 영화계도 승자독식 체계입니다. 박찬욱, 봉준호 등 인기 감독이 있지만 이런 인기를 얻는 감독은 극소수이고 그렇지 못한 무명 감독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당장 지갑에 돈이 없어 중고책을 팔아 급한 돈을 구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요새 대세라는 유튜브, 넷플릭스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영화를 삶이자 종교로 받아들인 사람이죠. 요즘의 방식이 반짝반짝 빛나는 성공을 좇는 것이라면 제 눈엔 조혜나나 고태경의 삶이 조금은 구식의 삶으로 비쳤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미래에 봉준호나 박찬욱이 절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물들에게 묻습니다. "계속해서 영화의 길을 가겠느냐"고.
3) 예언 하나 할까요? 이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은 단팥죽이 먹고 싶어 질 겁니다. 책에서 고태경 씨가 단팥죽을 먹는 장면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묘사가 되거든요. '먹방'은 있지만 '먹책'은 못 들어봤다면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먹책'의 가능성을 엿봤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모두 힘겹고 고단한 코로나 시기를 재미있는 것들과 함께 슬기로이 이겨나가시길 바랍니다. 단팥죽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