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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Feb 02. 2022

허진호와 행복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행복은 관계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막힌 곳에서 불행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교류가 원활할 때 행복을 느낀다. 연인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대인관계 중 가장 가변적인 관계이다. 서서히 친해지거나 멀어질 수 있는 친구나 쉽게 맺고 끊을 수 없는 가족과 달리, 연인 관계에는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존재한다. 그중 시작과 행복의 순간을 조금의 환상과 엮어 상영하는 것이 영화의 로맨스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 좋아하는 남자 친구 생기면 달라질걸?

허진호 감독은 연인이 가지는 행복의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낸다. 파스텔 톤의 화면과 피아노와 기타로 연주되는 선율 속에서 두 남녀는 밝고 행복한 사랑의 시간을 갖는다. 동시에 감독은 환상에서 벗어나 행복의 결말까지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여전히 화면과 음악은 밝지만, 두 인물이 서로 분리된 장면이 늘어나고 함께 화면에 담기는 순간은 긴장감과 슬픔을 준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세 이야기에서 행복은 더욱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진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행복은 함께 해야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인물들은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며, 이후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작은 일에도 웃음을 터트린다. 각자 속한 곳도 그간 가졌던 경험도 다르지만, 조금의 공감대와 미소 속에 누구보다 가까워진다. 대신 서로를 만난 이후부터 떨어져 있을 때 쉽게 웃지 못한다. 홀로 상대방을 기다리거나 회상하더라도 웃음 짓는 장면은 나오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헛웃음이나 취기 속 웃음만 등장한다. 오직 서로의 목소리를 듣거나 서로를 바라볼 때만 밝은 미소를 짓게 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 -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한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과 다림의 마지막 미소는 함께 있을 때의 것이 아니지만, 서로를 마지막으로 생각하며 짓는 미소이다. 정원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을 가진 인물이다.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사로서,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진을 찍으며 웃으시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는 약간의 웃음을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카메라 각도를 거듭 조정하고 렌즈를 쳐다보며, 그는 다림의 사진을 찍어주던 첫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원은 건강 문제로 갑작스럽게 다림을 떠나지만 다림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그가 없는 사진관에 계속 발걸음 했다. 원망 속에 잠시 멀어졌다가 눈이 오는 날 오랜만에 발걸음 한 사진관에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정원이 찍어준 다림의 사진이 있었다. 다림은 그 순간과 정원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다.


행복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연인일 때, 둘은 과거를 이야기하며 다투거나 미래를 말하며 준비하지 않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행복>의 은희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인물들도 현재를 함께 살아갈 뿐 먼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가며 나중에 가질 어려움이나 이전에 있었던 다툼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인물들이 붙어 있는 시간은 밝고 행복할 수 있었다. 이를 벗어났을 때, 연인의 행복은 깨어지고 만다.

<행복> -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 않니? 난 지겨운데

<행복>의 은희와 영수는 동거를 시작한 뒤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며, 서로가 죽을 때에 옆에 있기로 약속한다. 큰 병을 앓는 은희가 생각할 수 있던 유일한 미래이기에 꺼내봤던 약속이지만, 이는 그 시간까지 둘의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대신 영수의 권태를 앞당길 뿐이었다. 몸에 좋지만 재미가 없는 공간인 시골을 떠나 자극적인 즐거움과 병을 준 서울을 다녀오고 나서, 영수는 퇴직금과 노후 준비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현재를 숨이 차게 살아가는 은희의 삶의 방식이자 시골 마을에서 둘이 함께하던 삶의 방식을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 않니?"라는 말로 조롱한다. 그 이전까지 두 사람에게 과거는 거짓과 유머로 언급되고 미래는 두리뭉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 애인과 서울 밤거리의 화려한 모습으로 선명해진 과거와 4억 7천이라는 금액으로 구체화된 미래 속에 둘의 몽글몽글하고 행복했던 시간은 끝나버린다.


그리고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이질적인 둘의 결합은 시작부터 완전하지 않았으나,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 틈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시골과 대비되는 서울의 쾌락을 본 이후의 영수처럼 감정이 줄어들거나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돼 쓰러진 정원처럼 다른 일로 틈이 깊어질 때, 행복은 영원하지 못하고 결말을 가진다. 혹은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처럼 특별한 계기 없이 행복이 끝나기도 한다. 계절이 끝나고 봄날이 가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꽤 멀리서 보면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안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지구 사람에게 계절의 변화는 그냥 때가 온 것이다. 둘에게 특별한 잘못이나 사건이 없더라도, 행복은 변하고 끝나기도 한다. 

<봄날은 간다>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상우는 이별을 고하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묻는다. 은수는 밤새워 일하는 PD의 생활 속에 여유를 잃었고, 없는 여유 속에 상우를 배려하고 챙겨줄 자리는 없었다. 라면 먹자는 이야기는 매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하는 말에서, 함께 먹는 일상적인 식사가 되었다가, 지친 두 사람의 대화에 비난으로 등장한다. 술 먹은 모습도 멋있다던 남자는 술 마시고 억지로 집에 찾아오는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고, 무릎 위에 앉아 운전을 배우던 여자는 다른 남자가 몰아주는 차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모든 장면을 본 외부인은 각자 저지른 잘못을 따질 수 있지만, 안에서의 둘은 마음과 행복의 변화로 받아들일 뿐이다.


<봄날은 간다> - 마지막 악수

두 사람의 재회는 완결되었던 행복을 다시 시작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지난 마음을 정리하거나 이미 정리된 마음을 보여준다. 정원과 다림의 재회는 각자의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은희와 영수의 만남은 시간을 놓쳤다. 카페에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던 상우와 은수도 서로를 돌아보더라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행복의 억지스러운 연장이 아닌 완전한 결말을 가지며 마무리된 이야기와 사랑을 곱씹게 한다. 환상을 벗어난 허진호 감독의 로맨스는, 그렇게 삶 속에 있었거나 있을 법한 행복의 시간을 온전히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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