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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Feb 11. 2022

곽재용과 노래

비 오는 날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장면을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때 그 순간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노래는 장면과 연결되어 함께 서로를 부른다. 직접 겪었던 추억일 수도 있지만, 영화 속 순간일 때도 있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가 특히 그렇다. 그가 만든 사랑 이야기 뒤에는 아름다운 노래가 존재한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와 별개로 완성되어 알려진 노래까지도 가사와 연결 지어 장면 뒤에 담아낸다. 특히 <비 오는 날 수채화>(1989),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4) 세 편의 노래는 곽재용 감독 영화의 색채와 아름다운 순간을 불러낸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평범한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만든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에서는 비가 그 특별한 순간을 더욱 강조해서 보여준다. 보통의 비는 거추장스럽거나 귀찮은 일이지만, 특별한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비는 행복한 기억의 배경이 되어준다. 멀어지더라도, 같은 시간에 보고 있을 비를 생각하며 서로를 그리워한다. <클래식>의 준하와 주희는 첫 데이트에서 함께 비를 맞고, 상민과 지혜는 빗속에서 함께 달리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가 쓴 두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배경으로 비가 내린다. 그리고 이 노래가 엔딩곡으로 사용된 <비 오는 날 수채화>는 모든 중요한 사건이 빗속에서 일어난다. 지수와 지혜를 연인이 아닌 남매로 맺어준 것은 두 우산 사이의 발걸음이었고, 지수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도, 두 사람이 엇갈리고 다시 만나는 것도 빗속에서이다.

노래 가사처럼, 빗속에서 그들은 함께 온 세상을 그리며 그들이 갔던 장소를 특별하게 만든다. 재회를 기다리며 그곳에 머물러 그림을 그리고, 전하지 못한 말을 담은 타임캡슐을 묻으며, 오랜 시간이 흘러 다음 세대가 대신 찾기도 한다. 가사에 나오는 음악이 흐르는 카페와 가로등불 아래에서는 <클래식>의 준하와 주희가 두 차례 극적인 만남을 가진다. 인물들은 그렇게 평범했던 거리를 함께 색칠해 간다.


함께 했던 시간이 특별했기에, 이별을 맞아도 마무리와 영원한 작별이 아닌 기다림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이별의 선고가 있더라도 묵묵한 기다림 끝에 시간이 지나서라도 다시 연결되었다. <비 오는 날 수채화>의 지혜는 지수가 서울에서 대학과 감옥을 다녀올 때까지의 모든 시간을 기다려주었고, <클래식>의 주희는 베트남 전에서 준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는 그녀를 위한 다음 사람에게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전하고 떠난다. 그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그녀와 견우가 함께 했던 추억이 담겨 있다. 견우는 말로서는 그녀를 보냈지만 그 안에 담긴 추억들을 통해 그녀가 견우를 쫓아오도록 만들었다. 급하게 역으로 달려온 그녀 주위로 카메라가 한 바퀴 회전한다. 세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나오는 장면으로, 각 영화 속 사람들의 만남이 그들에게 찾아온 우연에 노력을 더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견우와 그녀는 다시 2년이라는 유예기간을 가졌지만, 서로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기는 맞지 않았지만 둘은 함께 앉았던 소나무 앞으로 각자 돌아왔고, 결국 우연이라는 운명이 놓아준 다리 속에 재회할 수 있었다.


힘겹게 다시 이어지지만 인물들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극적인 재회를 보여주되 영원한 행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비 오는 날 수채화>와 <엽기적인 그녀>의 쌍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남아있고, <클래식>은 준하와 주희의 비극이 중심이며 지혜와 상민의 이야기는 시작에 머무른다. 영화의 맺은 시점으로, 사랑의 지속이 아닌 서로 처음 맺어지기까지의 과정만으로도 그림처럼 추억이 됨을 보여준다.

<클래식>에는 다양한 노래가 사용된다. 가사에 따라 장면에 활용하여, 서로의 마음이 엇갈려 바라볼 때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 오랜 시간 이별하는 순간에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나온다. 시대를 오가며 가장 많이 사용된 곡은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다. 노래는 가로등 불 아래에서 준하와 주희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상민이 자신의 마음을 지혜에게 보여주고, 지혜가 이를 알게 되는 두 순간에 다시 사용된다. 두 장면 모두 불확실했던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엇갈려 슬픈 노래가 될 수도 있지만, 노래 가사처럼 그들이 함께 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추억이 되어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논은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강의실로 견우가 꽃을 들고 찾아왔을 때 그녀가 연주하고, 3년이 넘게 시간이 흐른 뒤 우연 속에 만날 때 다시 등장한다. <클래식>에서는 편지를 타고 옛이야기로 들어갈 때 배경으로 나오며, 준하와 주희가 캐논의 변주에 맞춰 함께 춤을 춘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캐논의 코드 구성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캐논이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지듯, 영화 속 사랑의 느낌도 그렇다. 비슷하지만 흥미로운 일상이 반복되며 전개되고, 여운을 길게 남긴다. 여러 성부가 겹치고 어긋나며 조화를 이루듯 서로 다르지만 우연 속에 얽힌 두 사람도 함께 어우러진다.


곽재용 감독의 이야기에서 시간의 경과는 가볍게 넘어간다. 감옥, 군대, 타임캡슐을 열기까지의 시간 모두 사랑 이야기에 비하면 짧고 쉽게 지나간다. 아쉽게도 현실과 감독에게는 그렇지 않았고, <클래식> 이후 반복적인 실패로 감독의 정취도 유치하고 구식의 것이 되었다. 뻔하고 과한 이야기더라도 아름다운 풍경과 노래 속에 담아 여운을 전했던 그의 감성이 다시 클래식해져 돌아오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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