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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Feb 19. 2022

미셸 공드리와 우울

이터널 선샤인, 수면의 과학, 무드 인디고

영화는 화면 안에서 세상을 구성하고, 그 세상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미셸 공드리 감독에게 세상은 생긴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특수한 소품과 미장센 안에서 대상은 그가 느끼는 방향에 따라 독특하게 나타난다. 서사보다 표현에 집중하는 제작 방식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관람 시기와 정서가 감독과 맞아떨어지는 날에는 작품 속에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이터널 선샤인>(2004), <수면의 과학>(2006), <무드 인디고>(2013) 세 편에서는 각기 다른 특수한 공간에서 그가 느낀 세상을 보여준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이터널 선샤인> - 몬토크 해변가의 침대

독특하고 과하게 표현된 공간 뒤에는 인물들의 슬픔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연인 클레멘타인과 숱한 다툼 끝에 이별한 슬픔이 기억 너머에 남아있다. <수면의 과학>의 스테판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겪고 그 아픔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보존된 인물이다. 조엘과 스테판은 각자 지워지는 자신의 기억과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한 꿈에서 우울을 극복해나간다. <무드 인디고>는 비극을 겪으며 변하는 감정에 따라 세상의 색채가 변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밝았던 화면이 어두워질 때, 관객은 곧 인물들이 겪을 비극적 사건들을 먼저 알아차리게 된다. 표현 방법의 아름다움에도 미셸 공드리 영화를 보고 텁텁한 느낌이 남는 것은 그러한 장면 뒤에 남아있는 우울한 감성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함께 이별 후의 우울을 경험하며 이별 다음으로 넘어가는 이야기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조엘은 한없이 밝고 명랑한 클레멘타인을 만나 아름다운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의 미소 뒤에는 큰 우울도 있었고, 곁에서 보듬어주던 조엘도 시간이 흘러가며 그녀의 변덕스러운 감정 변화를 버거워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준 말다툼과 이별 이후 클레멘타인은 조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지웠다는 걸 알게 된 조엘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시작한다. 하나둘씩 기억이 사라질 때, 조엘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기억 삭제를 멈추려 노력한다.

<이터널 선샤인> - 조엘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돌아간 둘

기억의 삭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사물의 특징을 지우는 것처럼 삭제된 상태 자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화면이 깜빡이며 일부만 보이거나 어두운 세상 속에 특정 공간만 비추는 등 조명을 사용해서 기억이 현실의 일부분이라는 점도 보여준다. 기억을 삭제하는 사람의 추적을 피해 어린 시절 기억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촬영 방식과 특수 제작된 소품을 통해 식탁 밑에 숨은 꼬마 조엘이나 싱크대 안에서 목욕하는 둘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조엘은 연애할 때에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기억이 삭제되는 중에 클레멘타인에게 공유하고, 서로와 서로의 우울을 이전보다 잘 이해하게 된 둘은 서로에 대한 기억이 영영 지워지는 상황까지 받아들인다.

<이터널 선샤인> - 사라지는 서점 속 둘

동시에 둘이 지워진 기억에는 새로운 쓸 공간이 남는다. 기억이 지워지며 서점의 책들은 내용과 색이 지워졌지만, 책의 형태 자체는 남아있다. 형태만 남은 책처럼 서로에 대한 기억은 외적인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다시 빈 책에 써 내려갈 수 있기도 하다. 녹음된 서로에 대한 험담을 들었을 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반복할 상처를 생각하며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엘의 짧은 Okay와 함께 과거와 이별을 넘어서게 된다.


<수면의 과학> - 손이 부풀어 오른 스테판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인물이 보는 현실과 꿈이 뒤섞인 세상을 보여준다. 스테판은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이지만, 달력 인쇄를 교정하는 한없이 따분하고 반복되는 일을 맡는다. 상사의 갈굼 속에 억지로 프린터를 두드리던 스테판의 손은 부풀어 오르고, 부풀어 오른 손과 함께 상사에 맞서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꿈과 현실을 혼동하던 스테판은 도시에 정착해 취직한 지금에서도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한다. 스테판이 겪는 혼란을 반영하여, 영화의 장면들은 어느 순간 꿈에서 현실로 넘어가고 반대로 어느 순간 꿈으로 되돌아간다. 

<수면의 과학> - 1초 타임머신

스테판이 겪는 혼란 뒤에는 상처가 있다. 스테판은 부모의 이혼 이후 아버지를 따라 멕시코로 향했지만, 자신이 따르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가 있는 파리로 넘어오게 된다. 소통할 창구를 잃은 스테판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꿈속에서라도 추구했고, 이는 현실과 꿈이 뒤섞이게 만든다. 그가 현실에서 만든 세 가지 발명품도 그가 겪는 외로움과 혼란을 보여준다. 이미 3차원인 세계에서 사용하는 3D 안경은 차원을 오가며 표현되는 꿈과 현실을 구별하여 보기 위함이다. 텔레파시 기계는 그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었던 마음을, 1초 타임머신은,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있는 시간을 반복하며 길게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수면의 과학> - 스테판이 달리게 만든 Golden The Pony Boy

다른 사람과 소통이 이루어질 때, 스테판의 혼란과 우울은 줄어들고 현실이 꿈과 같이 행복해진다. 스테판은 우연히 마주친 이웃집 여자 스테파니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지만 방법이 한없이 서투르다. 어설픈 성적 농담이나 꿈 속이라고 생각해서 벌인 과감한 행동들은 순조롭게 흘러가던 분위기도 멈춰 놓는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주며 셀로판과 구름으로 현실을 꿈처럼 표현하고, 꿈과 현실 모두에서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졌기에, 스테판이 가졌던 혼란은 사라져 간다.


<무드 인디고> - 칵테일 피아노

<무드 인디고>는 미셸 공드리의 눈으로 구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제멋대로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요리나 손을 피해 달아나는 알람 시계처럼 주변 사물들은 느낌에 따라 표현된다. 함께 비글무아 춤을 추며 시간을 즐길 때에는 다리와 몸이 한없이 늘어지고, 생명력을 담보로 한 노동을 할 때에는 식물처럼 움직임 없이 처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이루는 주체는 주인공 콜랭이 겪는 감정이다. 그의 감정이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으로 반영되어 장면을 이룬다. 콜랭이 가장 애장 하던 소장품인 칵테일 피아노처럼, 모든 감각이 섞여 경험을 만든다. 클로에와 행복한 사랑을 할 때, 세상은 무지갯빛이며 날씨도 그들에게 맞추어 변화한다.

CHEEZE, Mood Indigo MV

그러나 영화는 환상을 보여주면서도 도시에 살아가기 위한 우울함을 보여준다. 클로에와의 행복에 모든 돈을 사용한 콜랭에게는 남은 게 별로 없었고, 갑작스러운 클로에의 발병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맞는다. 잔고가 남지 않은 콜랭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칵테일 피아노와 같은 애장품들을 판 이후 고된 노동의 공간으로 향하고, 화려했던 장면들은 색채를 잃는다. 이상적이지만은 많은 않은 사랑은 다른 커플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알리즈와 시크는 사르트르를 매개로 맺어졌지만 시크의 사르트르에 대한 몰입이 과도해지자 알리즈가 사르트르를 죽이는 결과를 만든다. 콜랭과 시크는 모두 현재의 행복만 즐기며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생명력을 흡수하는 도시에서 준비의 소홀은 비극을 불러왔다. 둘은 무지갯빛 세상이 끝나고 흑백의 세상이 시작되자 쇠락해진다. 하지만 우울한 도시 속에도 서로를 바라본 클로에와 콜랭은 비극적이지만 함께하는 이별을 가지고, 밝은 상황에서부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 시크와 알리즈는 어두운 이별을 가진다. 


미셸 공드리 감독 영화에서 우울은 결국 혼자가 아닌 함께 극복해나갈 대상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결국 슬픔을 넘어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다음 기쁨을 기약한다. 독특하게 표현된 모습처럼 각자에게 세상이 주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그 속 우울을 함께 넘어설 수 있으며, 넘어서지 못한다 해도 그건 각자의 잘못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밝으면서도 어두운 그의 작품을 우울한 날에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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