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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Mar 26. 2022

일상의 자유, 평등, 연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3부작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연대는 당시 민중들이 절대 왕정에 맞서 내세우던 가치였다. 현재도 프랑스의 모토로 남아있으며, 모든 사회에 필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그 개념을 사회에서 일상으로 적용하여 각 이념에 해당하는 세 가지 색 연작을 만들었다.

세 가지 색 연작의 포스터

3대 이념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가치였지만, 삶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치가 된다. 자유는 억압하는 사람을 이겨내기 위한 힘이고, 평등은 다른 사람과의 동등한 관계를 만들어내며, 연대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 생겨난다. 각기 다른 장르의 <세 가지 색: 블루>(1993), <세 가지 색: 화이트>(1994), <세 가지 색: 레드>(1994) 세 작품에서 삶 속의 자유, 평등, 연대를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프랑스 국기 라 트리콜로르의 세 가지 색이 처음부터 세 이념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각각 하나의 이념과 대응하게 되었다. 삼색을 제목으로 가져온 감독은 그 색을 인물비추어 삶과 영화 속으로 들어온 이념을 각각 시각화한다.

<세 가지 색: 블루> - 이사할 때 챙길 수밖에 없었던 샹들리에

블루는 자유의 색이다. 또한 영어로 우울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할 권리지만, <세 가지 색: 블루>에서는 슬픈 기억과 책임에서 벗어날 자유로 그려진다. 줄리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중 교통사고를 일으켜, 줄리의 아이와 남편이 죽는다. 작곡가였던 남편 파트리스가 남긴 악보를 찢고, 함께 지내던 집을 떠나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어도 그녀가 가지고 있던 양심의 가책은 그녀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찢었던 악보의 멜로디가 머릿속에 반복되고 그 복사본을 직원이 몰래 보관해두고 있던 것처럼,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좁은 빌라에 홀로 앉은 줄리의 얼굴 위로는 푸른빛이 내려오며, 지워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기억은 남편이 산 푸른빛의 샹들리에로 남는다.

줄리에게 자유를 준 것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미화되었던 기억에 빠져있던 부분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파트리스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하려는 동료 올리비에로부터 남편이 오랜 기간 바람을 폈으며, 바람 상대가 남편의 아이까지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난 줄리는 우울함을 벗고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남편이 완성하지 못했던 곡을 완성하며 음악과 삶을 이어나간다.


<세 가지 색: 화이트> - 가장 하얗고 아름다웠던 결혼식의 기억

화이트는 평등의 색이다. <세 가지 색: 화이트>는 그와 반대로 평등한 장면을 주지 않는다. 폴란드인 미용사 카를은 프랑스인 아내 도미니크에게 성적인 만족을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당한다. 두 부부가 온전히 평등했던 것은 하얗고 아름답게 그려지는 결혼식의 순간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삶은 폴란드와 프랑스라는 한 측에게만 유리한 장소, 한 측에게만 유리한 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프랑스 법원에서 이혼당한 이후 아내의 미용실에 방화하려 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여권도 잃은 카를은 자신이 우세한 공간인 폴란드로 향한다.

돌아온 고향에서 카를이 정착해가며 이뤄낸 것은 아내와 같은 방식의 복수이다. 프랑스에서 힘이 없던 남자의 성적 능력은 폴란드에서 멀쩡하게 돌아오며, 프랑스에서 당당하게 책임을 떠넘기던 여자의 힘은 폴란드에서 남자의 흉계와 폴란드 공권력에 쉽게 붙잡힌다. 새 연인과의 사랑 소리를 통화 너머로 들려주며 능욕하던 도미니크에게 카를은 감옥의 창살 너머로 밝게 인사하며 받은 것을 돌려준다. 당한 만큼 그대로 갚는 결과적 평등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졌던 평등하게 큰 마음을 고백하게 만든다.

<세 가지 색: 화이트> - 무채색의 세계로 다녀온 다음 날 아침

그들이 평등했던 두 번째 순간도 둘의 사랑의 순간이다. 페이드 아웃에 이어 다시 그 자리로 페이드 인 되는 방식은 <세 가지 색: 블루>에서는 시간의 정지로 많은 생각 속에 시간이 멈춘 줄리를 나타내었지만, <세 가지 색: 화이트>에서는 평등의 색이 활용되며 의미가 추가되었다. 죽음을 위장해 폴란드에서 다시 만난 카를과 도미니크는 정말 오랜만에 함께 밤을 보낸다. 가장 극적이고 행복한 순간에서 그들의 화면은 백색으로 페이드 아웃된다. 복잡한 결과적 평등을 벗어나, 서로 사랑하는 순간에 가지는 행복의 평등을 보여준다.


<세 가지 색: 레드> - 발렌틴이 촬영한 붉은 화보

레드는 연대의 색이다. <세 가지 색: 레드>는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쉽게 깨어지는 허약한 것인지와 어떻게 우연 속에 다시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발렌틴은 장거리 연애 중임에도 남자친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의 과한 집착과 의심에 갇혀 있다. 매일 밤 남자친구의 통화는 정말 혼자 있었는지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우연히 차로 친 개의 주인으로 만난 노인은, 관계의 덧없음을 느낀 뒤 홀로 살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내렸던 판결들에 회의감이 들어 판사를 은퇴한 그는 이웃의 통화를 도청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관계에서 위기를 겪으며 연대에서 멀어지는 주인공들은 모두 연대의 색 속에 살아간다. 발렌틴의 모습이 가장 강조되는 화보의 배경은 붉은색이다.

젊은 법관 오귀스트는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에 계속 배경으로 지나간다. 노인이 도청하고 있는 개인 기상 예보관의 연인이며, 발렌틴의 화보를 보고 밝게 웃거나 발렌틴이 들으려던 음반을 먼저 구매하기도 한다. 그는 법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노인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펼쳐진 책에서 답을 보게 되어 시험에 합격한다. 붉은색 넥타이를 즐겨 착용하고 붉은 차를 모는 오귀스트 역시 합격 이후 관계의 위기에 부딪힌다.

<세 가지 색: 레드> - 기억을 공유하는 노인과 발렌틴

분리되어 있던 그들이 연대하게 되는 것은 우연으로 만난 뒤 슬픈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면서부터이다. 노인은 자신의 연인과 바람이 난 남자를 수년 뒤에 만나서, 그에게 판결을 내렸던 경험을 발렌틴에게 공유한다. 수년간 이웃을 도청하며 즐겼던 방식도 발렌틴과의 대화 뒤에 회의감이 들어 이웃에게 진실을 털어놓기도 한다. 배경으로만 지나가던 오귀스트가 이야기에 들어온 것은 이별을 통해서이다. 노인과 같은 방식으로 연인에게 육체적으로 배신당한 오귀스트의 모습은 노인과 겹쳐지며 영화 상에서 둘을 연결한다. 아직 발렌틴의 이야기는 공유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처음 만난 오귀스트와 서로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그와 이어질 것이다. 그들은 각각 교통사고와 선박 침몰이라는 우연한 사고 속에 만나며, 그 이전에는 서로 어떤 대화조차 하지 않았지만 우연이 만들어진 상황 속에 서로 간의 연대로 이어진다.


<세 가지 색: 레드> - 침몰한 페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발렌틴과 오귀스트

그리고 그 연대는 모두를 연결한다. 노인의 추천으로 발렌틴이 탑승한 붉은색의 페리는 영국으로 가던 중 침몰한다. 생존자는 단 7명으로, 각 영화 마지막에 이어지는 세 쌍, <세 가지 색: 블루>의 줄리와 올리비에, <세 가지 색: 화이트>의 카를과 도미니크, <세 가지 색: 레드>의 발렌틴과 오귀스트, 그리고 <세 가지 색: 화이트>에서 카를이 한 차례 삶의 기회를 준 니콜라이이다. 영화를 넘어 우연 속에 맺은 연대의 힘과 함께, 죽은 다른 탑승객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 떠오르지 않는 것에서 연대의 한계도 느끼게 된다.


<세 가지 색: 블루> -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는 할머니

관계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전개와 관계를 어떻게든 연결하며 자유, 평등, 연대를 실현하는 결말을 가지지만, 그 방식은 조금 다르다. 이는 세 영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공병을 쓰레기통에 넣으려는 허리 굽은 할머니에 대한 세 반응에서 단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세 가지 색: 블루>의 줄리는 울타리 너머로 슬프고 애처롭게 바라보기만 한다. 자신이 책임을 가진 일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그녀는 행동하기보다는 방관하고, 몇 안 되는 행동도 도피를 위한 것이다. 자유를 얻게 된 일도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닌 남편의 바람을 통해서이다. <세 가지 색: 화이트>의 카를은 자신의 슬픔이 우선이기에 자신보다 더 부정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비웃기 바쁘다. 카를에게 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도 이유이지만, 누구 하나 나를 도와주지 않는 프랑스에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도울 필요 없다는 결과의 평등도 반영된 것이다.

<세 가지 색: 레드>의 발렌틴은 달려가 할머니를 도와 공병을 넣는다. 연대의 익숙한 오역인 박애를 떠올리게 만드는 행동이면서, 영화 내내 사람에 대한 사랑 속에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발렌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구속하는 남자친구에게도 항변하기보다는 그에게 빨리 가고자 하고, 닫혀 있던 판사의 마음도 대화 속에 열어놓는다. 페리가 침몰한 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고이지만, 페리에 탑승하도록 결정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유일하게 행동하여 도달한 결말로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는 것은 행동하는 연대임을 보여준다.


영화 속 자유, 평등, 연대는 결말에서의 실현까지도 온전히 긍정적으로 그려지기보다는 부족한 부분까지 부각되어 그려진다. 이는 자유, 평등, 연대가 적용되는 일상 속 사람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을 힘들게 만든 것도 관계이지만, 삶을 개선한 것도 관계이다. 불완전하더라도 관계에 참여하며 다른 사람들과 이전보다 나은 연대 속에 자유와 평등을 찾으며 살아가야 할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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