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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Apr 26. 2022

리처드 커티스와 무대

노팅 힐,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타임

연극은 영화의 기원 중 하나에 해당한다. 최초의 영화들 중 일부는 연극의 이야기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편집이라는 영화 고유의 도구를 활용하게 되어 별도의 장르로 구분되었지만, 용어나 방식에 있어 연극의 영향이 남아있다. 또한 <드라이브 마이 카>나 <버드맨>처럼 연극과 무대를 영화의 소재로 활용하거나 다시 연극적 특성을 살리는 영화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리처드 커티스는 미스터 빈과의 협업으로 널리 알려진 뒤, 영화에서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명작들을 남겼다. 낯선 사람과 만나 마음을 주고, 작은 갈등을 겪지만 이를 극복해 더 깊은 마음으로 이어지는 공식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연인 간의 사랑을 넘어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등 주제를 확장시켰다. 또한 마음을 전하는 일종의 무대를 작품 내에 등장시켜 연극적인 효과와 함께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을 만든다.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와 같은 <노팅 힐>(1999)부터, 그가 직접 연출까지 맡은 <러브 액츄얼리>(2003), <어바웃 타임>(2013)에서 그런 무대가 나타난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영화는 연극에 비해 전달해줄 수 있는 영역이 많다. 같은 인물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때에도 연극은 관객 방향에서의 한 측면으로만 바라볼 수 있지만 영화는 원한다면 그 인물 본인의 시점, 그 인물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점 등 여러 가지 방향으로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세 영화의 마음을 전하는 무대에서는 반대로 관객에서 전달되는 요소를 제한하여 표현되는 일부에 집중하게 만든다.

<러브 액츄얼리> - Enough

<어바웃 타임>의 팀과 메리는 어둠 속에서 함께 식사하며 처음으로 만난다. 어두워진 화면 속에 나타나는 것은 두 사람의 대화와 식사를 위한 작은 소음뿐이다. 낯선 사람을 인식하기 위한 거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여 오히려 서로에게 깊게 빠져들게 된다. <러브 액츄얼리>의 스케치북 고백 장면에서는 대화를 제한한다. 마크가 직접 틀어놓은 캐럴 속에, 아껴놓았던 고백의 말이 한 장씩 넘어간다. <어바웃 타임>의 장면과 반대로 대화 대신 글로 전달한 마음과 이에 대한 줄리엣의 반응만으로 그 마음의 깊이를 전해준다.


무대에는 분명하게 관객이 존재한다. 바라보는 시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그 반응을 극의 일부로 활용할 수 있다. 세 영화에는 청중이 직접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리에서 진실된 마음을 고백하는 무대가 등장한다. 장면 이전까지 흔들렸거나 명백히 표현되지 않았던 마음도 여러 사람 앞에서 선포하는 과정에서 관객과 의도했던 대상 모두에게 깊게 전달된다.

<노팅 힐> - 그 남자분과 친구 이상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신가요?

<노팅 힐>의 연인은 넘을 벽이 많다. 평범한 사람과 유명한 배우는 비록 우연을 통해 만나 마음까지 통했더라도 분명히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그 벽을 넘어서게 만든 것이 기자회견 장면이다. 이전까지 소극적이고 상처받은 태도를 보이던 윌리엄은 애나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기 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전한다. 막연한 질문에는 거절을 표시하던 애나도 그가 공개적으로 스스로 저지른 실수까지 고백하며 사과하자 함께 영원히 머물기로 결정한다.

<어바웃 타임> - 제 아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어바웃 타임>에서 가장 깊게 표현되는 것은 팀과 팀의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가문에 걸쳐 내려오는 능력을 설명하고, 같이 탁구를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영화의 초반부터 둘의 깊은 애정이 표현된다. 가장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아버지는 팀의 결혼식 축사에서 축하와 자신의 깊은 사랑을 함께 전한다. 농담을 섞어 시작한 축사는 상냥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라는 조언에 이어, 아들에 대한 자부심 섞인 사랑을 진실하게 표현하며 마무리된다. 시간을 되돌려가며 수없이 반복하여 완성했을 축사는, 화려하고 행복했던 결혼식을 담백하고도 아름답게 장식한다.

<러브 액츄얼리> -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 직전을 배경으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보여준다. 교차되는 여러 이야기 속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이는 영국의 총리이다. 그 직업으로 인해 사적인 사랑도 본의 아니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공개한다. 또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사랑인 나라에 대한 사랑도 그가 대표하여 표현한다. 미국 대통령과 관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총리는 회담 내외적으로 압도당한다. 하지만 회담을 마친 뒤 갈등을 슬쩍 뒤로 치우려는 대통령과 다르게, 총리는 위협하는 자는 친구가 아니라며 영국의 위대함을 연설한다. 현실에서 하지 못할 말을 과장해서 오글거리게 보여준 측면도 있지만, 전쟁 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 쉽게 소외되는 사랑을 기억에 남게 표현한 장면이기도 하다.


극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대사와 행동도 중요하지만,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기자회견 장면들과 축사 장면 모두 말을 마친 뒤 환호와 박수로 멈추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대신 다른 장면에서, 삶이라는 무대로부터의 퇴장을 그려낸다.

<러브 액츄얼리> - Bay City Rollers, Bye Bye Baby

<러브 액츄얼리>의 시작은 줄리엣과 피터의 결혼식이지만, 뒤이어 대니얼의 아내 장례식을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까지 상대방에게 농담을 건네던 그녀와의 대화를 공유하며, 대니얼은 아내가 즐겨 듣던 노래를 튼다. 부질없는 이별을 이야기하는 노래의 비관적인 가사와 차분하면서 즐거운 멜로디는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떠나간 사람의 따뜻한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바웃 타임> - 잠깐 산책 좀 했으면 좋겠다.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가문 남자들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지만, 명백한 제약이 존재한다. 과거로 돌아가 어떤 요소를 건드리면 그 나비 효과로 자신이 알고 있던 현재가 변화할 수도 있다. 팀의 아버지는 아들과 딸이 준 행복한 기억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죽음을 미루지 않고 수용한다. 대신 정말 마지막이 되기 전 어린 시절의 아들과 함께 해변을 걸으며 죽기 직전까지 기억해둘 장면을 정한다. 사랑의 순간을 깊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이기에 그 반대이자 같은 방향의 극단인 죽음도 잘 보여준다.


인물들이 차례로 무대에서 내려오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동시에 애나의 임신, 히스로 공항으로의 도착, 시간여행 없이 살아가기로 한 팀의 결심 등 인물들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마무리와 함께 시작을 전하는 결말은 무대가 막을 내린 뒤 다음 날에 다시 다른 극이 상영되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새 등장인물과 새 배경으로 이야기가 반복될 것이다. 때문에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도 감상에 머물러있지 않고 스스로 다음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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