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환상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 레이니 데이 인 뉴욕

by 돌고래

타지로 방문한 도시는 현실에서 벗어난 느낌을 준다. 사는 모습이 전혀 다른 공간은 기존에 살던 곳의 특징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서, 자신이 가진 고유의 모습을 찾게 된다. 그래서 여행 중 만난 낯선 이에게 오히려 평소보다 더 솔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디 앨런 영화의 주인공은 낯선 도시로 향하여 그 도시를 방황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로마 위드 러브>(2012),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20) 세 영화는 제목까지 그 도시를 다루며 인물이 방황하는 배경에 집중한다. 주인공들은 외지인으로 참여하여 달라진 환경 속에서, 도시가 주는 환상에 빠져든다. 낯선 공간이 주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사랑도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길.jpg <미드나잇 인 파리> - 결혼 준비 대신 LP를 발견하고 들뜬 길

인물들은 낭만을 그리며 현실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길은 약혼한 이네즈와 달리 과거의 빛나던 시대를 쫓으며 꿈꾸는 소설가이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개츠비는 평범함과 고귀함 모두 경계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대신 카드 게임으로 돈을 벌고, 옛 흑백 영화를 즐기며 사람이 없는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로마 위드 러브>의 모든 인물들은 잠시 본업을 쉬고 있는 상태로,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한 발 떨어져 그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에 참여한다.


파리.PNG <미드나잇 인 파리> - 과거로 향하는 길, 옆과 뒤에 피츠제럴드 부부가 있다

각 도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환상을 제공해준다. 파리의 한 골목에서 울리는 자정의 시계 소리는 길이 항상 향하고자 했던 과거로 가게 만들어준다. 매일 밤 길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세속적인 주변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달리 등 옛 예술가들과 만난다. 파리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며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화가와 작가들이 한 번쯤 거쳐간 곳이다. 과거를 지향하는 길에게 예술의 도시는 그가 그리던 시대를 향한 문을 열었고, 1920년대의 파리에서 길은 자신이 가졌던 환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다. 점차 황금시대에 머무는 것을 더욱 즐기며 현실보다 자정 이후의 환상에 집중하게 된다.

ashleigh.jpg <레이니 데이 인 뉴욕> - 좋아하던 영화감독의 신작 상영회

뉴욕은 개츠비의 연인 애슐리에게 환상적이면서도 불꽃같은 하루를 만들어준다. 학교 신문 취재를 위해 롤란 폴란드 감독을 인터뷰하던 애슐리는 그와 함께 새로운 작품을 감상하고, 작품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방황하는 감독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좋아하는 작가와 배우들을 만나고 배우의 연인 역할도 하며 스타의 기분을 누리기도 한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뉴욕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번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에서도 공원과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는 도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애슐리가 예술가들과 복잡하게 얽히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이, 그 이면의 여유를 그녀에게 소개해주려던 개츠비는 대신 홀로 도시를 거닐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게 된다.

모니카.jpg <로마 위드 러브> - 건축가 잭과 배우 모니카의 밀회

<로마 위드 러브>의 환상은 로마를 거쳐가는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도시가 가진 구체적인 요소를 비추는 대신, 오랜 시간이 혼재되어 있는 로마의 특징을 반영하여 시간의 흐름이 다른 네 가지 이야기가 섞여 진행된다. 안토니오와 밀리가 겪는 소동의 시간은 하루지만, 다른 인물들은 몇 주 동안, 혹은 한 달 넘게 로마에서 지내며 환상에 머무른다. 안토니오와 밀리, 잭과 샐리 커플은 낯선 이성을 운명 혹은 기회로 받아들이는 환상에 빠진다. 그들은 새로운 인물과 시간을 보내며 더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두 이야기에는 모두 배우가 관련되는데, 이는 그런 관계는 누군가의 연기이자 한 순간이라는 점을 계속 상기시킨다.

레오폴도피사넬로.jpg <로마 위드 러브> - 시사회에 초대받은 레오폴도 피사넬로

다른 두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이 바라는 보편적인 환상인, 특별한 사람이 되는 꿈을 다룬다. 지안카를로는 성악을 매우 좋아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취미로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은 샤워실에서 온전히 발휘되었으며, 그를 위해 설치된 오페라 무대의 샤워 부스에서 그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 레오폴도 피사넬로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가진 평범함으로 인해 주목을 받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아침 식사를 무엇으로 먹었는지 등 일상의 모든 요소가 주목받고, 모든 사생활이 공유되며, 무수한 이성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romewithlove.PNG <로마 위드 러브> - 열창하는 샤워실의 성악가

하지만 모든 환상에는 끝이 있고, 여행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 위드 러브>는 가장 많은 소동이 벌어지지만 거의 모든 일이 본 모습 그대로 돌아온다. 안토니오와 밀리는 다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잭과 샐리 사이에 침범했던 모니카는 되돌아간다. 레오폴도에게 향하던 기이한 관심도 그보다 더 평범한 사람을 발견하며 그로부터 떠나간다. 성공적인 공연 이후 다음 무대가 더 가능했던 샤워실의 성악가조차, 자신이 꿈꿔왔던 공연을 마친 뒤 미련 없이 환상을 마무리짓는다.

raindayinnewryork.PNG <레이니 데이 인 뉴욕> - 오후 6시, 비 오는 날, 센트럴 파크

빗속에서 마무리되는 <미드나잇 인 파리>와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환상은 인물들이 기존에 머물고 있던 세계가 가진 허상과 함께 깨지며 새로운 만남으로 채워진다. 황금시대를 쫓던 길은 자신의 황금시대 1920년대에 사는 아리아드네가 더 이전 시대를 꿈꾸는 것을 보고 과거만 쫓는 일을 멈춘다. 다시 울리는 자정의 시계 소리는 이제 환상으로의 출발이 아닌 환상의 종료를 알리게 된다.

개츠비는 애슐리와 떨어져 하루를 보내며 애슐리와의 관계도, 자신이 살아오던 삶도 하나의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오후 6시의 시계가 울렸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자신의 이상이 담긴 곳에 서 있는다. 시계 소리가 멈췄을 때 길과 개츠비는 낭만을 공유할 수 있는 새 연인을 만나며, 환상보다 더 행복한 현실에 도달한다.


자정.PNG <미드나잇 인 파리> - 자정, 비 오는 날, 센 강

낯선 곳에서 마주한 환상에는 끝이 있고, 방황 이후에는 돌아갈 길만 남는다. 길과 개츠비에게는 꿈에 맞는 새로운 도시에 머무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방황과 이주가 선택지에 있는 예술가들이다. 애석하게도 현재나 미래나 내 직업은 그와 거리가 멀며 머물러 있는 게 일이고 <로마 위드 러브>의 인물들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결말이다.

그러나 낯선 도시에서 돌아와야 다음 출발이 가능하기에, 또한 새로운 장소에 가야 그런 일탈과 만남도 경험해볼 수 있기에, 여러모로 갇혀 있는 지금으로서는 인물들이 방문하는 도시와 도시가 주는 환상 모두 부러웠다. 영화를 통해, 그들처럼 낯선 공간이 주는 환상 속에 잠시라도 빠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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