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정리를 합시다
다음은 제가 어린 학생이던 시절, 어느 신문 사설란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공중전화가 있던 시절, 한국에서 온 한 남자가 줄 서서 기다리는데, 차례차례 줄이 줄어들고 마침내 그의 바로 앞 아가씨가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백인 여자가 통화를 길게 하며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남자는 급히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마음이 바빴습니다. 결국 남자는 참지 못하고, 부스 문을 열고, 아가씨의 어깨를 콕콕 손가락으로 건드립니다. 다음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한국이었다면, 매우 무안해하면서 여자는 전화를 후다닥 끊고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미국인 아가씨는 감히 '프라이버시 선'을 뚫고 들어 와, '자신의 몸의 선'까지 넘은 이 '개념 없는 무례한'에게 화가 나서 말 그대로 'dog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네가 뭔데 감히 이런 짓을 하냐고, 경찰에 신고감이라고...'
남자는 한국의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여느 다른 성질 급한 아저씨들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모욕적인 말로 비난한 것도 아니고, 정말 신사답게 전화부스 문을 살짝 열고, 콕콕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세상 젠틀한 신호를 주었을 뿐이었는데, 여자의 격렬한 반응에 매우 당황을 했다고 합니다.
타국에서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뭔가 이곳은 내가 익숙한 것과 다른 '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주눅이 들어 혹시나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선'을 밟게 될까 봐 조심조심 살아가게 됩니다.
저도 미국 와서 이런 '내가 몰랐던 선'을 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미국 유학 생활 초기 대학원을 함께 다니면서 친해진 미국인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실수 1: 같은 동네에 살아 같이 카풀하고 다니면서 단짝처럼 지내던 백인 여학생. 이 여학생이 항상 화장을 안 하다가 어느 파티에 스모키 화장을 하고 왔길래,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름 칭찬의 의미로, "너 화장하니까 너무너무 예쁘다. 평소에도 이렇게 화장하고 다녀라." (한국에서 친구들과 흔히 주고받던 말)라고 말했는데, 분위기 급. 싸... 나중에 제가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고 알게 된 건, 외모에 관한 '평가질'은 칭찬이든 아니든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꼭 말을 해 주어야겠으면, "너 평소에 화장 안 할 때도 예쁘지만, 화장해도 색다른 매력이 있고 좋구나"라고 평소의 민낯을 모욕하는 뉘앙스가 들어가지 않게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 내가 모르던 '선'을 깨닫고 보니, 한국에선 친하고 가까운 관계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외모를 너무 쉽게 모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수 2: 평소 온갖 말 주고받으며 막역하게 지내던 백인 남학생 - 정말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이 자기 주말에 데이트 가는 차림으로 어떠냐며 옷차림을 좀 봐달라고 했어요. 저는 검은 티셔츠에 검은 선글라스를 준비한 그에게 '엄지 척' 날려 주면서, "너 이제 피부만 조금 햇볕에 태워라. 그럼 영화배우가 따로 없다"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으나, 그 남학생은 싸늘해진 표정으로 "넌 인종차별주의 자야"라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미국에선 피부색에 관한 언급, 피부색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이 매우 모욕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 발언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어요. 사실 저도 한국에서 피부색 지적을 받을 때, 그게 그리 기분이 좋은 경험은 아니었으나, 너무 흔하게 그런 말을 듣다 보니 그것에 대한 경각심 자체가 없어져버렸던 것 같아요.
이렇게 사회 문화가 만드는 독특한 '선'에, 각 개인이 만든 다양한 '선'에, 세상은 어느 번잡한 도시의 뒷골목 엉킨 전기선처럼 각종 '선'으로 복잡하고 난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선'을 예민하게 느끼고 잘 파악하는 눈치 빠른 사람은 인간관계를 조심조심 맺어가지만, '선'을 잘 못 보는 둔한 사람은 이리저리 예민한 각종 '선'에 튕기고 마음을 다치며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다고 호소하는 진풍경이 여기저기서 벌어집니다. 그렇다고 남의 '선'을 하나도 안 건드리고 조심조심 살아가는 것만이 능사도 아닙니다. 그렇게 조심하고 벌벌 떨며 살아가는 나에게, 내 '선'을 함부로 침범하고 밟고 들어 오는 인간은 어찌나 많은지 억울한 마음에 화가 쌓여가는 것이 해결이 안 되는 '호구'들도 많습니다.
'선'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믿고 있는 중요한 '선'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중요시하는 '선'이 사람마다 문화마다 나라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고, 서로 중요시하는 '선'이 너무 다르고 이해하기 힘들면 함께 어울리기 힘든 법입니다.
또한 사람은, 어떤 '선'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야 할지, 어떤 '선'이 중요한지 살아가며 수시로 바꾸기도 합니다. 전에 중요시하던 '선'을 버리고, 자신에게 다른 종류의 '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많은 노'선' 변화를 지나왔습니다. 그중에서는 제가 자각하는 것도 있고, 자각하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제가 자각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도, 미국에 와서 버린 '선'과 새롭게 장착한 '선', '선' 변화의 폭이 상당했어요.
연령이 낮은 사람이 넘지 말아야 할 연장자의 '선'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먹으면 안 된다 같은 '선'들.)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바뀜. 후배와 동생들에겐 인기가 많으나, 선배와 언니들과는 잘 못 어울리는 근본 이유.
사회적 계급이 낮은 사람이 넘지 말아야 할 권위자 (상사, 교사, 교수)의 '선' (보다 낮은 자가 높은 자 앞에서 비위 맞추고 배려하고 굽신거려야 할 것 같은 '선'들.) -->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확신하는 쪽으로 바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 (집단을 위해 개인의 '선'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선'들.) - ->집단이 개인을 억압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바뀜.
각종 차별이 만드는 '선' --> 사람을 서열로 분류하는 사람을 내 인생에 허용하지 않음
누구도 내 몸에 내 자유의지와 감정에 대해 함부로 억압할 수도 침범할 수도 하찮게 여길 수 없음. 나는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임.
내 집 또한 나의 사적인 공간이므로, 미리 약속 없이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음.
개인의 '선'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집단은 용납하지 않음.
누군가는, 이 사람 미국에서 '개인주의자' 다 되었네 하실 거예요. 하지만, '개인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저를 묶는 것 또한 저는 용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그런 한 가지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계속 내 필요, 가치관에 따라 변해갈 거라서요. 지금 내가 버린 '선'들과 지키는 '선'들은 나를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강자보다 약자를 우선으로 돌보고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한 저의 가치관입니다. 내가 어떤 '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대로 '선'을 선택할 뿐입니다. 저는 없애고 싶은 '선'은 열심히 침범하고 넘어 다닐 것이고, 지키고 싶은 '선'은 열심히 보호하고 옹호할 것입니다.
너무 저의 '선'만 강조했나요? 당신의 '선'도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넘어야 할 선'과, '넘지 말아야 할 선', '버려야 할 선'과 '지켜야 할 선'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