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머리에 그림이 그려져요

스토리의 힘

by 하트온

시각화 시대, 문학성과 시각적 재미를 동시에 갖춘 '그래픽 노블'의 입지가 커져가는 시대다. 시대적 수요에 따라, 글과 그림, 두 장르 모두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특히 아동들을 위한 '그래픽 노블' 도서들이 아동도서의 '대세 장르'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글자만 있는 책 보다, 그림이 많은 책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만화책'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상현상인 것도 아니다.


미국의 대형 서점 체인 'Barns & Nobles'의 어린이 코너의 '그래픽 노블' 섹션
우리 집 아들들이 좋아하는 '그래픽 노블' 책들


2006-2009년, '그래픽 노블 작가들'이 대거 아동 문학상들을 휩쓸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의 입지를 굳히던 시절, '그래픽 노블 명작들'이 도서관에 쏟아져 들어오던 그 시기에 나는 지역 도서관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 고객들에게 책을 권해주는 일을 기본으로 하는 직업이라, 그 어느 때보다 책을 많이 읽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도서관에 당당히 입관한 따끈따끈한 '그래픽 노블들'을 무척 많이 접했다.


덕분에 나는 '그래픽 노블'의 문학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요즘 아이들이 만화책만 읽으려 한다고 걱정하는 주변의 말들을 귓등으로 흘리고, 아이들이 '그래픽 노블'을 즐겨 읽는 것에 대해 여느 문학책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내버려 두었다.


큰애는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이후부터 그래픽 노블과, 챕터북*을 비슷한 비중으로 함께 읽어왔으므로, 글자 비중이 크거나 전부인 책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스토리적 취향만 맞으면 어떤 책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작은애는 아주 어릴 때부터 큰애가 읽기 시작한 그래픽 노블, 특히 만화 형식으로 된 그림 비중이 큰 책들을 쭉 읽어와서 그런지, 그림이 적거나, 없는 챕터북을 보면 글자가 너무 많다며 - 그림이 제공하는 재미와 도움이 없는 것에 대해 - 부담스러워하곤 했다.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고 즐겨 있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5학년이 된 아이가 읽고 싶은 책의 장르가 '그래픽 노블' 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챕터북(Chapter Book): 만 7-10세,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그림 비중이 적고 글자 위주로 챕터별로 구성된 스토리 책. A chapter book or chapterbook is a story book intended for intermediate readers, generally age 7–10. Unlike picture books for beginning readers, a chapter book tells the story primarily through prose, rather than pictures. https://en.wikipedia.org/wiki/Chapter_book


그래서 내가 직접 아이에게 책을 골라 추천하기 시작했고, 지난여름부터 아이와 함께 앉아서 책을 같이 읽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첫 번째 책은 '위고 카브레 (The Invention of Hugo Cabret)'이라는 '브라이언 셀즈닉 (Brian Selznick)'이 쓴 책이었다. 영화로도 제작된 유명한 스토리인 만큼 아마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책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내가 '도서관 사서'로서 리뷰했던 책들 중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고 아끼게 된 책이어서, 주변 아이들 생일 선물로도 가장 많이 구매했고, 책 읽기에 관심을 잃어가는 도서관 어린이 고객들에게 굉장히 많이 추천했었다.

나는 이 책이, 작은애가 '만화'에서 여러 다른 장르로 영역을 넓혀가는데 디딤돌이 될만한 딱 적당한 책이리라 판단했다. 이 책 또한 그림 비중이 크고 그림이 스토리에 담당하는 역할이 큰 '그래픽 노블'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이 작가가 그림과 글을 매우 남다르게 활용한다는 점이 아이에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좋은 자극과 변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 화면처럼 그림이 쭉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글만 가득한 페이지가 쭉 이어지다가, 그림과 글이 씨줄과 날줄처럼 번갈아 교차하며 스토리의 퍼즐을 맞추어 나간다. 그림책이면서, 챕터북의 성격도 충분히 가진 독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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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 책표지(좌), 그림 일부 (우)


아이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하여, 시작 부분을 내가 읽어준 이후에,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혼자서 나머지 부분을 다 읽어버렸다고 했다. 이 책이 아이에게 준 것들은 다음과 같다.

500페이지가 넘는 '만화 아닌 책', '글자가 상당히 많은 책'을 읽어냈다는 자신감.
프랑스 영화 제작계의 전설,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야기인 이 책을 읽고 영화 제작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조르주 멜리에스' 작품들을 다 찾아보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제작한 영화를 함께 보고, 이 책의 작가가 그린 그림과, 영화 제작자가 이해하고 표현한 그림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조르주 멜리에스 (Georges Méliès)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마술사이자 영화 제작자. 초창기 영화 제작 기술과 장르 발전을 이끈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


다음으로 선택한 책은 켈리 반힐의 '달빛 마신 소녀 (The Girl Who Drank the Moon)'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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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반힐의 '달빛 마신 소녀'(좌)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우)


'달빛 마신 소녀'는 그림은 전혀 없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예쁜 그림을 선명히 그려내는 정말 아름다운 문장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책이다. 옛날 어느 시절 숲 속에 살았던 마녀와 마법 세계, 그리고 어느 마을에 관한 이야기. '드라마 조기종영'같은 느낌의 급작스런 마무리가 살짝 아쉬웠던 것만 빼면 참 좋은 스토리였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는 이야기 속의 메타포들 하나하나 의미가 엄청난 깊고 철학적인 이야기였다.


두 책 모두 아이가 잘 모르는 단어들이 상당히 있어서 아이가 혼자서 읽어갈 만한 몰입감이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하루에 다섯 개씩 단어를 찾아 정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가 다 읽어주어야 했다. '달빛 마신 소녀'는 그림이 전혀 없는 책 - 아이는 이야기를 읽다가 순간순간 책 표지를 유심히 관찰하며 그림에 대한 갈망을 달랬다 -이었고, '어린 왕자'는 귀여운 그림들이 간간이 있어, 아이의 이해를 돕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두 책은 사실 아이에게 딱 맞는 수준의 책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두 책에서도 얻은 것이 있다.

한 달 여 동안 매일 5개의 단어를 찾고, 함께 이야기하고 활용하며 익혔으므로, 어휘가 상당히 늘었다.
'달빛 마신 소녀'를 읽으며 마녀와 마법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관념들에 대해 뒤집어 생각해 보는 신선한 기회를 가졌다.
'어린 왕자'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상상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들에 대해 정말 많이 상상해보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책은 아이가 골랐다. 코로나 전에 아이의 절친이 늘 들고 다니던 '책', 'JK 롤링'의 '해리 포터 (Harry Potter)'였다.

Screen Shot 2020-11-28 at 10.16.33 PM.png JK 롤링의 '해리 포터 (Harry Potter)' 1권 '마법사의 돌'

그때는 '마법'같은 것에도, 그림 없는 챕터북에도, 자긴 관심 없다고 생각해서 친구와 함께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다가, 상황이 달라지니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달빛 마신 소녀'를 읽어낸 뒤라, '마법'이 더 이상 생소한 주제가 아니었으며, 그동안의 노력으로 어휘력에도 자신감이 붙은 터라, 절친이 좋아하는 책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스토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처음 몇 페이지는 엄마 등 뒤에서 엄마가 읽어주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느 날 아침, 1층에 내려와 보니 아이는 일찌감치 일어나 거실 창가에 혼자 앉아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내가 오는 기척을 듣고 아이가 일어나 다가와 품에 안기며 말했다.


엄마, 머리에 그림이 막 그려져요! 책에 그림이 없는데도 그림이 보여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가 얼마나 귀엽던지! 나는 꼭 안아주며 말해주었다.


그게 스토리의 힘이란다! 그림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만, 그림이 없어도 스토리 혼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리고 좋은 스토리일수록 그 그림이 생생하고 선명하단다.

아이는 '이제 어떤 책도 혼자 읽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 가득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진 출처: https://www.amaz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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