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마음을 끈 로맨틱 스토리 [빨강머리 앤, Anne with E]
저에게 '빨강머리 앤'은 어려웠던 시절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 같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처음으로 '심쿵'을 경험하게 해 준, '최초의 로맨틱 스토리' 이기도 합니다.
최근 '넷플릭스'에 '빨강머리 앤'을 원작으로 각색한 캐나다 드라마 'Anne with E'가 올라와서, 아들과 함께 세 번이나 돌려보았습니다. 여전히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항상 다음이 궁금한 흥미진진한 스토리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금 깨달았어요. 제가 어릴 때 왜 그렇게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좋아했었는지. 나쁜 경험과 트라우마도 많은 아이가 스스로 이겨내려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이겨내 가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매튜', '마릴라'와 가족을 이루어 가는 모습에서 큰 위안을 느꼈었다는 걸요. '앤'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데려와서 그들의 라스트 네임을 정식으로 붙여주는 대목에서 '앤'이 그토록 갈구했던 '소속감'을 마침내 충분히 맛보며 많이 감동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함께 오열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소녀였던 제가, '빨강머리 앤'에서 심쿵했던 포인트는 바로 '앤의 성장을 지켜보는 변치 않는 길버트의 마음'이었습니다.
'길버트'는 '앤'을 만나자마자 관심이 생겼습니다. 계속 말을 걸어 보고 싶은데 '앤'이 봐주지 않자 - 그 시기엔 이성에 대한 거부감도 크고, 고아 출신 '앤'을 '쓰레기' 취급하는 편견을 가진 아이들이 태반인 학교에서 '앤'은 인기 많은 '길버트'의 관심을 '호감'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길버트'는 결국 '앤'의 최대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맙니다. '앤'이 평소에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그녀 자신의 외모, 그중에서도 가장 바꾸고 싶은 부위 1순위인 '빨간 머리' 끝을 잡고 흔들며 "당근! 당근! (Carrots! Carrots!)"이라고 외치고 만 것입니다.
'앤'은 자신의 가장 치부에 대해 놀림당했다는 생각에,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 못 하고,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려치고 맙니다. 안 그래도 수치심의 자극을 심하게 받은 상황인데, '앤'이 못마땅한 교사는 '앤'을 칠판 앞에 세우고 "앤 셜리는 성질이 매우 나쁩니다. 앤 셜리는 분노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Ann Shirley has a very bad temper. Ann Shirley must learn to control her temper"라고 칠판에 써서 크게 읽고, 그 앞에 한나절 내내 세워 공개 망신을 줌으로써 '앤'의 수치심을 극한으로 몰고 갑니다.
'길버트'는 그 날 방과 후 곧바로 "머리카락에 대해 놀려서 정말 미안해, 앤. I'm awfully sorry I made fun of your hair, Anne, "이라고 사과하지만, '앤'은 그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인기 많고 멋진 '길버트'가 그렇게 진심으로 사과하는데 받아주지 않는 '앤'이 안타까운 '앤'의 절친, '다이앤'이 어떻게 그의 사과를 안 받아줄 수 있냐고 한 마디 하지만, '앤'은 "난 절대 길버트 블라이드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I shall never forgive Gilbert Blythe"라고 굳게 선언할 뿐입니다. '앤'이 스스로를 수용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타인에 대한 신뢰가 생길 때까지, 제 안의 '수치심'을 다룰 수 있게 될 때까지 '앤'은 '길버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앤'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소녀였고, '길버트'는 '앤'에게 많은 시간을 주며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고아원과 '앤'을 하녀처럼 부리는 집들을 전전하다, 이제 막 가족이 생긴 상황에서, 그녀는 적응하고, 변화하고, 성장해가야 했어요. 저는 '길버트'의 조급하지 않은 사랑이 참 좋았습니다. 내가 관심 있으니, 내가 좋아하고 있으니 받아달라고 알아달라고 부담을 주지 않아서 좋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줄 만한, 아니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예쁜 아가씨들이 주변에 많이 있음에도, 앤에 대한 마음만을 키워가는, 한 방향으로만 직진하는 '길버트'의 순정적 태도가 너무나 듬직했습니다.
'길버트'는 '앤'의 재능을 인정하고, '앤'이 학업적으로도 커리어적으로도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길버트'는 언제나 인기 모범생이었고, 그가 탁월하게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앤'이 '길버트'에 지지 않는 학업 실력을 점점 드러내자 몇몇은 '길버트'를 응원한답시고, '길버트' 앞에서 '앤'에 대해 비뚤어진 심보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을 부추기는 '녀석들'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앤'의 재능을 높이 사고, 존중하며, 그녀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앤'은 시간이 지나면서 '길버트'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눈을 뜨게 되고, 어린 시절 품었던 분노와 원망은 점점 사라집니다.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탁월한 실력의 두 사람은 점점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각자의 학업과 미래의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뿐입니다. '앤'도 '길버트'도 열심히 노력하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응원할 뿐입니다.
'앤'은 진정한 가족이 생기고, 진정한 친구들이 생기고,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자신에 대해 자신감도 생기고, 고아가 되면서 심히 손상되었던 정체성과 자아상도 회복합니다.
'애번리'에서의 자신의 삶 모든 과정에 '길버트'가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길버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길버트'의 마음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던 길에서 돌아서서 서로를 찾아 끌어안고 키스하는 장면을 끝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Anne with E' 시즌 3은 막이 내립니다. 어린이 책 ' 빨강머리 앤'은 두 사람이 완전히 화해하고 같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마릴라'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이 났던 걸로 기억합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동화 '빨강 머리 앤'과 글 분위기가 너무 다를까 봐 원작 소설은 감히 펼치지 못했었는데,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나니, 원작 소설을 읽어볼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이후의 수위 높은 로맨틱 스토리가 너무 궁금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인공 '앤'의 굴곡진 삶과 성장 과정이 '빨강머리 앤'이라는 스토리를 결핍과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성장과 치유' 스토리로 만든 결정적인 요소였다면, 항상 '앤' 가까이에서 '앤'의 성장을 지켜보고, 함께 성장하고 경쟁하며, '앤'과 함께 '앤의 꿈과 바람'까지도 끌어안은 '길버트'는 이 스토리를 무척이나 로맨틱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 그 '소녀'의 '심쿵' 순간을 되살려 주는 '빨강머리 앤'은, 저의 '최초의 로맨틱 스토리'로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넷플릭스에 'Anne with E' 시리즈가 시즌 3까지 올라와 있는데, 시즌 4를 계획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계획을 바꾸어 시즌 3에서 급히 마무리된 느낌이 있어, 저를 비롯한 많은 드라마 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발 시즌 4가 조만간 나와 주기를, 이제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앤'과 '길버트'의 연애 스토리를 제대로 보여주기를, 지난 시즌에서 시작된 인상 깊은 주변 인물들의 스토리들을 계속 이어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