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찢고 나와 주인공이 서야 할 빛 가운데
[만나자. 어디야 지금? 일단 전화 줘. 010-3425-****]
문자를 보내고 1분도 지나지 않아 김종희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는 그녀의 답장에 심장에 쿵 진동까지 느낀 데 반해,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친구나 후배를 대하는 매우 편안하고 짧은 말투다. 10여 년 전에 알았던 김종희는 나이 어린 후배한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하던 소녀 같은 여자였었는데. 지금은 어딘지 말투에서조차 여사장. 여전사 같은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그녀는 어떤 삶을 지나온 것일까.
[저는 인도 뭄바이에 있어요 지금. 30분 후에 전화 통화 가능해요?]
[그래. 30분 후]
이렇게 빨리 답장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잠시 시간을 좀 벌어야 했다. 지난번 남편이 먹고 반쯤 남은 소주를 가져와, 소주잔 한 잔 정도의 양을 컵에 따라 들이켰다. 열이 살짝 오르면서 머릿속 나사 하나가 살짝 풀리는 느낌까지는 좋았는데, 할 말을 생각하려는데 머릿속이 하얘진 걸 깨닫곤 술을 마신 걸 금방 후회한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리는데, 그녀가 전화기를 손에 쥐고 기다렸다는 듯 금방 받는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그지?"
"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녀가 예전에 높임말을 할 땐 몰랐는데, 반말을 하니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강하게 묻어난다.
"인도라고 했지? 너 있는 곳. 너 뭐하니 요새? 일 하니? 결혼은 했어?... 아하하 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물어본다 그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삶은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글을 쓰고 있어요. 결혼도 했구요."
"작가님이구나. 혹시 00 잡지에 연재하는 소설, 혹시 네 소설 아이가?"
"네."
"작가 이름이 '이은수'라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 맞네! 그 소설 참 좋던데, 어디하고 출판 계약했어?"
출판 계약은커녕 아마 그 잡지에 연재도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 잡지 에디터는 남규식의 입김이 닿는 인맥이다. 김종희에게 어디까지 말을 할지 나는 잠시 망설인다.
"출판 제안 아직 못 받았어요. 투고도 안 해봤고. 연재는 끝까지 못할 거예요 아마."
"무슨 일 있어?"
"남규식..."
나는 그 이름 석자를 언급하고 말을 끝맺지 못한다. 지금까지 생판 남으로 살아왔던 그녀에게 지금까지 그와 엮여 있었던 이야기를 전화로 다 꺼내려는 게 마치 진짜 코끼리를 냉장고 안에 넣으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가당찮은 느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야 안 되겠다. 우리 만나자. 내가 인도로 가야 되나? 아님 네가 나올래?"
남규식 이름 세 글자가 만들어 낸 무거운 정적을 그녀가 깨고 나온다.
그녀가 인도로 오게 되면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겠지만, 그녀가 머무르는 몇 날 며칠 동안 생판 모르는 남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으로 가면 몇 시간 만나고 헤어지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인도를 오가는 시간과 비용과 체력이 들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가족과 의논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가족이 있는 게 이럴 때 무척 편하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불편한 것도 많지만, 시간을 벌어야 하거나 거절을 해야 할 때 가족은 방패막이가 되기도 한다. 남편이 안된다고 해서요. 애가 아파서요... 무궁무진한 그럴듯한 핑계 리스트를 만들어 준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가 한국엘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 들러서 책도 좀 사고, 인도에서 아쉬웠던 한국 물건들도 좀 사 오자 싶었다. 특히 유리가 한국산 생리대와 화장품, 목욕용품을 너무나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 제품이 최고인 줄 진작 몰라봤다며, 지금까지 당연히 있는 건 줄 알고 감사해하지 않아서 미안했다며 혼자 독백 기도를 하는 지경이다.
남편은 요즘 승진을 해서 기분이 한결 나아 보인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남편의 눈빛이 금세 날카로워진다. 언제나 예상되는 그의 생각은 뻔하다. 내가 한국에 갔다 오겠다고 한 순간, 내가 남규식과 만나는 장면이 떠올랐을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놈?"
"남규식은 앞으로 결코 볼 일 없고, 김종희라는 대학 선배 언니를 만나기로 했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더 이상 나 속여먹을 생각 하지 마."
"하...."
"너 한숨 쉴 자격 없어. 내가 널 못 믿게 된 건 자업자득이야. 누가 사람 속이고 살래?"
너무 많이 속임을 당하면 사람이 저렇게 된다. 간첩질 라이프의 결과고, 자업자득이란 말 들어도 싸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당신이 이럴 만도 해. 그래도, 난 이 선배 언니를 꼭 만나야 돼. 유리는 내가 데리고 갈 거니까. 당신만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잘 지내면 돼."
"유리를 데려간다고?"
내가 유리를 데리고 한국에 가겠다는 생각일 줄 전혀 몰랐다는 듯,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유리가 그러려고 할까."
"우린 이야기 다 끝났어. 유리는 가고 싶어 해. 한국 물건 사 오고 싶어 하는 것도 엄청 많아."
남편은 더 이상 내가 한국에 다녀오겠다는 생각에 토를 달지 않는다. 다만, 유리까지 데려간다는 생각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한지, 오늘따라 많이 주워 먹은 소처럼 앉아 눈만 꿈벅거린다.
그의 반응을 허락이라 여기는 나는 곧장 이층 유리방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해 보인다. 유리가 곧장 전화기를 들고 문자를 하는 폼이 아난트에게 연락을 하려는 모양이다. 선생님에게 학생의 부재를 알려야 하는 법이니까.
곧이어 내 전화기에 아난트로부터 문자가 들어온다.
[정말 한국에 다니러 가는 거예요?]
유리의 짧은 영어 사이사이에 빠진 내용을 더 소상히 알고 싶어 할 그의 호기심을 예상하고 있었다.
[응. 김종희를 만나기로 했어.]
[연락이 됐군요? 와우! 연락하자마자 한국에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결정을 하다니, 결단력이 대단한데요!]
[내가 안 가면 그 사람이 날 만나러 인도로 온다고 해서... 그것보단 내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와. 갑자기 한국을 간다니... 너무 놀라워서요. 안 되겠다. 나도 가야겠다. 나도 갈래요, 한국!]
[뭐?]
"꺄!.... 아난트 선생님이 우리하고 같이 한국 간대요. 내 친구들이 아난트 쌤 보면 완전 부러워 죽을 거야!"
유리의 신난 비명소리에, 아난트가 동시에 두 여자와 문자 대화를 할 수 있는 멀티태스크형 인물임을 새삼 깨닫는다. 혼자서 날 따라다닐 각오를 하고 있던 유리가 아난트가 같이 간다는 말에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난리다.
이젠 내가 심히 배부른 소처럼 앉아 눈만 꿈벅거리고 있다.
이런저런 의논 끝에 아난트가 우리 비행기표를 책임지고, 나는 서울 집에서 그의 숙식을 책임져 주기로 합의가 되었다. 덕분에 한국에서 쓸 수 있는 비용에 여유가 더 생긴 셈이다. 아난트가 1등석으로 준비한다는 걸, 겨우 말려 비즈니스석에서 합의를 보았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머물게 될 조그만 아파트를 생각하면, 이 비즈니스석을 타고 가는 것도 미안해 죽을 지경이다. 어찌 됐건, 이코노미석이 아닌 비즈니스석에 오르는 기분은 잠시 인생이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비즈니스석은 이렇게 생겼구나. 엄마는 타본 적 있어요?"
"나도 비즈니스석은 첨이야. 드라마에서 본 적은 있지만."
유리와 나는 갓 상경한 시골 사람들처럼 두리번거리며 승무원이 안내하는 대로 가서 자리에 앉는다. 그나마 비행기가 한국 비행기고 승무원도 한국인들이라, 낯선 느낌이 좀 들하다. 아난트는 익숙하다는 듯 제 자리를 금방 찾아 털썩 앉는다. 우리와 한국 가는 게 그리 신난 지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질 안는다. 아난트를 본 여승무원들의 눈빛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화사한 꽃미남이 레이다망에 잡힌 신호가 뜬다. 금세 비즈니스석에 앉은 여자들 모두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마는 그. 역시 인도 이민호다. 한국에 가서도 시선을 좀 누리겠는데 싶어 나의 관종 본능이 신나게 살아나기 시작한다.
어쩜 저리 아무 하고나 말을 잘 섞는지, 우리의 친화력 갑 아난트는 벌써 옆 좌석 아가씨와도 승무원들과도 친구처럼 담소를 주고받으며 친해지고 있다.
"뭐야. 승무원 언니들... 우리 쌤한테 너무 들이댄다... 저 옆자리 언니는 왜 자꾸 울 아난트 쌤 못 쉬게 귀찮게 한데... 잘생긴 건 알아가지구들... 어휴..."
난 잠시 눈을 붙일까 했는데 유리가 계속 툴툴 구시렁대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