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글쓰기
생각하기 싫은 날
머릿속에 별들이 반짝반짝하지 않는 맹맹한 날이 있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고, 뭔가를 창조할 의욕이 전혀 없다. 머릿속에 답답한 안개가 찬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전에 해결해 놓으려 했던 '잡무'도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아 마음에 짜증만 쌓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책을 읽어보고 글을 써 보지만 자꾸 졸리고 집중이 잘 안된다. 심지어 넷플릭스 드라마도 집중이 안되니 재미가 없다. 머릿속엔 졸음이 가득하고, 남의 작은 실수에 쉽게 짜증이 난다. 짜증을 내면 나도 마음이 좋지 않으므로, 주로 조용히 가만히 지내려고 노력한다.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다. 보통 때 안 하는 싱크대, 세면대 배관 소독 청소 같은 것을 이런 날 한다. 깨끗해지는 무언가를 보면 조금 기분이 풀린다.
요 며칠 몸 컨디션이 좀 별로다. 호르몬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진이 빠진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아침에 잘 깨지도 못한다. 잠을 잘 못 자, 왼쪽 어깨 신경이 눌러진 듯 저린 느낌이 오는데, 운동을 해도 몸이 시원해지지 않고 찌뿌둥한 느낌이 없어지지 않는다. 커피를 마셔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는 날이다. 매일 하는 습관 리스트를 하나씩 꾸역꾸역 해 본다. 몸에 습관으로 밴 일들은 그나마 쉽게 할 수 있다. 다만, 습관을 지켜도 뿌듯함이나 만족감은 들지 않는다. 내 기분이 무척 가라앉아 있다는 걸 이젠 알겠다.
날씨 탓?
내 컨디션이 이런 게 문득 날씨 때문이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어젯밤 너무 추웠고, 오늘 하루 종일 햇살이 느껴지지 않는 흐리고 을씨년스러운 하루. 춥다고 움츠리고 있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따뜻한 차와 커피를 끓여대도 하늘에서 한 번 비춰주는 화사한 햇살만 못하다. 문득 밖을 보니, 집 앞 나뭇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평소 때라면 예쁜 새가 왔다고 신통해하며, 아이들도 불러 가까이 다가가 한참 새를 볼 텐데, 오늘은 귀찮다. 뚱뚱한 새가 똥이나 찍 싸고 앉아 있는 현실적인 장면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쁘게 보는 것도 예쁘게 보지 않는 것도 다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싶다.
이런 날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이런 날엔 과자나 빵을 주섬주섬 더 먹게 된다. 문제는 그럴수록 속이 더부룩해져서 더 기분이 나빠진다는 거다. 누군가는 이런 날 한 잔을 할 것 같고, 누군가는 이런 순간에 나가서 한 대를 필 것 같다. 나는 그런 습관이 없으므로 그런 게 도움이 될까 짐작만 해 본다. 하지만 결국 잠시 기분 좋자고 오래 몸을 힘들게 하는 일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해 볼까 생각하다가, 이런 날 생각 없이 말하다가 실수할까 두려워서 그만둔다. 조용히 성경을 읽는다. 성경을 읽다가 문득, 요즘 읽고 있는 책 'Educated' 속 작가 타라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성경을 읽고 사람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심리적 욕구를 휘두르고 주변 사람들을 몰아갈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위험성을 본다. 성경을 읽는 마음 자세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성경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 나 자신의 사고 과정을 3자의 눈으로 면밀히 바라본다. 하지만 오래 성찰하지 못하고 그만둔다. 오늘은 생각을 깊이 하는 것이 힘든 날이다.
이런 날 따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만화책 스무 권쯤 쌓아놓고, 귤이나 까먹고 뜨거운 군고구마나 후후 불어가면서 먹다가 동치미 국물 한 사발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런 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차가운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먹거리를 나르는 엄마의 노동이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어릴 때 그렇게 어른들의 보호 속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즐겁게 만화를 보던 기억이 참 그립다. 만화를 보다가 스르르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이 개운해질 것만 같다. 오늘 처음으로 입가에 웃음기가 차오르는 걸 느낀다. 이렇게 그리워지는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쉬는 글쓰기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 생각도 안되고 글도 안 되는 날은, 글 짓는 이들이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배관 찌꺼기처럼 붙어있는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종이 위에 쏟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름 휴식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일이기도 하지만, 때론 휴식도 되는 글쓰기란 것이 참 신기하기 짝이 없다. 글의 목적과 용도는 참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면에 떠있는 것들을 여과 없이 계획 없이 그대로 쏟아 놓고 나니 동치미 국물처럼 참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대문 이미지 출처: https://pixabay.com/users/tangjiao990-1595606/ (by tangjiao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