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80대 할아버지한테 반할 수도 있다
오늘 주유소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한 번도 길에서 누구의 외모에 반해서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미국에선 상대를 대놓고 응시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기 때문에 시선을 끄는 무엇이 있어도 슬쩍슬쩍 훔쳐볼 뿐, 영화배우같이 멋지게 생긴 사람이 지나가도 1-2초 이상 응시해 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오늘 넋 놓고 대놓고 사람을 아래 위로 꼼꼼히 훑으며 바라보는 일이 있었다. 적어도 80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세상에는 80넘은 노인도 많고, 옷 잘 입고 다니는 인물 좋은 할아버지도 많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가 뭘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하며 그림을 그려보았다. 다시 말해, 나는 오늘 한 남자에게 반해서 넋 놓고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집에 와서도 잊지 못해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한 것이다.
내가 반한 포인트들
할아버지의 활짝 꽃 미소
할아버지는 주유하는 내내 이빨이 다 보이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분명 내 시선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내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더 잘 보이게, 할아버지는 나를 향하여 정면으로 서서 계속 활짝 웃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포즈와 표정에 그 정도 자신 있는 분이라면, 모델 일을 하는 할아버지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노인의 해맑고 환한 미소는 마치 햇빛 찬란한 날 하늘에서 흩뿌리는 오월의 비처럼 오묘하고 신비로웠다.
할아버지의 옷차림
처음엔 화려한 색의 캡이 눈에 띄었다. 정확한 문양이 기억이 안 나서 그림에는 대충 느낌만 표현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하면서도 개성 있는 그런 모자였다. 모자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안경을 보게 되었는데, 어쩜 이렇게 세련되게 잘 어울릴까. 학자 같은 진중한 분위기를 주면서, 동시에 너무 무겁지 않고 가벼운 멋이 살아 있는 뿔테 안경이었다. 할아버지의 안경까지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내 눈이 그의 시크한 가죽 재킷에 이르렀다. 와, 멋지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가죽잠바 아래로 삐져나온 헐렁한 티셔츠의 멋이란! 이까지만 보여줘도 훌륭해서 돌아가실 지경인데, 할아버지의 하의는 그냥 쩔었다! 오졌다! 미쳤다! 할아버지의 스노 진 바지는 나도 당장 뛰어가서 사 입고 싶은 세상 힙한 색감의 멋진 바지였다. 특히 스노 진 옆으로 빨간 줄무늬 장식이 만들어 내는 그 재밌고 활동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엔 내 어휘도 그림도 심히 부족하여 아쉬울 뿐이다. 본 김에 끝까지 샅샅이 살펴보자고 마음먹은 나는 할아버지의 날렵한 검은 가죽 구두를 보고 다시 한번 심쿵! 할아버지가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릴 때, 같이 툭 흘러내린 반짝거리는 팔찌를 보곤 그냥 기절했다!
할아버지의 당당 긍정 에너지
할아버지의 자세, 할아버지의 옷차림, 할아버지의 표정,... 할아버지는 당당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친근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코로나만 아니면 나도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보고 싶을 만큼 할아버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밝고 유쾌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가득할 것 같고, 센스 있고, 유머 감각도 풍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이 명품이어서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영화배우처럼 멋진 외모 여서도 아니고, 그냥 할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센스'와 '에너지'가 눈을 뗄 수 없게 '굉장히' 멋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