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하기 좋은 날
아침부터 하늘에 회색 구름이 가득 들어차더니, 역시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문을 열어보니, 봄기운 가득 머금은 흙냄새가 쿰쿰한 시골냄새 코스프레를 하며 진동을 한다.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세상 만물의 갈증을 다 적셔주고, 때 묻은 모든 마음을 씻어 주는 흡족하고 충만한 느낌. 비 오는 날은 축복의 날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전을 부치고, 국수를 끓여 함께 잔치하기 딱 좋은 날이다.
학생 시절, 나는 이렇게 우중충하고 축축한 날을 무척 싫어했었다. 가장 싫었던 것은 회색 빛으로 변하는 세상이었다. 안 그래도 삭막한 회색빛 도시의 건물들이 더 어둡고 삭막하게 느껴지고, 모든 암울한 것들에 물기가 스며 더 무겁게 가라앉는 게 싫었다. 비가 내릴 때마다 누군가 우는 듯 느껴져 내 마음이 따라 우는 게 싫었고,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를 보는 것도 슬펐다. 특히, 커다란 자동차 바퀴들이 하수구에서 넘쳐 나온 흙탕물을 사방으로 튀겨 여학생 하나쯤 홀딱 젖게 해도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세상의 무신경이 정말 싫었다.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비가 싫고, 비오는 날 등교길이 치떨리게 싫어서, 나는 걸어가는 내내 세상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물을 기다리고 반가워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파릇파릇 피어나는 생명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연의 법칙, 생명 과학 이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 마음에 집중하느라, 내가 당하는 피해만을 생각하느라, 나를 둘러싼 주변, 푸르고 여린 삶들을 생각할 여유도, 성숙함도 없었다.
그 정도밖에 안되던 나를 오래 부끄러워했었다. 더 성숙한 생각을 하고, 자신의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에 더 배려심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너무나 작아졌었다. 내가 뭔가 잘못된 사람이 아닐까, 좋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될 싹이 아닌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내내 품고 있었다.
그 의구심과 결핍감이 내가 살아가며 더 지혜로운 선택, 더 옳은 선택을 열망하도록 끊임없이 불붙여 주는 연료가 되어주었다는 걸 지금 깨닫는다. 건강한 정체성과 자아상을 갈망하는 목마름이 되어주었음을 이젠 안다. 그 시간의 생각들과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온 힘이었다는 것을 이젠 알겠다.
먼 길을 왔다. 오랜 시간 동안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간을 견딘, 그 철없는 아이에게 괜찮다고 잘해왔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직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스스로를 진짜 사랑하고 아끼는 법도, 자신을 믿어주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법도 몰랐지만, 그대로 괜찮다고 잘 크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아이가 밝은 햇살을 좋아했다는 것을 지금의 내가 인정해 주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잘하고 있다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그때 그 소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 소녀에게 비 오는 날에도 즐거움을 줄 아주 예쁜 우산 하나와, 차갑게 젖은 마음을 위로해 줄 뜨거운 핫초콜릿 한 잔과, 아이에게 필요한 언어를 찾아 줄 좋은 책을 한 권 사주고 싶다. 따뜻한 손을, 여유 있는 마음 한 자락을 내밀어 주고 싶다. 그때 그 소녀를 생각하며, 지금 이 시간 비 오는 날을 힘들어하는 소녀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 시간을 잘 견디고 있는 것 훌륭해. 이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고, 곧 너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거야. 너는 잘 클 거야. 너를, 너 자신을 꼭 믿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