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잘 모르고,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나를 잘 소개해 주어야 한다

by 하트온

자기소개


어렸을 땐, 자기소개를 하는 일이 참 쉬웠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 사는 **살 ***이며, **** 대학교에서 *****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혹은 ******회사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기준에 맞는 무난한 삶, 특히 누구나 아는 대형 기관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특별히 긴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몇 가지 이름들만 말해도 상대는 거울을 들여다본 것처럼 잘 이해하고 인정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자기소개를 하는 일이 갈수록 힘들다고 느껴진다. 인생 역사의 굴곡이 깊어지고 길어져서 그렇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보편적 기준이 제시하는 대로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나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야생의 난관을 헤치며 여기까지 왔는데, 몇 가지 세상이 이해하고 판단하기에 편리한 단어들로 나를 제한하기엔 내가 억울해졌기 때문이다.



소개를 제대로 해보려고 쓴다


말로 소개를 잘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로 잘 써 두는 것이 말을 잘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갈수록 늘어날 뿐 줄어들 일은 없을 것 같다. 점점 더 한마디 말로 표현하는 일이, 말 몇 마디로 정리하고 제한하는 일이 힘들다. 내 삶이 한 번에 다 말할 수 없는 분량이라 더 그렇다. 그래서 글에 더 의지를 하게 된다. 말로 다 못해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있었어도, 글로 써서 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풀어줄 방도가 아직 남아 있기에 나는 늘 괜찮아진다. 내가 편한 속도로 쓰다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 멈추고 지우고 고치고 완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쓸 수도 있다. 글을 쓸 수 있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음에 깊이 안도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점점 더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지난가을 브런치 방을 열고, 지금까지 써 온 400여 개의 글이 다 나의 자기소개서였던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평생을 끊임없이 나를 소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를 내 감정을 평생 연구하고 싶은 '지향성'을 가진 내가, 끝없이 나에 대해, 내 생각과 감정에 대해 쓰는 건 당연한 연구 결과 실험 리포트인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나에 대해서, 내 내면의 대립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 - 소개할 때 언급해 주어야 할 사실은 -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현재 20년 이상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미국인들은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미국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질문이 많을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방금까지 그 나라에 살았던 사람의 입을 통해 생생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 그리고 뭔가 미국에 적응하는데 자신이 도울 건 없을까를 생각하고 더 가까이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눈앞의 '외국인'이 미국에 온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아는 순간, 미국인들의 관심은 금세 사그라진다. 이제 적응할 만큼 적응하고 알만큼 알 사람일 것이라 짐작이 되는 것이다. 한국을 떠난 지 20여 년 된 사람에게 한국에 대해 묻는 것도, 계속 한국에서 금방 온 사람 취급하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이런 지뢰밭 같은 복잡 예민한 관계를 굳이 이어가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 연락은 뜸해져 버리고 관계는 소원해진다.


하지만, 나를 미국으로 떠나오게 만들었던 계기들이 무엇이었는지, 부모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내가 미국에 와서 인생이 바닥을 쳤던 이야기를 꺼내고, 바닥에서 다시 일어선 이야기, 내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자아상을 다듬어 일어서 나아가는 이야기, 지금까지 내가 깨닫게 된 것들, 나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순간 내 앞의 상대와 나는 인종이라는 허물을 벗고, 국가와 종교 같은 틀을 부수고 나와, 같은 지구인 한 민족 동등한 서로서로가 되어, 마음 깊은 곳을 보여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관계가 시작된다.


나에게 팸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나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는 우연히 아이들이 같은 반에 속한 학부모로서 만났지만, 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영혼의 단짝 같은 친구가 되어 있다. 생활이 바빠서 자주 만날 순 없지만, 만나면 곧장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 아는, 같은 책을 써나가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나 그런 관계가 될 수는 없다. 안전한 상대여야 한다. 나를, 내 감정을 이해하고 관계를 이어갈 의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호감이 있는 사람이어야 그 시작이 가능하다. 그런 사람을 위해 나는 정성 들여 소개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 소개가 가능하기 위해 정성 들여 쓰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20대 중반에 미국에 왔다. 내게 편리하고 익숙한 모든 것 - comfort zone을 완전히 벗어나 -을 버리고 왔다는 것을 미국에 와서야 깨달았다.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버린 것 같은 고통이 마음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직장이 있고 삶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데도 소용없었다. 가슴 깊이 내면을 파고드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집 떠나 친구 집에 너무 오래 얹혀 있게 된 것 같은 불안정함, 나를 재워주는 친구가 이제 불편해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은 불편한 고통이 하루도 빠짐없이 부지런히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쉽게 잠들 수 없던, 긴장의 연속이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간 내 안의 또 다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녀와 내가 충돌하던 그 시간, 그 충돌이 터져 나와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던 그 시간, 세상에 나 혼자 고립된 것 같던 그 시간들은 마치 인생의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절망이라는 단어의 맛이 느껴졌다. 내가 믿고 탄 배의 바닥이 썩어가는 걸 보는 느낌이랄까. 추락과 절망, 불안과, 말할 곳 없는 고립,...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 모국을, 홀로 털고 떠나버린 사람에게 오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뿌리를 잘린 나무 같은 느낌으로 지냈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삶을 되돌릴 방법이 없을까, 내 삶은 실패한 걸까, 내 삶을 구제할 방법이 없는 걸까... 생각할수록 점점 더 절망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돌아가 다시 내릴 뿌리가 없으니, 나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결국 말라죽어버릴 잘린 나무토막 신세 같았다. 그런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지키고 살려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던 것 같다. 파란 눈의 상담사 아저씨와 만나보기도 하고, 내 마음을 설명해 주고 답을 던져 줄 수 있을 책이 있을지 샅샅이 뒤져 찾아 읽고, 글을 쓰며 내 마음을 토로하고 스스로 돌보기를 반복하고,...

오랜 정성 끝에, 어느새 새로운 뿌리 하나가 삐죽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뿌리가 땅을 파고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뿌리가 넓고 깊게 퍼져 자라며 단단히 자리를 잡는 희열이 찾아왔다. 촉촉한 흙이 함유한 물기가 내 뿌리 끝에서 몸의 중심부로 전해지는 흡족한 느낌. 드디어 충분히 물을 갈증을 해소한 느낌. 집이다, 여기가 내 집이다 라는 느낌이, 그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이 내 심장을 보듬어 안아주자 나는 엄마품에 안긴 아기처럼 믿고 잠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시는 내 뿌리를 뽑아내 옮기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만큼,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함부로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돌아서던 태도가 돌변해, 주변을 향한 긍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고 오래 참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지혜롭고 성숙한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나의 염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이 모든 일이 있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미국에 온 건 성장의 필수 코스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다음 할 일은 무엇일까. 나는 계속 나의 삶을 돌보고 사랑하고 키우고 성장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선택의 결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나는 미국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의미 있게 완성해 나가고 싶다. 사랑하면서, 감사하면서, 만족하면서, 나의 소개서, 나의 이야기를 성실히 작성하고 널리 진솔하게 소통하며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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