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가슴을 맞대고 탱고를 추면 되잖아
벗어날 수 없는 저기압 지대
정신병력, 알콜, 폭력, 학대, 자살,... 집안에 도는 사악한 기운의 근원을 알 수도 해결할 수도 없고, 그 기운의 일부로 사는 일은 더더욱 견딜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 집안을 도망쳐 떠났다. 맨손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우리는, 맨땅에 헤딩해서 다들 잘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감정의 저기압, 결핍의 블랙홀이 발목을 잡는 우리들의 인생길엔 자꾸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산사태에 떠밀려 무너지고 내려가야 하는 일이 자꾸 일어났다.
20대에 이미 인생이 더럽게 꼬이고 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죽어라 공부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내면이 흔들거리니 학벌이나 직업으로 겉포장만 열심히 바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천둥번개는 항상 폭우를 동반했었다
건강해 보여도 자꾸 폭우에 휩쓸리는 나무는 뿌리가 썩어 쉽게 부서지고 병들 수밖에 없다. 폭우를 막을 길을 찾아 헤맸다. 자꾸 홍수에 쓸려내려 가 슬픔과 절망의 늪에 잠겨 드는 패턴을 끊을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정확한 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가 고마운 손을 내밀어 주었던 건지도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누군가 빛을 비추고, 늪에 빠졌다가 살아나 본 적 있는 누군가가 현실적인 조언을 주고, 음식을 나눠 주고, 희망을 챙겨 주고,... 너무 꼬불꼬불하고 어두웠던 길이라 은혜를 입으면서도 아무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너무 지치고 아팠던 탓에 어떤 길을 지나왔던 건지 정확히 기억해 낼 수도 없어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정확한 지도를 그려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단 하나 확실히 기억나는 건, 내 내면이 깨끗이 나아 건강하게 바로 서기를, 변화하기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격이 되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고 믿었던 내 마음이다. 반드시 이겨낼 방법을 찾아 내리라고 나 자신을 수시로 설득시키고 또 타이르고 응원했다.
그리고 천둥번개가 칠 때 겁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자는 생각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겁을 집어먹을 때마다 히스테리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의 반응이 가만히 지나갈 먹구름을 다 건드려 더 심한 폭우를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가만히 있으니 정말 많은 것이 훨씬 나아졌다. 물론 한 번에 폭우가 그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폭우가 내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사실이었다. 홍수가 일어나는 정도가 점점 약해졌다. 약해지는 걸 보면서, 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이 더 커졌다.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하면 추스르는데 한 달이 걸리던 마음이 일주일, 하루, 4시간, 1시간, 5분,...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이젠 폭우를 동반하지 않는다
폭우가 잦아들고 물기가 마르니, 내 마음에 움푹 파인 굴곡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번개가 보이면 천둥이 잇따르는 것처럼, 결핍이 자극되면 감정이 휘몰아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패턴은 항상 같았다. 내 부족한 부분, 결핍이 변함없이 같은 모양으로 그 자리에 푹 파여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결핍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과 관계를 끈끈하게 깊이 맺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타고난 사교성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탄탄한 방어능력의 부제로 사람을 마음 깊이 신뢰하지 못하게 된 점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겨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장애로 작용했다. 내가 불신과 싸우며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이, 그 사람에게는 더 넉넉한 신뢰감을 가진, 친화력 사교성 강한 사람이 접근하는 패턴이 항상 일어났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면 사교 나비들에게 내 사람(들)을 빼앗기는 느낌을 받게 되는 익숙한 패턴을 늘 각오해야 했다. 어떤 집단에 속하게 되면, 나만 빼고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져 가는 물살 흐름의 씁쓸한 썰물감을 각오해야 했다. 관계를 키워가는 능력의 결핍이 자극시키는 감정의 패턴이 항상 같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내 소중한 '앵그리' 프렌드
결핍의 위치와 모양이 일정하므로, 결핍의 자극이 불러오는 감정의 성질도 항상 같다. 나는 반복되는 같은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일은 그만 하자고 결심했다. 힘들어하는 대신, 내 감정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면 어떨까 생각했다. 어차피 사라지지 않고 변치도 않을 무엇이라면, 매일 같은 일로 싸우고 지지고 볶는 대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오랫동안 내 곁에 함께 있는 나의 익숙한 감정과 친구가 되면 어떨까. 세상에 밝고 화창하고 경쾌한 것들 하고만 친구가 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항상 찾아와 주고, 오래 내 곁에 있어주는 정도의 충성심이 있는 친구라면 성격이 좀 어둡고 지랄 맞아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내 안의 화난 친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동안은 마음에 들지 않아 말도 들어주지 않고 무시해 왔다. 화 잘 내는 이 친구는 사실 좀 귀찮은 친구긴 하다. 계속 옆에서 성질내며 닦달을 한다. 어떻게 좀 방어기제 정립이 안되냐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 좀 개선이 안되냐고. 제발 유대감이나 진한 우정 같은 것 좀 느끼고 사람답게 살자고. 평생 이렇게 고립감과 외로움 같은 감정을 떠날 수 없는 거냐고. 저기압 감정에 천둥 번개도 지겹다고.
날벼락이라도 마른하늘이라면, 우리 가슴을 맞대고 탱고를 추자
내 오랜 화난 친구야, 내가 가진 결핍은 지금 당장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어. 고립감에 숨이 막히고 절망감의 폭풍이 몰아쳐도 어쩔 수가 없어. 뭐가 부족하고 없다고 너는 외치고 또 외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어. 노력을 해 보지 않은 게 아니잖아. 수많은 시도를 해 봤어도 사람과의 관계가 오래 다정하게 유지되는 일, 점점 더 관계가 돈독해지고 의리와 우정이 다져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한 가지 희소식이라면 너와 내가 만날 수 있었다는 거잖아. 내 결핍이 생겨먹은 모양 때문에 우리가 여기 같이 갇혀있게 된 덕분에 항상 함께 있잖아.
우리, 우리에게 없는 걸 깨끗이 포기하면 어떨까.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살면 어떨까. 내가 갖고 싶은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것을 봐도 이젠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면 어떨까. 내게 없는 것이 크게 느껴져 마음에 날벼락이 쳐도, 마른하늘이기만 하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럼 네가 묻겠지. 나는 왜 가질 수 없냐고. 나는 왜 그런 우정이나 신뢰, 친분 같은 행복감을 가질 수 없냐고. 나는 왜 가지면 안 되는데. 왜 다른 사람보다 못 누리고 살아야 하느냐고. 불공평하다고. 뭐가 그렇게 못나서 이런 푸대접 인생을 참아야 하느냐고 난리를 치겠지.
그럼 내가 이렇게 대답해 줄 거야. 네가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고. 네가 가는 길을 가는데 필요한 것은 네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럼 너는 다 가지고도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부린다는 소리냐고 따져들겠지. 아니. 넌 다 가지지도 않았고, 욕심이 많지도 않아. 그냥 잠시 혼돈스러운 것뿐이야. 얼마만큼 가져야 하는지 정확히 몰라서. 근데 걱정 마. 내가 가르쳐 줄게. 딱 너만큼 가지고 있으면 될 것 같아. 너는 가진 것이 부족한 만큼 큰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게 거야. 그런데 그 큰 감정이 항상 너를 돌아보게 하고, 글을 쓰게 만들 거야.
너에게만 비밀을 말해줄게. 사람에게 진짜 재산은 물건도 돈도 아닌 감정이야. 사람이 사는 일은 모든 것이 감정이거든. 감정으로 살고 감정으로 죽는 거야. 감정이 열정이고 감정이 힘인 거야. 네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간절함도, 바로 감정, 거기서 나오는 거야. 너의 남다른 결핍감. 커다란 빈 구멍. 네 속에 들어앉아 채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블랙홀. 너의 관계의 만족감을 다 빨아 당기는 검은 구멍. 너는 그 검은 그림자 속을 뚫고 나오기 위해, 그것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거거든. 다르게 말하면, 그 검은 구멍이 너를 통해 글을 쓰고 있는 거야.
그 검은 그림자는 어쩌면 너와 내가 우리만의 멋진 춤을 추는데 꼭 필요한 섹시한 검은 드레스 인지도 몰라. 네가 결코 만족 못하는 그 검은 결핍이 얼마나 섹시하게 네 풍성하고 뜨거운 내면을 드러내는지... 우리 둘이 가슴을 맞대고 탱고춤을 출 때, 다른 사람은 필요치 않잖아. 너와 나, 검은 드레스만 있으면,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우리가, 세상 숨 막히게 섹시한 춤을 출 수 있잖아.
이젠 파티를 열 때가 되었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질 때도 되었지. 남이 가진 행복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행복을 찾을 때도 되었지. 떼려야 뗄 수 없는 섹시한 검은 드레스와 정열적인 파트너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서 각자의 탱고를 멋들어지게 추는 탱고 파티를 열자. 우리 이왕 추는 거 빨간 장미까지 입에 물고 제대로 해 보자.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SarahRichter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