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자유, 그리고 미니멀리즘

자유를 사는 돈, 돈에 대한 집착을 없애 준 미니멀리즘

by 하트온

가부장 문화를 견딜 수 없었다


할머니, 부모님, 나와 동생, 작은 아버지 부부, 사촌동생,... 북적거리며 모두가 함께 살 때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한창 잘되고 있을 때여서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셨다. 기분이 좋을 때, 아버지는 퇴근길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식구들에게 빵이나 과일이라도 사 갈지 물어보곤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뭘 사다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안된다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냥 '시장하실 텐데, 그냥 얼른 조심히 들어오세요'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뭔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불편했고, 어색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집안에 짙게 깔린 가부장 문화가 누르는 압력과 역할 통제에 길들여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신, 20대 초반의 막내 작은 어머니가 아버지가 전화해서 물어보셨을 때, 오는 길에 감기약을 좀 사다 달라고 하셨다. 내 생각엔 정말 처음 그런 부탁을 받아 보는 아버지는 약국에 들르는 일이 무척 어색하셨을 걸로 상상된다. 우리 식구 누구도 아버지가 약국에 가서 약을 사 오시도록 한 적이 없어서, 어쩌면 그때 아버지는 약국이란 곳에 누군가를 위해 약을 짓는 목적으로 처음 들어가 보셨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어머니가 그런 부탁을 그녀에게 시아주버님인 내 아버지에게 한 걸 하시고,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시며 심히 역정을 내셨다. 이유는


어디 감히 한 집안의 우두머리 가장에게 그런 심부름을 함부로 시켜!


가부장 문화나, 가족 간 서열 개념이 우리 집보다 많이 약했던, 딸들의 목소리가 컸던 환경에서 컸던 작은 어머니는 점점 할머니를 싫어하셨는데, 나중에 딸을 출산할 때 할머니가 아들이 아닌 것에 화가 나서 작은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닫게 만드는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작은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맞서는 반항 모드로 나가셨고, 그래도 울분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시는지, 다른 어른들이 안 계실 때마다 어린 우리를 앉혀놓고, 할머니에게 당한 하소연, 화풀이를 하곤 하셔서, 동생과 나는 작은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의 갈등으로 새우등이 터진 적이 많았다.


내 기억에도 할머니의 남존여비사상은 남달랐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남자들 빨래와 여자들 빨래를 절대 같이 하지 않고, 가장의 밥상에 여자들이 끼어 앉아 먹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만큼, 가장을 집안 대소사의 가장 윗자리에 세우고 추앙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적극적이셨다. 나중에 작은 아버지 두 분이 다 분가하시고 나서, 할머니는 수시로 작은 아버지들 집에 방문하셔서, 집안 구석구석 청소 상태와, 냉장고 반찬을 하나하나 열어 점검하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엄마와 작은 어머니들의 고통과 신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는, 남녀차별이 수시로 뜨겁게 끓어올라 내면을 아프게 지지는 그 가부장 문화가 소름 끼치게 싫었던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 점점 떠나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평등주의자인 나


날 정성스레 먹이고 지키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으셨던 할머니께 감사함과 특별한 정이 없지 않았지만, 자라면서 나는 할머니의 사고방식, 할머니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문화를 참을 수 없었다. 타고나길 뼛속까지 평등주의자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어릴 때부터 각종 차별과, 서열주의적 사고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고, 큰 감정이 일어나곤 했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과 사람을 구분 짓고, 다르게 대하고, 줄 세워 분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라는 생각만이 내 심장을 뜨겁게 채웠다.


온순한 성향의 학생이었던 내가, 중고등 학교 때 교사에게 반항하고, 친구들과 모의하여 시위하고, 전교생에게 돌릴 전단지를 복사하다 형사에게 쫓기기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어린 인격들을 모독하는 줄 세우기 문화, 사립 고등학교의 썩을 대로 썩은 환경이 불러들이는 인간 차별과 부조리와 비리를 온 힘 다해 거부하는 내 불타는 마음이 빚어낸 결과였다.


나는 자식/학생을 키우고 돌볼 책임감과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는,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인 사람들, 갑의 자리 권력을 내세워 함부로 사람을 하대하고 부리려 드는 자들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학사 이후에 석사, 석사 이후에 박사 학위를 따려하고, 직장생활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 하는 마음을 가졌던 원동력은, 그런 어린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갑질과 각종 추행과 차별에서 벗어나, 존중받고, 존대(상호)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높이 올라가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서려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미국에 도착하고서야 나는 각종 서열주의, 성희롱, 남녀차별, 술을 강권하는 문화 같은 것과 싸우던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존중을 얻어내기 위해 위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영어는 높임말 낮춤말 자체가 없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무도 개인 사생활이나 나이, 심지어 출신 학교조차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회사 상사들은, 오직 특정 일을 할 수 있는지 업무능력만을 보고 평가했다. 오히려 나 스스로가 수직적 문화 속에서 사고가 굳어진 부분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깨닫고, 나를 깨워내 수평적 문화에 적응시켜야 했을 뿐이다.



자본주의로 가부장주의를 덮고 미니멀리즘으로 중심 잡는 삶


하지만, 결혼과 함께 내 삶에 큰 재앙 같은 복병이 습격했다. 나는 하대와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살았는데, 모든 익숙한 것의 혜택을 버리고 미국이라는 생면부지의 땅까지 왔는데, 시부모라는 분들이 내가 미국에서 일구어 가는 수평적 삶을 와르르 무너뜨리셨다. 그분들은 성인인 나를 어린애 취급하고 야단치고 하대하고 밟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 미국에 오신 시부모님은 그때 사고에 갇혀계셨다. 그분들 머릿속에 있는 며느리의 역할은, 시댁 식구들 뒷바라지를 하는데 온 시간을 바치고, 식구들이 먹고 남은 음식, 상하기 직전의 음식이나 주워 먹고 뭐든 희생하고 양보해야 하는 집안의 식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며느리가 어떤 성향의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싶지도 않으셨고, 그냥 입을 막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끌고 다니고만 싶어 하셨다.


나와 남편은 그분들의 수직 세계를 견딜 수 없었으므로, 훌쩍 탈출하여, 먼 타주로 이사를 갔고, 이직한 직장생활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죄책감이 목을 죄어와 부모님을 멀리하며 살아가는 삶에 한계가 왔다. 다시 엮이고 다시 다치고 아파하는 전쟁통 삶이 시작되었다. 전쟁 속, 피치 못할 막다른 상황에서 사람들은 강하게 버티고 살아남곤 한다.


우리는 미친듯이 우리 스스로를 구제할 길을 찾았고, 마침내 시부모님의 우리를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욕구를 막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바로 '돈'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돈' 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잘도 내려놓고, 성질도 욕구도 잘 참는다. 보통 성격이 넘는 양반들이 우리가 돈을 내밀 때마다, 마치 머리에 총부리라도 겨눈 듯 순한 양이 되셨다. 가부장 문화, 시어머니 용심보다 더 센 것이 '자본'이라는 것을, 자본주의가 가부장주의를 덮고도 남는다는 것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깨달았다. 그 옛날 내 어머니나, 작은 어머니가 큰 자본이 있었더라면 할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차별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불화를 잠재우는 자본의 힘을 맛본 남편과 나는 열심히 돈을 벌었다. 정말 한시도 안 쉬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가치관과 문화가 맞지 않는 모든 관계의 '불화' 구멍들을 돈으로 메꾸었다. 우리는 돈이 쏙쏙 빠져나가는 구멍들 덕분에, 돈을 넉넉하게 벌면서도 항상 살림 규모를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미니멀 라이프를 유지하는 일에 자동으로 단련이 되었다. 미니멀리즘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걸 깨달은 게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피땀 노력으로 번 돈을 노후를 위해 차곡차곡 모으기보다, 자녀를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는데 쓰는 것보다, 부모를 막는데 쓰는 나와 남편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자본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마음 편한 방법이었고, 늘 불행해하는 부모에게 꽤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누군가는 부모의 행복은 부모 자신의 책임이며, 그들의 행복을 자녀가 그렇게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도 충분히 알고 기꺼이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부모 자식 관계 안에서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들을 다 경험한 입장에서, 나는 이 정도 평화로운 관계와 상호 간 행복을 유지할 만한, 이만큼의 자유를 사들일 만한 돈을 버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미니멀리즘은 계속된다


미니멀리즘 덕분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 갖추었다는 확신을 얻었고, 나는 더 이상의 물건에 대한 욕구나 욕망이 없다. 억울함도 없고, 남 탓도 없다. 돈으로 자유를 사기로 한 것은 나의 결정이었고, 내 결정은 내가 책임진다.


내 아이들은 내가 교육시키고, 내 행복도 내가 찾는다. 내 행복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모든 행복을 위한 조건들이 내 삶 안에 다 갖추어져 있고,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말이면 집 대출 빚과 다른 각종 빚들을 모두 갚게 된다. 가부장 문화로부터 자유에 더해, 빚으로부터 자유를 하나 더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 유명 재정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수지 올먼의 강연에서 이런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난다:

인생을 판타스틱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일단 돈이 받쳐줘서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돈이 충분하면 많은 걱정을 없애주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자존심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다.


돈이 전부도 아니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열심히 돈을 버는 사람이고, 나는 그 돈을 내가 필요한 자유를 사 모으는 데 과감하게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돈 걱정에서 자유롭게, 내가 쓴 돈에 미련을 갖지 않게 지켜주는 미니멀리즘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살아간다. 미니멀리즘은 항상 나에게 '충분히 가졌다'는 결론을 선물해 준다.



저의 경험, 저의 가치관 저의 문제 해결 방식이 어떤 분들에게는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아, 글을 발행하는 것이 좀 두렵기도 하지만, 일단 썼으니 발행합니다. 개인적인 가치관인 점 양해해 주셨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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