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끌어 가는 삶
번아웃*이었을까
*번아웃(burnout): 글자 그대로 모두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것 같다고 해서 번아웃 증후군 또는 소진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이 증상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너무 지쳤었다. 신체적인 무력감, 피로감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이 무관했다고 할 수 있을까. 번아웃이 우울증과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지조차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 본 것이 아니기에 그때 내가 겼었던 증상들, 현상들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신은 없다. 다만 세간에 떠도는 번아웃 자가 테스트에서 열거하는 증상들*과 유사한 점들이 많았기에 번아웃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나는 엄청난 강도의 '벼락같은 무언가'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중에 왔었다. 그것은 내 안의 누군가가 더 이상 버틸힘이 없어 무너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혹은 나의 본질, 실체 같은 것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뚫고 쏟아져 나오는 느낌 같기도 했다.
매일 실험실과 집만 오가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고, 사람이 없는 - 사람들의 말소리나 발소리가 진동을 만들지 않는 조건하에서 - 새벽 시간에 실험을 해야 했던 덕분에 수면 부족과 체력적 한계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지만, 더한 소용돌이는 내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15여 년의 시간을 이공계에서 보내는 사이 내 안에는 실패감이 걷잡을 수 없이 쌓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해내는 일의 성과에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성취는커녕, 내가 하는 모든 실험 연구가 허접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을 다 짜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이고 한 일이 허접한 일, 실패작으로만 느껴지는 그 고통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강도의, 내면을 이개고 짓눌러 파열시키는 격통이다.
또 한 가지는, 내가 하는 일에서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선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로 공대에 입학했었다. 그런 각오를 했던 만큼 나는 나 자신을 이공계 공부와 연구에 쏟아붓는 자세로 살았다. 나는 새벽에 집을 나와, 학기 중에는 도서관에서, 방학에는 독서실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다가, 또다시 깜깜한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하루하루를 쌓아갔다. 내가 속한 공대에서 사용하는 전공 서적들이 이해가 가지 않고 설명이 불완전하다 싶으면, 미국 톱 공대에서 사용한다는 원서 서적들까지 확보해서 보통 공대생들의 두 배, 세 배로 공부했다고 자부한다.
그럴수록 점점 더 실패의 나락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성격이어서, 나는 대학원에서 석사를 하는 동안, 화학과와 물리학과 수업들까지 들으며 지경을 이해를 넓혀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의 모 연구소에서 일했던 날들에도 나는 연구소에 밤늦게까지 남아 공부를 했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까지 나는 출근을 했을 정도로 끝까지 노력을 했고, 마지막 한 줌의 영혼까지 짜 넣었다.
한 마디로 내 삶이 없었다. 내 삶을 이공계 분야에 쏟아붓는 만큼 소명 의식이 생기고 삶의 의미가 더 커지리라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점점 머릿속에 남지도 않는 지식으로 '모래성을 쌓고 파도에 쓸려 보내고'를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는 것이, 이해하고 있는 방향이 맞는 건지, 과연 내 안에 탄탄한 지식의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이 들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결코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은 없으면서 가방 끈만 늘려가는 삶이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착각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분명한 땅을 딛고 서 있는 듯한 불안정한 느낌에 내내 시달렸다. 내가 연구한 내용을 어딘가에서 발표를 하고 논문을 쓰면서도, 100% 확신할 수 없는 실험들을 그럴듯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꾸며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가 신소재를 개발해서 신흥 강대국을 세워가는데 큰 공헌을 할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라고, 마침내 한국의 퀴리부인이 되는 꿈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근거를 확보할 만큼, 그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만큼 과학 지식의 토대가 탄탄하게 잡혀간다는 느낌이 결코 들지 않았다. 언제나 모래성을 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15년을 과학에 매달리고 얻은 열매라곤 '실패감' 뿐이었다.
세계 유명 석학들과 함께 더 제대로 공부하고, 더 발전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미국에 왔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온 인생을 걸고 만족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일에 내 생을 쥐어 짜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밀려왔으며, 과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지고 노는 단계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에 더해, 외국인 이방인이라는 위치가 이 세계 안에 강한 입지를 다지지 못하는 소외감 결핍감을 더욱 부추겼다.
그나마 내가 꽤 자신 있는 분야가 한두 가지 있긴 했다. '고체 결정 구조학'과 '열역학'이라는 분야였다. 그 분야들만큼은 나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왔고, 어떤 문제든 풀어낼 자신이 있을 만큼 편안하게 느껴졌다. 시험과 숙제에 항상 만점을 받았다. 주변 동료들은 나에게 '결정 구조학의 대가', 혹은 '열역학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잘 알지도 못하는 학생들이 나에게 시험과 숙제에 도움을 받겠다고 아침 일찍 찾아와 줄을 서곤 했다.
마침, 그 분야들을 연구하는 교수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었다. 나는 겨우 조금 자신감을 가지게 된 분야에 대해, 충분한 인정과 긍정적인 교류를 희망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교수들은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 다, 중국인 학생들에 대한 혐오가 심했고, 중국 학생들을 밀어낼 방법만을 고안하는 사람들 같았다. 외국인 학생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상한 방식의 구두시험을 요구하곤 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 또한 중국 학생에 대한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점수를 얻는 아시안이라며 중국인들과 뭉뚱그려 취급을 하거나, 만나기만 하면 한국인이 개를 잔인하게 잡아먹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한 번도 내 실력 자체를 보고 인정해 주는 일이 없었다. 한 번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법이 없었다. 백인 학생들은 자주 불러 대화를 나누고 친목을 쌓으면서, 그 틈에 아시안계 학생을 초대해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들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었다. 그 교수들이 좋아하는 백인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 '인싸' 그룹 안에 속하기 위해 내 영혼을 팔았었다. 그들과 같이 밥 먹고, 그룹 스터디하고, 술집, 클럽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주말에도 만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시간을 보내며 교수가 무시할 수 없는 '미국인'이 되자결심하고, 언어부터 잡다한 취향까지 내 삶의 모든 영역에 한국적인 모든 것을 미국적인 것으로 치환시키려고 애를 썼다.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 그들이 나를 향한 시선을 바꾸어 줄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무기력한 느낌과, 실패감,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내 안에서 점점 들끓어 곧 넘쳐버릴 것 같던 아슬아슬한 어느 날,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어느 봄날에, 나는 엉엉 감정이 터져 나왔고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모든 노력을 멈추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는 자각,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왔고, 지도 교수에게 말을 하고 박사 과정을 그만두었다.
나의 길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 길엔 장애물이 너무 많았고, 나는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무모한 도전 같은 날들에 너무 지쳐갔었다. 그 길을 떠났던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길이 나의 길인지 찾아볼 기회를 얻었다.
또한 나는 그때의 일을 수없이 곱씹어 보며, 내 내면, 사고방식의 문제들을 들여다볼 기회도 얻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도 아니고, 약간의 희생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내 내면을 뒤지고 생각해보곤 했다.
짧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장 나빴던 것은 외부적 기준에 끌려다니는 내 삶의 태도였다. 외부적 기준은 결코 한 개인의 행복에 큰 가치를 두거나, 개인 자신만의 시간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 충분하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계속 더더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감정적으로 지치게 만든다. 내가 발휘하는 역량, 내가 타고난 모습 그대로,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외부적 기준이 내 삶을 쥐고 흔드는 사이, 삶의 의미도 존재 가치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다. 그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무기력감, 허무감, 자기혐오, 자기 의심이 밀치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어느새 저만치 훌쩍 달아나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외부적 기준은, '너는 날 결코 만족시킬 수 없어'라고 바닥에서 아우성치는 나를 향해 비웃기만 한다.
외부적 기준에 끌려다니던 삶이 한계치에 도달했던 순간이 바로 그 순간, 박사 과정을 그만둔 순간이었으리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 사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외부적 기준에 맞춰야만 해서 전정 긍긍하며 스스로를 혹사하게 만드는, 개인의 지나친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직장 분위기, 사회 문화도 큰 몫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 내가 겪은 것은, 그런 사회적 압박보다는, 내 내면의 문제에 더 가까웠다. 교수가 제시하는 기준을 어떻게든 만족시키고 싶은, 결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그때까지의 나의 삶, 나의 심리, 나의 욕구. 내 안의 그 모든 것이 엉켜있었고, 그것들을 견딜 수 없는 내 안의 어떤 자아, 이제 내 삶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도록 구해내고 싶은 자아가 그 모든 엉킨 것들을 온 힘으로 받아치는 거대한 충돌이 제대로 일어났던 시간이었다.
내 안의 목소리
외부적 기준과 각종 사회 문화적 관념에 눌려 모기 소리만큼 가늘어진 내 안의 소리를 살려냈다. 수많은 거짓말들과 의미 없는 잡다한 관념들을 걷어 내고, 내 소리를 키워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구해내자, 그것이 내 내면 안에서 내부적 기준을 탄탄히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과학적 지식으로도, 어떤 철학으로도 탄탄해질 수 없었던 내가, 마침내 나 스스로 탄탄해진 것이었다.
나는 나를 구하고 내 목소리를 구해낸 내가 자랑스러웠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맞는 기준을 세우고, 기준을 만족했을 때 칭찬과 보상을 주면서 나아갔다. 훨씬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삶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 나는 그 모든 우중충한 검은 구름이 맥없이 힘을 빼는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드디어 맑고 화창한 햇살의 축복 아래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이후의 삶이 다 잘 풀리고 쉬웠던 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시간들도 있었고, 몇 번이나 새로운 도전 앞에서 떨리고 혼돈스럽고 벅찬 시간들도 많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고 싶은 꿈에 다가가기 위해, 아직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두 자녀를 돌보기 위해, 지금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쉴틈 없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내가 이끌어 가는 삶은 아직 우울도 번아웃도 모른 채 맑은 하늘 아래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탄탄한 내면의 바탕에 서 있는 한, 그런 감정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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