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가 들려주는 인어 이야기, 그리고 꿈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들려주고 싶은 꿈이 있어요. 우리가 만나는 꿈. 인어와 인간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꿈. 그 바람을 향한 저의 첫걸음은 무엇보다 오해를 푸는 일이어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이 아는 <인어 공주> 이야기는 사실과 너무나 다르거든요.
내가 아는 인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많이 생각해 봤어요. 있는 그대로 봐줄 마음이 없는, 과장과 자극에 길들여진 인간 문화, 편리한 대로 살을 붙이고 본질을 흐리는 인간 중심의 사고라는 바위에 부딪치겠죠. 그 충돌로 제가 전하고 싶은 뜻이 산산이 부서져 의미를 잃거나, 파도에 쓸린 듯 잊힐 수도 있겠죠. 아무도 듣지 않는 불신과 무관심의 고립에 갇혀버릴 수도 있겠고요.
그래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 제 마음은 막을 수 없어요. 한 사람에게라도 오롯이 참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그때 그 이야기 그리고 그 인어
인간이 인어에 대해 하는 말 중, 우리 인어들이 매혹적인 특별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맞아요. 인어의 노랫소리를 요즘 사람들이 듣는다면, 지금 인간 세상을 휩쓴다는 그 일곱 남자들의 미성도 지루하게 느껴질지 몰라요. 노래 말고도, 인어의 소리는 정말 중요한 역할이 있어요. 바로 상어 떼를 쫓는 일이에요. 상어는 인어의 소리를 들으면 큰 통증을 느껴요. 조그만 인어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도망가지요. 그래서 먼 옛날 바다에 상어의 종류도 수도 훨씬 더 많았던 시절, 인간이 아직 상어에 대적할 기술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인어의 보우를 간절히 구하며 고기잡이를 했다고 해요. 그들은 인어를 바다의 수호신이라고 믿었고, 약한 존재를 도우며 기쁨을 느끼는 인어들은 기꺼이 인간이 바라는 수호신이 되어주었겠죠. 인간이 쓰는 인어 이야기에 항상 인어가 바다에서 사고당한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은 결코 진부한 판타지가 아니에요. 모두가 잊어버린 오래전 일이긴 해도, 인어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거예요.
안데르센의 <인어 공주>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그 인어는, 안타깝게도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인어였어요. 아마 이 사실이, '마녀에게 소리를 주고 다리를 얻었다'는 지극히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발상으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인어에게 소리가 없다는 건, 인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걸 가지지 못한 재앙이에요. 인어는 서로를 이름으로 알고 기억하는 게 아니거든요. 각 인어가 타고난 고유의 소리, 그 소리가 만드는 물결 파장의 독특한 촉감으로 서로를 알고 믿고 관계를 맺어요. 이건 정말 말로 쉽게 설명이 안 되는, 우리 바다 토박이들만의 사회적 속성이에요. 인어의 삶을 조화롭게 온전하게 이루어가는데 너무나 중요한 속성이지요.
소리 없는 인어는 무기력하고 외로웠어요. 다른 인어들과 소통할 수도,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는 그녀를,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된 인어라고 여길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녀는 끊임없이 제 삶의 의미를 고민해야 했어요. 활발한 낮의 활동 후 밤엔 지쳐 곤히 잠든 인어들 곁에서 편히 잠들 수 없었던 그녀는, 밤마다 먼바다를 헤엄쳐 돌아다니는 버릇이 생겼어요. 인어들도 상어들도 잠을 자는 한밤중은 그녀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거예요. 다른 인어들의 당황하는 시선으로부터도, 상어 떼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요.
이런 모습으로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이 무너져 내리던 어느 날, 그녀는 시퍼런 칼날 같은 새벽빛이 밤을 가르고 위험을 경고하는 데도 안전한 거처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지 마음먹었던 그 순간, 무언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어요. 새벽 일찍 고기잡이 나온 작고 낡은 배 한 척을 굶주린 상어 떼가 둘러싸는 것을 보았어요. 상어 떼의 거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배가 난파되면서, 배 안에 타고 있는 노인과, 노인을 닮은 젊은 남자가 물속에 빠지는 것을 보았어요. 무참히 상어밥으로 희생될 사람들의 운명을 보면서, 소리 없는 인어는 자신의 무력함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어요. 눈앞에서 위험에 빠진 존재를 돕지 못하는 인어의 내적 고통. 이 인어가 순간 느꼈던 감정적 격통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눈앞에서 새끼가 위험에 처한 걸 보는 어미의 고통에 비유하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될까요?
아! 그런데 기적처럼 그 순간 소리가 터져 나온 거예요! 그 누구도, 심지어 인어 자신조차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이 새로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놀랍도록 강렬한 소리가! 그 소리가 그 시간을, 그 하늘과 바다를 충만하게 채웠어요. 그 소리는, 차가운 바닷물 깊숙이 몸이 빠져들어, 점점 스며드는 죽음의 그림자에 아득해지던 두 남자의 영혼에까지 가 닿았어요. 벌써 죽어 천국에 온 걸까 착각을 했을 정도였죠. 그들이 들었던 소리는 마치 영화로운 사랑의 신을 세상에서 가장 맑고 영롱한 소리로 찬양하는 천상의 소리 같았거든요.
심히 강력한 인어 소리,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직감한 상어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답니다. 인어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노인과 그 아들을 구해 부서진 배에 싣고 해안으로 끌고 갔어요.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죠. 인어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부터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강한 힘이 꼬리 끝에서부터 뻗쳐 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인어는 그 생소하고 설레는 힘을 두 사람을 살리는데 온통 쏟아부었어요. 그녀는 사람들의 혈색이 돌아오고 점점 의식을 회복하는 모습에,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기쁨으로 터져 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어요. 사실 두 사람 중 젊은 청년 쪽은 이미 의식을 회복했으면서도, 영혼 깊숙이 파고든 인어의 소리가 터트린 눈물샘을 어쩌지 못해,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었어요.
인어는 마을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곤 자리를 떠나 물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아마 누군가는 헤엄쳐 사라지는 인어의 뒷모습을 보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 해안가에 몸을 누이고 있던 노인과 청년을 발견했겠지요. 이 부분에서 '인어가 남자를 구했지만, 남자는 인어가 구한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이야기가 전해졌던 모양이에요. 사실 청년은 모두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인어는 소리를 얻은 후에도 밤바다를 찾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어요. 더욱이 새로 얻은 소리를 맘껏 발산할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거든요. 검고 차가운 밤바다는 그녀에게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편안한 친구였고요. 그리고 한 명의 친구가 더 생겼어요. 그녀가 구한 그 청년이, 자신을 구한 인어의 소리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어느 밤, 달빛에 의지해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던 거예요. 사실 밤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는 건 인간에겐 큰 용기가 필요한 위험한 일이잖아요. 그 정도로 마음이 간절했다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인간의 따뜻한 열정만큼은 인어의 본성과 다르지 않아 보여요.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 의미를 이룰 제 내면의 작은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사랑하는 태도 말이에요.
그도 인어도 서로에게서 죽음에서 일으켜낸 같은 삶의 의지를 본 게 아닐까요? 그와 인어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익숙한 느낌에 서로를 향해 웃어 보였어요. 어떤 관계든, 어떻게 만났든 서로에게 진심으로 활짝 웃어 주는 순간, 마음이 열리고 친구가 되는 거잖아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겐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언어가 있었죠. 인어의 신비로운 노랫소리와, 남자가 연주하는 악기 -왼손으로 날렵한 목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여러 개의 줄을 튕기며 연주하는- 소리가 어울려 퍼지자, 바다는 제 거친 혈기를 억눌러 숨을 죽이고, 온 우주에 속한 별들이 몸을 떨기 시작했어요. 하늘을 가득 채운 보석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 신비롭고 황홀한 빛과 소리의 향연이 밤새 온 하늘 온 바다를 반짝반짝 화려하게 수 놓았죠.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그 밤 그 바다 그 순간에만 존재했던 그들의 교감과 공명. 영혼을 깨우고 떨림을 만드는, 그 떨림 속에서 모든 어둠을 흩어내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소리와, 그 소리에 맑아진 모든 영혼이 자유롭게 빛을 발하는 찬란한 어울림. 그것은 아무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 어떤 언어로도 제한해서 안 되는- 본질 그 자체였어요.
그들을 엿보고 엿듣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어요. 그렇게 감동적인 소리를 내는 인어를 잡아 목돈을 받고 팔거나, 애완동물처럼 기르겠다고 욕심을 품는 인간들이 생겨난 거예요. 소유욕. 그것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멸종시키고 오염시키는 인간의 한계인지 몰라요. 특히 그때는 인간의 과학 기술 문명이 놀라운 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거든요. 덕분에 강력한 무기를 갖추게 된 인간의 마음은 있는 대로 교만했고, 자신만만했지요. 뭐든 원하는 건 소유하고 길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그 탐심이 미친 야생마처럼 온 땅과 온바다를 질주하며, 인간 서로를 해칠 뿐 아니라, 인어에게 위협이 되는 지경까지 이른 거예요. (사실 이때가 인어들이 바다를 더 이상 누비지 않고, 더 깊은 지하 세계로 들어갈 때쯤이에요.)
욕심 많은 인간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남자는, 인어의 안전을 위해, 더 이상 바다로 나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나왔던 밤에, 그는 인어에게 자신이 연주하던 악기를 건네주며 멀리 떠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어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요.
그 찬란한 밤의 낭만을 맛본 사람들은 아마 속으로 안타까웠겠요. 더 이상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누군가와 말이라도 나누면서 그 느낌을 기억하고 싶었겠죠.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느낀 것을 말로 전하려 하니 생각보다 말할 내용이 없는 것에 적잖이 당황하지 않았겠어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상대에게 전하기 위해, 이야기에 점점 과장된 살을 붙여 나갔던 것 같아요. 사실은 남자가 수려한 외모의 어느 나라 왕자였다느니, 왕자의 호화 선박이 침몰한 걸 인어 왕국의 최고 미녀 공주가 구했다느니,... 결정적으로 안데르센이 인어를 자기 자신과 한 몸인 존재로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죠. 사랑했던 사람의 결혼으로 힘들어하고 있던 안데르센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슬픈 절망과, 빼앗긴 사랑의 아픈 눈물을 이야기 속에 차곡차곡 채워 담았어요. 자신이, 왕자의 결혼 간택을 받지 못해 결국 인간을 위해 물거품이 되고, 공기의 정령이 되었다가, 착한 일을 하고 불멸의 영혼이 되어 승천하는 인어가 되기를... 그렇게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며 기꺼이 희생하는 선한 존재로 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인어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안데르센이라는 작가를 나쁘게만 보진 않아요. 사실, 안데르센을 이해할 만도 해요. 어쩌면 그는, 그 이야기를 쓰며, 자신을 추스르고 남아있는 시간들을 살아갈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안데르센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거대한 절망 앞에서, 자신의 머릿속에 사는 인어를 붙잡고 헤엄쳐 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어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인어의 본질에서 아주 멀리 떠난 건 아닌지도 몰라요. 감정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가, 인어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구해도 될 거라는 생각, 그 믿음만큼은 인어의 본질에 더없이 가까우니까요. 게다가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주 중요한 진실 한 자락만은 놓치지 않고 전하고 있지요. 인어가 범접할 수 없는 수호신이 아닌 교감할 수 있는 친구라는 진실 말이에요.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다 했어요. 용기를 내 찾아가야 하는 밤바다처럼 쉽사리 가 닿을 수 없던 그때 그 이야기. 그 밤 정답게 어우러진 작은 별들처럼 빛났던 인간과 인어, 두 존재의 화음. 여기서부터 저의 소통의 꿈이 시작되었다는 걸, 저는 꼭 들려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저처럼 인간과 인어의 소통을 꿈꾸고 바랐던 때가 있었어요. 그 오랜 바람이, 제가 느끼기엔, 아직 당신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본능이 지금도 변함없이 사람들이 인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아닐까요. 제가 들려드린 인어 이야기가 당신의 내면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는 그 꿈을 깨워내기를! 언제까지나 저는 간절히 바라고 있을 거예요.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D8385)
이미지 1 출처: 따뜻한 감성 동화를 그리고 쓰는 하디(hady)님 작품 (https://www.instagram.com/hadyp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