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배자들
사람이 피해를 당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피해자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피해자의 자리에 앉아 억울하고 슬픈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아픈 감정이 남아 있는 걸 어찌할 것인가. 내 몸과 영혼이 짓밟힌 생생한 기억 조각들을 어찌할 것인가. 벌주고 싶으나, 똑 같이 당하게 복수해 주고 싶으나, 정의의 여신의 손 끝이 미치지 않는 저들을 어찌할 것인가. 저들에 대해 남아 있는 이 원망과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나 스스로를 향하고 있는 이 칼날 같은 혐오는 어찌할 것인가. 당당히 외치고 일어날 수 없는 부끄럽고 소심한 피해자는 숨어 다니며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지키고 돌봐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마침내 목소리를 내기로 한다. 적어도 우리가 당한 사실들을 용기 내어 기록하기로 한다. 우리는 저들의 오만과 탐욕이 영원히 수배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이상은 저들의 손에 심신을 농락당하고 상처 입는 영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의에 시달린 아픈 영혼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쳤다. 피해자의 자리에게 빠져나올 수 있기 위해, 나를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내 안의 어둠을 온전히 보듬어 내기 위해 우리는 이 책을 만들었다…
김종희가 쓴 책의 서문을 읽으며 눈물이 멈출 수 없이 쏟아져 내린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훌쩍이는 소리에, 호기심 어린 큰 눈망울들이 내게 모인다. 궁금해하는 인도인의 눈은 정말 많이 크구나 생각하며, 부인들에게 나와 유리가 함께 쓴 책이 나왔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난트가 힌디어로 더 긴 설명을 덧붙이고 나서야 부인들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축하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 내 깊은 문제를 들여다보는 상황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마음이 몹시 편안하다. 특히, 아난트에겐 이미 바닥을 보이기도 했고, 온갖 꼴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다. 아난트의 사람들인 인도 부인들도 불편하지 않다. 사람을 동정하는 눈빛도 재단하는 눈빛도 아닌 그 자애로운 눈빛들은 그저 깃털처럼 가볍고 포근하다.
“나도 사촌 오빠에게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어요.”
한 부인이 말문을 연다. 다른 부인들의 눈에 씁쓸한 빛이 잠시 스치는가 싶더니, 나도 그런 몹쓸 일을 당한 적이 있다며 부인들의 미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는 깜짝 놀란다. 이 고급 리무진 안에서, 세상 귀한 대접은 다 받고 살아왔을 듯한 부인들에게 성추행의 얼룩이라니! 인도 상류층 부잣집 딸로 태어나도 내 몸이 내 의지가 존중받지 못하는 순간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어린 여자의 몸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탐욕의 그림자는 피하기가 힘든 모양이다. 악은 각계각층, 세상 어디든 파고 들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렇게 외모가 출중한 부인들은 더 큰 추행 위협을 느끼며 자랐을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묘한 동질감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물론 그들이 겪었던 몹쓸 일들이 잘됐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이질적인 아우라에 말 걸기도 조심스러웠던 부인들이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 내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은 거부할 수 없다. 이들이 나의 사연을 아는 것으로 나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기대감까지 생긴다. 아난트와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부인들과 마음을 나누고 보니, 이젠 나를 지켜주는 왕언니들까지 생긴 느낌이다. 그리고 김종희와 그 친구까지.
나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굳은 믿음과 안정감을 주는 어떤 확신이 있다. 이 안전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다니기만 했던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것이라는 깨달음을 문득 얻는다.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왔고, 내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알도록 내어놓았고,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일처럼 한 마음 같이 느낀다.
도란도란 따뜻하게 서로를 위로하는 우리를 실은 리무진은 점점 묘하게 산골 숲 속 같은 느낌이 드는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분명 서울 시내 중심으로 진입했는데, 갑자기 시골길로 들어선 느낌이라 순간 혼란스러웠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앞서 가는 리무진에 타고 있는 김종희에게 문자를 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서울에 있는 호텔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김종희에게서 바로 답장이 온다.
[여기 서울 맞아. 여기서 계속 올라가면 남산 타워 나와. 나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최고급 찾다 보니 이런 데가 있더라…]
김종희의 설명을 듣는 사이 리무진이 호텔 로비 입구에 도착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싶었나 소리가 나올 만큼, 숲 속 한가운데 신비롭게 자리 잡은, 자연을 닮은 운치 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왕조가 이어졌다면, 왕실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보내는 별궁쯤 되지 않을까 싶은 상당한 규모와 당당한 전통의 자태를 자랑하는 한옥 건물이었다. 한국의 최고 재벌가에서 운영한다는,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최고급 한옥 호텔이라고 했다.
체크인은 김종희에게 맡기고, 화장실이 급한 부인들과, 유리, 아난트와 함께 단아한 꽃장식이 인상적인 로비를 지나 화장실 팻말을 따라갔다. 왼쪽으로 난 복도 입구에 위치한 화장실로 부인들과 유리 뒤를 따라 들어가려는데, 어디서 익숙하고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누구야?”
남규식! 날카로운 칼날을 세운 목소리가 심장을 가르며 들어온다.
“유리 넌 내가 올 때까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마”
남규식을 알아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뒤돌아 보는 유리에게 낮게 읊조렸다. 유리는 심각해진 내 표정에 눌려 마지못해 부인들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간다.
몸을 돌려 목소리를 마주하니, 남규식 혼자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한 무더기의 쓰레기들, 남규식과 그 친구들이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쓰레기 집단과 마주할 때의 익숙한 압박. 그때 그날들의 비참하도록 수치스러운 기억. 내가 창녀와 무엇이 다른가를 고민하던 그 시간들이 다 한꺼번에 빛의 속도로 달려와 내 심장에 날카로운 칼을 꽂고 피를 뽑아낸다.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말도 나오지 않고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온 아난트가 남규식을 알아보고, 내 앞을 막아선다.
“야, 이은수! 많이 컸네… 보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이거지? 어리고 잘생긴 연하 외국인이라... 외국애들이 데리고 놀다 버리기 좋긴 하지! 능력 좋네! 네 남편은 타지에서 열심히 돈 버느라 똥줄 빠지는 것 같던데, 넌 어린 애인하고 한국에 고급 호텔에 여행 다니고… 네 남편하고 술 한 잔 했어서 그런지, 갑자기 그 양반이 너무 불쌍하네. 아니다... 어휴... 그때 생각만 하면... 내가 그때 너희들 고소하려다 참았어, 알아?”
남규식은 제대로 의식이 없을 때 스치듯 만난 아난트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도에서의 일을 따지고 싶은데, 친구들 앞에라 자존심에 인도에서 희망고문 끝에 병원 신세까지 졌던 일을 하나하나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겠는 눈치다. 아난트가 싱긋 웃으며 말 같지 않은 말로 감정을 토로하기 시작하는 남규식의 말을 가로챈다.
“안녕하세요. 이은수 씨 - 레이디 은수라는 표현을 썼다 - 를 잘 아시는 분들인가 봐요. 인도 상류층 부인들을 모시고 한국에 여행을 왔어요. 저는 가이드, 아난트라고 하고요, 이은수 씨는 인도 상류층 부인들의 초대로 함께 오신 귀한 손님이에요.”
아난트의 수려하고 기품 있는 표정과 말투에, 남규식 일행의 얼굴에 비아냥기가 사라진다.
“아, 안 그래도, 인도 재벌가 부인들이 오늘 이 호텔에 도착하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같이 온 일행이시군요. 레이디 은수라… 재밌네.”
남규식은 영어로 친절하게 대꾸하다, 다시 나 들으라는 비아냥을 한국어로 낮게 흘린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갔던 아난트의 어머니가 나와, 남규식 일행을 보고 궁금해하니, 아난트가 힌디어로 낮고 빠르게 설명해 준다. 얼핏 부인의 표정에 경멸의 빛이 잠시 스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환하고 강한 햇살 같은 미소를 다시 머금어 내고, 손을 내밀며 유창한 영어로 인사한다.
“어머나, 반가워요. 우리 은수 씨 - 부인은 나를 영어로 미세스 은수라 칭했다 -와 아는 사이 시라고요. 내일 저녁 연회가 열릴 예정인데, 초대할게요. 오셔서 한국에 갈 만한 곳 소개도 해 주시고 자리를 빛내 주세요. 여기 친구분들도 다 함께 오세요. 매력적인 신사분들 꼭 함께 하고 싶네요. 꼭요!”
“기꺼이 그러지요. 초대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여왕의 명령이라도 떨어진 듯, 부인의 위엄에 기가 눌린 남규식이 두 번 생각도 않고, 바로 대답을 하더니, 순순히 물러난다.
***
“아! 씨발… 재수 없어. 퉷.”
화장실에 들어와, 유리에게 부인들을 따라 리무진으로 가있으라 한 후, 혼자 남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체크인을 마친 김종희가 들어온다. 상한 우유라도 한 모금 삼킨 듯 곧 토악질을 할 것 같은 얼굴이다.
“남규식하고 그 친구 새끼들 봤어. 이 새끼들 나가면서 인도 재벌 부인들이 어쩌고 저쩌고 떠드는 소리에 네 이름도 나오던데… 마주쳤어? 마주쳤구나!”
김종희는 이미 짐작했던 것을 새하얗게 질린 내 표정을 보고 확신한다.
“야, 정신 차려! 네가 이렇게 놀라고 기겁할 일 아니야.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들 아니야.”
“정말 그럴까. 내 잘못이 아닐까. 내가 찾아갔고, 내가 다시 연락했어. 내 선택이었어요. 한 번도 이건 아니라며 내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어요. 순순히 다 따랐어요. 내 주제는 모르고, 뻔뻔하게 남 탓만 하는 글을 써서 책을 내다니, 내가 미쳤었나 봐요.”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허우적대는 나를 구해내겠다는 듯, 김종희가 나를 감싸 꼭 끌어안는다.
“아니야.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너 유리가 지금 그런 말 하면 뭐라고 할래? 자기 잘못이라고,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어른들에게 아무 말 안 하고 피아노 배우러 계속 다닌 자기 선택이 잘못된 거라서 자기 글이 가치가 없다고 하면 뭐라고 할래?”
“걔는 아이잖아요. 분별력 없는 어린아이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고… 유리는 아무 잘못 없잖아요.”
“너도 나도 아이였어. 제대로 된 부모의 보살핌이 없는 역기능 가정에서 분별력도 자기를 지키는 방법도 배울 수 없었던… 어른이 돼서 어린애들을 유혹하고 유린한 저 새끼들 잘못이야. 애들은 존경하는 어른 믿고 의지한 죄 밖에 없는 거야. 은수야, 나도 나를 얼마나 혐오하고 미워했었는지 몰라. 나는 있지, 나를 미워하고 사는 게 지겨워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 그래서 그때의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어. 너에게도 분명 그게 최선이었던 거야. 자랑스러운 과거는 아니라도 더 이상 그 일을 나를 미워할 구실로 삼진 말자. 네가 너를 미워하기로 결정한다면, 너하고 똑같은 길을 걸었던 나도 나를 미워하지 않기가 힘들어져…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미워한다 해도,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고 잘 돌보는 것이 옳아. 은수야,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제발!”
내가 나를 자꾸 추궁하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사람들, 특히 같은 고통을 겪어낸 김종희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내가 스스로를 추궁하는 일은,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행실을 구실 삼고 잘못을 따지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을 판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그래도…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라는 김종희의 말을 온 힘을 짜내 붙들어 본다.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꽉 맞잡으며, 그 시간 속으로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는 자신을 붙들었다. 이제 그만 묻자, 내 잘못은. 충분히 미워하고 벌을 주었잖아. 더 이상은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지 말고, 저들의 비아냥을 참지도 말고, 강하게 일어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남 탓 좀 하자. 지금까지 내 탓은 충분히 했잖니? 이 책은 속시원히 제대로 남 탓 한 판 하고, 내 삶을 잘 살아나가기 위해 쓴 거야.”
나는 김종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맞다. 김종희의 말이 맞다. 내 안으로 향하던 칼을 뽑아내고, 내 억울함을 다 토로하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겠다고 유리와 함께 아난트가 제공해 준 사무실에서 글을 쓰던 때의 초심이 생각났다. 내가 어떻든, 저들이 정말 악질 쓰레기 지능범인 건 사실이다. 더 이상의 피해자 양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들이 하는 짓에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다. 당당히 일어나 저들을 압박할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마주쳤을 때, 나보다는 저들이 더 부끄러워해야 한다. 저들이야 말로 양심을 찢고 할퀴는 수치심을 감당하지 못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해가야 옳다.
“넌 여기 소파에 잠시 앉아 추스르고 있어. 내가 부인들, 방으로 인솔하고 다시 올게.”
"아난트 어머니가 그 인간들을 내일 저녁 연회에 초대했어.”
"뭐? 남규식하고 쓰레기들 말하는 거야? 내일 만난다고!"
"뭔가 계획이 있으신 것 같아. 일단 좀 쉬다가, 4시 티 타임에 모두 모이면, 말할 것이 있다고 하셨어.
"와! 예상이 안되네! 아난트 어머님, 정치력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던데... 와, 진짜 기대된다!"
생각지도 못한 아난트 어머니의 한 수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종희의 표정을 보면서, 나도 긴장이 풀리고 입가에 웃음기가 스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