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죄책감, 나의 수치심이여!

버리고 끊어내야 할 감정, 끌어안고 사랑해야 할 감정

by 하트온

가장 인간다운 감정


어쩌면 수치심, 죄책감은 다 같은 곳을 향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감정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얽히고설키는 모종의 공동작업을 통해 인간의 양심이라는 반듯한 원단을 짜내는 것은 아닐까. 사춘기와 함께 급습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들들의 감정적 혼란을 목격하면서, 나는 이것이 인간이 배우지 않아도 습득하게 되는 본성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엇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금기의 과일을 따 먹고 수치심을 알게 되었다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원죄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죄인의 죄성, 원죄가 불러온 인간의 고난 외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는 없다고 고집부린다면, 달리 반론을 제기할만한 어떤 명분도 내겐 없다. 태초의 신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정확히 밝혀 따질 지식도 없을뿐더러, 덕분에 인간이 타고나는 모든 것이 인간의 필요를 돕기 위한 축복인지, 약간의 벌칙이 섞여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며, 아무리 알려고 발버둥을 쳐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왜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수치심이나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단순히 죄성으로 받아들이 건, 아니건, 다 불완전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불완전한 이론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이런 감정들이 모든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소시오 패스나 사이코 패스라는, 인간의 죄성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비인간성'의 주홍글씨를 달고 사회가 주시해야 할 위험인물로 분류된다.


그러니, 수치심과 죄책감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이해받고 수용될만한 안전한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 인류가 인간 역사 대대로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해온 익숙하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수치심과 죄책감은 슬픔이나 분노처럼 고통스러운 부정적인 감정이므로 우리는 최대한 벗어나고자 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종교나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의지한다. 종교도 심리학도 결국 같은 것을 제안한다. 자신을 속이기보다 솔직하게 내면의 감정을 인정하고, 거부하고 도망치기보다 직면하고 수용해낼 것을 권한다. 나의 죄책감, 나의 수치심을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감정을 다루어 낼 수 있는 방향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수치심 다루기


미국에 살면서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미 상할 대로 손상된 자아상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바로 곁에서 본다.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그렇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끼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더하여, 피부색에 의해 결정된 편견과 이미지는 그들의 마음에 내재화된 인종주의를 형성하고, 이것은 곧 사회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과한 자의식과 극도의 수치심으로 연결된다. 미국의 서점가를 돌아다녀 보면, 그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분량의 수치심을 다루고 스스로를 사랑해 내기 위해 분투하는 아프리카계 작가들이 피땀으로 쓴 글들을 본다. 내가 개인적으로 얼마만큼의 수치심을 다루고 살아가건, 다민족 사회 국제 사회 안에서 그들이 느끼는 모든 관념과 감정을 뒤덮어 흔드는 수치심의 정도에는 감히 미치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모습, 자신들의 수치심을 다루어 내려고 그 감정의 늪에서 일어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큰 배움과 격려를 얻곤 한다.


수치심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분노로 돌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타민족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일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무모한 약탈과 폭동 뒤에는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에서 시작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한 서린 분노가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 타고난 죄책감 수치심과 뒤엉켜 아프리카계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향한 사회의 편견과 끔찍한 인종차별의 역사를 배우며 겪게 되는 정신적 정서적 혼란은 감히 타인종 입장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필요 이상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키우면 분노로 터져 나온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 감정들을 수용하되, 필요 이상으로 커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한국인은, 수치심이라는 말을 '자존심'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왔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은, 수치심이 자극되었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세다는 말은, 수치심에 많이 취약하다는 말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분노에 잘 사로잡히는 이유는 수치심에 취약한 성향이 쉽게 파고드는 수치심을 잘 다루지 못하여 분노로 전이되기에 이른다는 뜻이다.



취약한 수치심을 어떻게 다룰까


모든 종류의 해결은, 땅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잡초와 화초를 분별하고 제거해 나가기 시작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어떤 행동 뒤에 자연스레 드는 감정으로서의 죄책감과 수치심이 아닌, 내 잘못이 아닌 것들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과 죄책감은 과감히 걷어 내고 끊어내야 한다. 가령, 동네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하는 부모님 때문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아 자녀 때문에, 혹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몸 혹은 예쁘지 못한 내 외모 때문에, 제대로 된 보살핌과 사랑을 충분히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어떤 이유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끊어내야 마땅한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주는 감정을 내게서 끊어낼 때에야, 그쪽으로 들어오는 어떤 자극에도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해질 수 있다. 그래야 내가 평안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래야 산다.


그런 작업 후, 조금 남아 있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대해서는 사랑의 눈으로 포용하고 안아주는 일이 필요하다. 남아있는 그것들은 나를 더 겸허하게, 같은 고통을 받는 약자를 돕고 배려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큰 사람으로 만든다. 견딜만한 약간의 통증이 나를 늘 적당한 자극으로 깊이 생각하게 만들며, 부정적인 감정들을 헤쳐갈 길을 모색하게 만든다. 나를 변화시키고 강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생생하게 언어로 살아나 글로 성장한다. 비인간화를 부추기는 이 삭막한 시대에, 파닥파닥 살아 날뛰며 울고 웃게 만드는, 인간다운 감정을 가진 건강한 사람으로 남아 꿋꿋이 살아가게 만든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JacksonDavid)

이전 05화수치심은 자라, 주인을 때리는 괴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