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여행 중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나는 사실 숨기고 싶은 것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싫다. 숨기고 싶은 감정이 여전히 내 심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나에게 드러내는 일을 자꾸 미루라 한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써야 한다는 건 내 안의 한 목소리가 발휘하는 의지다. 그 의지는 써서 드러내는 것만이 살 길이라 말한다. 마치 내 안의 두 존재가 씨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갈등 분열하는 자아를 다루는 일이 힘겹지만, 나는 숨겼다 드러냈다 왔다 갔다 하는 이 이상한 글을 이어나가 보려 한다.
숨기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기준이 용납하지 않는 것들, 사회가 손가락질할 만한 것들. 내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명예를 훼손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들. 한마디로, 내놓기 부끄러운 것들이다.
내 안의 부끄러운 것들을 들여다본다. 나의 수치심의 중심에 나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원가족이 만들어 낸 삶의 모습은 내가 바라는 - 아마도 티브이나 교과서를 통해 습득한 -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7대째 독실한 불교신자 집안임에도, 자비나 긍휼 같은 건 눈을 백팔 번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고, 서로를 탓하고 원망할 이유가, 서로에게서 피해를 당한 상처가 조상 대대로 씨족 부락이 한 마을에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깊었다. 대대로 내려온 깊은 사연과 상처는 주변 어른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자아상까지 파괴하고,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수치심이 왔고, 화가 났고, 용서하지 않았고, 수용할 수 없었고, 사랑하지 못했다.
나에게 왔던 그 수치심. 그 수치심을 다시 꺼내 들고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 수치심은 나를 바라보던 사회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관념과 기준이라는 허상이 나의 존재를 향해 끝없이 손가락질을 하고, 나는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고 그 손가락질을 다 허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모든 것, 내 수치심을 자극하던 그 손가락 조차도, 가짜 허상이 아니었을까.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서로를 사랑할 줄 모르던 못난 사람들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고 미워하고 있었던 나도 다 모자란 - 지극히 자연스럽게 - 인간일 뿐이었던 게 아닐까. 이상향에 이르고자 하는 완벽 욕구만 버렸다면, 사실 아무 문제도 아닌 게 아니었을까.
드러내는 이유
미국에 와서 살며, 수치심에 매몰되어 허덕이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난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이유가 참 다양하고도 많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못하는 것. 불법 체류하고 있는 것. 한국이 아닌 연변 출신인 것, 도시가 아닌 시골 출신인 것. 강남이 아닌 강북 출신인 것. 남들보다 학벌이 없는 것. 미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존경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 미국에 청소년기에 와서 영어도 한국어도 어중간한 실력이 되어버린 것. 남들 다 가는 대학을 못 간 것. 대학을 갔지만 학위를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한 것.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것, 자식이 외국인과 결혼한 것, 자신이나 가족 중의 누군가가 이혼한 것, 가족중의 누군가가 장애인이거나 병에 걸린 것,... 세상은 넓고, 경험은 다양하고, 수치심을 느낄 일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수치심을 느낄만한 일이 맞을까? 부끄러워할 일이 맞나? 사람이 내내 그 굴레에 갇혀 당당히 얼굴을 못 들고 고통스러워해야 할 일 맞나?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이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는 수치심의 그림자들을 목격하며 깨달았다. 사람들이 모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무도 그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서 손가락질 해선 안 되는 걸로 스스로에게 손가락질하며 수치심의 늪에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꾸 부끄러운 것을 숨기려 덮어두려 할수록, 영원히 그 속에 갇혀 고통받게 된다는 것.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한 번은 열고 드러내 버려야, 그것을 뒤로하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사실 내다 버리고 지나가면, 다 한 때 지나가는 과정일 뿐, 별 거 아니라는 것을. 결코 나 자신을 정의하는 가슴에 달린 주홍글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일상이 가식이었던 사람이다. 아무에게도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이 없다. 내가 안정된 환경, 따뜻한 사랑, 충분한 이해와 인정 속에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노출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내 내면의 고통과 고민을 철저하게 숨겼다. 사람들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해, 다르다고, 저 사람은 사랑 많이 받고 자라 성품이 좋다고 떠드는 소리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건 참 듣기가 싫었다.
습기 눅눅한 지하실, 상처가 아물지 않고 썩어가는 냄새나는 곳에 자꾸 숨어 있으니, 내 몸에서 냄새가 나진 않는지, 더 자신이 없고, 괜한 말에 상처를 받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햇볕 한가운데로 나와야 했다. 아픈 데를 다 벌려서 깨끗이 말리고 치유를 받아야 했다. 더 이상 상처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야 했다.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
드러낼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내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대를 찾아 진실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수치심을 비롯한 각종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한 때의 어려움을 뒤로하고, 아팠던 만큼 성장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를 사랑하며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
나에게는 그 안전한 곳이 글이었다. 글만이 나에게 나를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래서 일상이 가식이더라도, 글에게만은 나는 최대한 진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게 하나밖에 없는 진실의 소통창구인 글과만은 아무것도 숨기는 것 없고, 거짓된 것 없는 맑은 관계를 맺어가고 싶었다. 글에게만은 나는 내 모든 것을 낱낱이 다 보여주고 싶었다.
내 속을 다 열어 보여주는 나에게 글은 자유를 주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다 쏟아 놓고 나는 훨훨 날아 앞으로 나아가라 하였다. 글이 진심으로 빌어주는 그 바람대로 나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결코 수치심 안에 매몰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글이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힘든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지, 힘든 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고. 수치스럽다고 느낄 만큼 사랑하기 힘들었던 아버지와 가족을 만나 힘들었다고 해서, 내가 평생 수치심에 갇혀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나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내 조상들의 삶이 미움으로 가득하다고 해서, 내 삶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고. 모든 것은 각자의 선택이라고.
그렇다.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삶이고 내 삶은 내 삶이다. 나는 외부 기준에 지독히도 휘둘렸던 아버지의 삶도, 학대로 핏물이 든 어머니도 삶도, 모두 다 뛰어넘어 버리고, 내 삶을 잘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을 남의 삶의 일부가 되도록 그 가운데 묻어두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글이 준 치유의 기회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그 뜻을 기리며 당당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이 수치심의 늪에 머물러 상처와 미움으로 썩어가지 않도록, 사랑의 온기가 환한 빛을 밝혀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바삭하게 말려 치유하고 따스하게 보살피는 삶이 되도록 '내가 꼭' 만들어 갈 것이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Sammy-Sa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