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여행 중입니다
나, 그리고 또 다른 나
수많은 심리 전문가, 학자들이 인간 자아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자아의 구성, 마음의 구조를 파헤치는 여러 학술 이론들이 있지만, 내가 일상에서 만나고 느끼는 자아는 '나(1)'와 '나(2)' 둘이다. 나(1)은 나이에 맞게 성숙하고 사회화된 '나'고, 나(2)는 내 내면이 생긴 모습 그대로의 원시적 본능적 '나'다.
첫 번째 '나' - 성숙하고 사회화된 자아 - 는 배움과 깨달음을 통해 변화할 수 있고, 상황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주변 환경이나 문화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자아다. 더 자신을 계발하고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이성적 판단과 기준에 따르고자 한다. 주변 환경에 의해 다듬어지고 빚어지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두 번째 '나' - 원시적 본능적 자아 - 는 사회적 필요를 무시하고, 자신의 심신의 필요와 본능에 충실하려는 태도 때문에 이기적이고 게으르다는 평을 들으며 사회적으로 환영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내면 상태 및 필요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진실성과, 자신만의 기준, 자만의 독특한 본질, 그 본질이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거대한 삶의 원동력을 보유하고 있다.
나와 나의 관계
각자가 천차만별 다양한 모습의 나와 나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처한 운명은, 이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감정에, 나아가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와 나의 관계가 최악이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첫 번째 자아가 약하고, 외부 기준에만 휘둘리며 소신이 없었을 때였다. 약한 자아는 나의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하기 힘들어했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수치스러워했고, 못 본 체, 없는 체 무시하며 지냈다.
처음 아기를 낳았을 때, 꼭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아기,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모델 아기와 행동도 반응도 다 달라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나는 아이와 둘이서만 남겨지는 게 두려울 정도의 혼란을 느꼈다. 아기의 신호를 읽을 줄 모르고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초보 엄마와 아기의 첫 시작은 엉망진창이었다. 항상 다른 성인 누군가가 내 곁에서 항상 나를 도와주었으면 했다.
두 번째 자아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던 첫 번째 자아는 혼자서 다른 자아를 마주하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다. 친구들과 하루 종일 팔짱 끼고 붙어 다니며 수다를 떨고, 공부건 운동이건, 뭐든 타인과 함께 하고 싶어 하고, 무리 속에 섞여 있어야 안심이 되던 나. 나는 사람에게 의존적인 사람의 전형이었다. 친구들에게 매일 밤 전화를 걸고, 내가 보고 겪은 것들을 친구들에게 시시콜콜 보고하였다. 나의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함부로 하며 아까운 청춘의 시간들을 함부로 흘려보냈다. 내내 나는 나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미국에 오고 나서, 나는 피할 도리없이, 나와만 남겨지는 순간들을 감당해내야만 했다.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두 번째 자아는 혼자 마음대로 자신을 몰아붙인 첫 번째 자아에게 불쑥불쑥 화를 내며 반항하기 시작했고, 늘 시선이 밖으로 향하고 사람에게 의존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게 버릇이 된 첫 번째 자아는 고립감과 외로움, 기준을 잃은 고통에 발버둥 쳤다.
이해할 수 없고, 엉망이 되어 가는 느낌에 나는 미쳐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끝내 상담을 받아 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절친한 회사 동료를 통해 소개 받아 찾아간 상담사에게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 들어본 말 중 가장 지혜롭고 중요한 말을 들었다.
당신이 당신을 돌봐 줄 수 있어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말을 충분히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도와야 한다는 말은 내 사고방식에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 번도 신경 써 주지 않고, 민낯이 드러날까 숨기기에 급급했던 내면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나와 나의 밀회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항상 제한하고 가두었던 나의 두 번째 자아에게 드디어 마음껏 자유를 주고 할 말을 다 들어주겠다는 느낌으로 글을 썼다. 처음엔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의 첫 번째 자아는 감정적으로 두 번째 자아의 거친면들이 여전히 부끄럽고 보기 싫었지만, 어떻게든 이해하고 돕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고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 네가 욕할 만 하지. 그동안 무시당하며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을까.
그동안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두 번째 자아는 과장하고 욕하고 난리를 쳐야 누군가 한 번이라도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심한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 몹시 불우하고 절망적인 할렘가 소년의 끝없는 욕지기 랩 같은 과격한 언어 총탄의 포연이 가라앉고, 표현이 간결하고 담백해지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의 담담한 글에 이르기까지 약 1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첫 단편 소설을 썼던 2007 -2008년 당시만 해도, 내 언어는 거칠고 장황해서, 독자가 불쾌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글에 이르려면 수십 번의 퇴고를 거쳐야 했었다.
글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된 건, 두 번째 자아가 첫 번째 자아를 믿을 수 있게 되면서였다. 나를 들어주는 나, 나를 이해해 주는 나, 나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는 나,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사랑해 주는 나임을 드디어 믿게 된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나의 사람 돌보기 신공은 득도 수준에 이르렀다. 못나도 '금쪽같은 내 새끼'고 내 새끼만은 희생을 다해 키워내는 어머니처럼, 나는 나의 두 번째 자아를 가장 소중한 내 새끼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양육하고 훈육하겠다고 각오와 다짐을 하고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전심 전력을 다 하는 양육을 받으며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거름이 충분히 마음에 전해지자, 두 번째 자아가 무럭무럭 성장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자아를 돕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첫 번째 자아가 확실히 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자아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재능과 소신, 삶을 힘차게 이끌어 가는 원동력의 열쇠를 두 번째 자아가 쥐고 있었다. 첫 번째 자아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도 감히 자신의 삶을 드러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기발할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머리로만 글을 쓸 수는 없었다. 머리만으로 짜내는 글은 속없는 만두 같은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쓸 수 없는 종류의 글을 보면서 비교의식이나 열등감에 빠지기가 쉬웠고, 그것은 좌절감, 슬럼프, 번아웃으로 곧장 이어지곤 했었다.
놀랍도록 강하게 성장한 두 번째 자아에게 글을 맡기기 시작하자,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밀림의 전사처럼 전진하며 속사포의 언어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어느 다른 누구도 흉내 낼 필요도 없는 진짜 나만의 글이 터져 나왔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열정과 저력이 두 번째 자아에게 있었다. 첫 번째 자아는 내 새끼를 위해 서점에 가서 좋은 책을 골라주기도 하고,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어 주고, 힘든 일을 해 내면 내 새끼가 신나 할 만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기도 하며 지지하고 도왔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믿으니까 두 번째 자아의 태도가 크게 변해갔다. 귀찮고 힘든 건 안 하려 하고, 항상 쉽고 편리한 눈앞의 즐거움을 선택해서 첫 번째 자아를 실망시키고 속상하게 만들곤 하던 두 번째 자아는, 첫 번째 자아가 권하는 대로 말을 듣고 따르기 시작했다. 매일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편한 인스턴트보다 다소 불편해도 건강한 집밥을 해 먹으려고 노력했다.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글을 꾸준히 쓰고, 독서를 했다. 본업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교육에 마음을 일으키고 돌보겠다는 지극정성이 담기니, 내가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 180도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자아가 계획한 일들을, 두 번째 자아가 전심과 진심으로 도우니, 모든 것이 사명이 깃든 의미 있는 일이 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아가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열매를 보지 못하던 일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놀라운 경험들의 회오리 속에서, 첫 번째 자아가 두 번째 자아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네가 가진 큰 재능을 미리 알아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내 방치했던 거 미안해.
철이 제대로 든 두 번째 자아가, 첫 번째 자아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실 처음엔 원망을 많이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땐 너도 몰랐고 어렸더라고. 네가 한 모든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해서였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어.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준 네가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네가 열심히 발버둥 쳐준 덕분에 나는 아파 누워있던 중에도, 교육도 잘 받고, 좋은 직장도 가져보고, 미국까지 와서 새로운 경험을 끝없이 하는 행운을 얻게 된 거라고 생각해. 네가 여러 가지를 부지런히 시도해준 덕분에 내가 글감도 풍부하게 갖게 되었고. 결국 지금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사는 데 있어야 할 것들이 있기 위해서 그 모든 과정이 필요했다고 생각해. 내 감정이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했던 과거까지도, 지금 글을 쓸 목소리를 풍부하게 채우기 위해 꼭 있어야 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나를 찾아 주어서 고마워.
나는 나만 있으면 되니까
나와 나, 둘은 무조건 서로의 편인, 사이 좋은 절친이 되었다. 함께 돕고, 함께 일하니, 어디서건 정서적으로 의존할 타인이 필요치 않다. 나와 나의 대화가 원활하니, 타인에게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내 감정을 하소연할 필요도 내 입장을 호소할 필요도 없다. 안정감이 있고, 자신감이 있어, 어딜 가든 당당하고 여유가 넘친다. 덕분에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엄청 부자이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너무 많이 가져서 아쉬운 거 하나 없는 사람의 여유가 내면에서 흘러넘쳐, 나라는 사람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나의 긴밀한 연합과 협력이, 진짜 성공을 이룬 자신감과 성취감으로 내 삶을 채운다. 나와 나의 서로 돕는 보살핌이 서로를 일으키고 세운다. 나와 나의 끈끈한 우정과 유대감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기 시작한다. 나와 내가 시작한 오래 참고 돌보는 사랑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내면이 허기져 고통에 허덕이던 나와 나는, 세상에 나눠 줄 내면 재산이 넘치는 '내면 부자'가 되었다. 내면이 피겨 스케이팅이나 축구 같은 올림픽, 월드컵 종목이라면, 나는 내면계의 김연아, 손흥민 정도가 아닐까 하는 자신감을 남몰래 품고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아무런 금전적 보상도, 명성도 없지만, 나는 나와 내가 함께 이룬 내면의 성공에 대해, 늘 설레고 기쁜 승리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