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괴로움이 다 수치심 때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즐겁게 완벽하게 살아가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 동산에 수많은 과실나무를 심으시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도록 허락하셨다.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만은 먹지 말라고,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아담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셨다.
어느 날 뱀이 나타나 묘한 말재주로 하와를 꼬드겼다. '하나님이 동산 나무 실과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면서?'라고 뱀이 말을 시작하자, 하와는 '아니, 동산에 있는 나무 과실 다 먹어도 되는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그러면 죽을 거라고 하셨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뱀이 이렇게 받아친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희 그거 먹어도 안 죽어. 그거 먹으면, 너희 눈이 떠져서 너희가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걸 하나님이 아시는 거지.' 그 말을 들은 하와는, 그 열매가 너무 예쁘고 탐스러워 먹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되면 좋겠다는 욕망이 생겨 그 열매를 따 먹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권해, 그도 그 과일을 먹게 된다.
선악과가 뱃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그들은 수치심의 폭격을 받는다. 자신의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하나님을 뵐 낯도 없어 숨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 사실여부를 따져 물으시니,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여자 하와 때문이라며, 하와는 뱀이 꼬여서 그리했다며 남 탓하기 바쁘다.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아는 일은 인간의 내면에 수치심의 폭격을 부른다. 하나님은 그걸 이미 알고 계셨다. 수치심에 잠식되면 인간은 하나님도 다른 인간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가득한 인간, 주변 사람에 대한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원망이 가득한 존재가 될 것임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수치심이 사람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현대는
그때와 지금의 인간의 상황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인간은 끊임없이 각종 세상 기준 앞에서 수치심에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다. 예수가 '내가 너희의 수치와 죄를 다 갚으러 왔다. 이제 너희들은 자유롭다. 이 좋은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라'라는 말을 남겼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지키고 넘어야 할 기준, 받아내야 할 인정이 크게 보일 뿐, 예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모두가 아직 '나만'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만' 이상해서, 나만 못나서 이런 수치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빠져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하게 번듯하게 멋진 모습으로 다 갖추고 잘만 살아가는 것 같다.
심리학이 발달할수록, 수만 가지 복잡한 정서적 병명을 고안하고 있다. 그만큼 내가 잘못된 인간일 가능성도 더 커졌다. 인격장애를 앓고 있을 수 있다느니,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것이라느니, 자폐 기질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느니,... 이 모든 '명명'이 병증을 규명하고 사람을 돕는 측면도 있겠지만, 한 편으로는 인류 전체가 처한 사회 전체적 문제를 개인 각자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나만의 수치심이 아닌 우리 모두의 수치심임을 자각하고
태초부터 전인류가 대대로 수치심의 고통을 받아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부끄러워 끄집어낼 수 없으니 모두가 각자의 내면에 내내 쉬쉬 덮어와서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기에, 끄집어 내놓고 사회 전체의 문제로 다루어 나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모두 수치심과 연결된 것일지 모른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으리 만치 악하고 폭력적인 사건 사고들 뒤에 분노로 변질된 수치심이 잠복해 있는 것일지 모른다. 공감받지 못하고 도움받지 못하고 오래 찌들어온 수치심들이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것일지 모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각종 기준을 들이대며,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수치심 권하는 사회>를 쓴 브린 브라운 박사는 그녀의 저서를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We cannot grow when we are in shame, and we can't use shame to change ourselves or others.”
(우리가 수치심에 잠식되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성장할 수 없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나 타인을 변하게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 할 때도, 비지니스로 돈을 벌고자 할 때도 상대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대대로 여전히 쓰고 있다. 모두가 수치심의 고통을 알면서, 타인이 느끼는 수치심의 고통에 대해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돌봐 줄 마음이 없다. 패션 잡지들과 비지니스들은 어린 소녀들이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수치스러워, 모델처럼 되려고 섭식장애의 고통에 빠지건 말건 상관없고, 학벌주의 서열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시스템과 교육 비지니스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이 세운 '스카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치심에 절망하고 목숨을 끊어도 상관없다. 타인의 수치심을 자극해 내가 돈을 벌고,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면 그뿐이다. 남의 고통보다 눈앞의 이익이 우선이다.
문제는, 남의 고통이 남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사회에 만연한 수치심의 고통은 나 자신과 내 가족을 향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수치심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변화시킬 수도 성장시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대 사회의 너무 많은 너무 높은 기준들이 사회 전체에 지독한 수치심의 독을 뿜어 대고 있는 걸 직시할 때가 되었다. 수치심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들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쉬쉬할 때 더욱 강해지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더욱더 간과해선 안 되는 무엇이다. 수치심은 부지불식간에 마음에 스며들어 순식간에 잠식해 나간다. 수치심은 우리에게서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고, 사회와 단절시키고 극심한 고립감의 고통 속에 가두어 버린다.
우리는 이제 제대로 고민해야 한다. 나와 타인을, 이 사회 전체를 수치심의 고통에서 구하는 길을.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CCXpistiav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