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분리한다

자유롭고 기쁜 삶으로 가는 길

by 하트온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내가 오래 무서워 해온 것은 '거절감'이었다. 거절 자체가 아닌, 거절감. 연결이 끊어지는 것 자체가 아닌, 고립 자체도 아닌, 이후에 마음에 남아 맴도는 자괴감. 너는 연결할 가치가 없다는 소외감. 그것이 몹시도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 들끓는 감정들을 거짓말 같이 평온한 얼굴 뒤에 숨겼고, 갈등의 기미가 조금만 보여도 벌벌 떨며 저자세를 취했다. 갈등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나를 향한 타인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부정적이 되는 것이 무서웠다.


첫사랑이었던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나는 죽음, 전쟁을 생각할 때와 비슷한 느낌의 어둡고 막막한 공포의 감정을 느꼈다. 몹시 심한 정서적 통증이 잇따랐다. 이별을 결심한 남자 친구의 고통이나 고민이 어디서 오는지를 가늠하고 소통할 여유가 없었다. 당시의 나에겐 소통의 능력이 없었다. 감정을 생각과 조화시켜 언어로 풀어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 소통의 부재가 친구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상대와 관계를 이어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친구와의 관계는 통제되지 않는 불확실과 불안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나는 몹시도 그 관계가 존재하기를 원했고, 위로와 설렘의 공급처로 의존하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고통이 내 심장을 후려치고 파먹어 갔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처음 경험하는 거절이 아니었다. 이미 내 삶 안에 분리와 거절의 고통이 가득했다. 제대로 된 연결이 없었다. 진정한 소속감의 결핍이 너무 심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끊떨어진 연처럼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에 매달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나에겐 그 남자 친구가 연이 겨우 휘감겨 붙어있는 마지막 나뭇가지 역할을 하는 유일한 관계였던- 꼭 그렇길 바라고 믿고 싶었던 -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나뭇가지에서 실이 풀려나는 그 느낌. 혼자 하염없이 휘청이며 추락하는 연. 그것은 내게 죽음과 몹시도 비슷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의 트라우마로, 이후부턴 새 남자 친구를 만나다가 조금이라도 감정이 변화한다는 느낌이 들면 내가 먼저 연줄을 끊어 버렸다. 내가 더 잔인한 공격을 하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 두렵지 않은 이유는


해피 앤딩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면서 나는 충분한 안정감을 주는 소속을 얻었다. 덕분에 어딘가에 끈을 이어 붙이려는 필사적인 갈망도 욕구도 다 누그러졌다. 하지만, 나에게 충분한 소속의 자리를 내주는 가정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분리를 경험하고 거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는 일 자체가 두려웠고, 나와의 연결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일도 불편하고 괴로웠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고통은 관계를 통제하지 못하는 내 안의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의 항상 변화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나는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인생이 변할 자유를 주고, 인간관계가 변화하고 소멸할 자유를 주면 되는 것을. 인간관계가 생성되면 생성되는 대로 기뻐하고, 소멸하면 소멸하는 대로 또 새로운 인간관계를 기대하며 즐거워했으면 좋았을 것을. 관계를 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잘 이끌어 갈 것이고,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더 좋은 일로 마무리될 거라 믿었을 것을.



지금 깨닫는 것은


내가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어쩌면 변화하는 것,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일이 일어나는 것, 통제가 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익숙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익숙한 것으로부터 거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삶은 어차피 분리의 연속인데, 나는 인생의 본질 그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어남 자체부터 엄마의 모태에서 분리되고, 내가 자란 익숙한 집에서 분리해 나와 독립을 이루었고, 뱃속에 품고 있던 자녀를 분리시키고, 결국 집에서도 떠나보내고, 결국은 배우자와도 분리하게 된다. 자의로 분리하지 않고 백년해로한다 해도, 죽음이 갈라놓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 가족을 제외한 인간관계의 현실은 어떤가. 한때 가까웠다 분리된 관계들이 남기고 간 소외감의 흉터에서 새어 나오는 고름, 그리고 이미 반쯤 분리되어 너덜너덜해지고 있는 관계들은 처리 못하고 끼고 사는 쓰레기처럼 내 삶 곳곳에서 거절감의 악취를 풍긴다. '우리 모두가 시궁창에 살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결국 통제 안되고 시궁창으로 치닫는 그 모든 관계의 분리가, 내 어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옥좨던 공포 그 자체였다!



관계는 분리해도 나는 괜찮다


분리를 공포의 대상으로 놓았던 것. 그것은 인생을 알지 못하는 나의 미성숙이고 오판이었다. 인생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변화무쌍한 사건들의 연속인 것처럼, 인간의 삶과 사유가 담긴 언어가 끊임없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관계도 살아 변화하는 유기물 그 자체인 것을 받아들이고, 통제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더라면 나는 진즉에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지만, 떠날 때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동안 많이 사랑하고 많이 즐기면 된다. 사람이 가면 또 사람이 온다는 사실을 믿고,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열린 자세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면 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연결할 수 없는 관계들도 있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연결이 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그것을 감사하면 된다. 인생은 관계의 연결과 변화와 분리의 연속이 될 것이고, 그것에 관계의 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나에게 어떤 관계가 스쳐 지나가도 나는 그것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들어 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 나는 어떤 색 어떤 모양의 관계를 통해서 건 기쁨을 발견하고 성장과 배움을 얻어낼 것이라는 것을 끝까지 믿어주면 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은 인생의 본질이 아니다. 인생의 본질은 불확실한 변화, 끊임없이 다른 바람을 이끌고 몰아치는 파도 같은 것이다. 안주하고 평온하고자 하면 우리는 인생이 세월의 파도에 맞고 부서지는 풍파였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고 파도타기 선수가 되면, 우리는 다음 파도, 제대로 센 파도를 기다리며 설렘과 즐거움을 느꼈노라고 고백하게 된다. 밀려오는 모든 파도는 결국 사라지고 흩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겪는 모든 것은 태어나 변화하고 사라지고 흩어지는 것이라서, 그래서 모든 순간순간을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 모든 파도의 경험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기는 법을 배워야만 인생의 파도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행복으로 남는다.


파도를 맞을 것인가, 탈 것인가. 파도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가, 기다림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가. 관계는 연결되고 분리할 것이다. 관계는 분리하고 또 연결될 것이다 관계의 분리를 두렵게만 생각할 것인가, 그 속에서 아름다운 성장, 새로운 연결의 희망을 볼 것인가. 내 인생을 두려움으로 몰아갈지, 설레는 기회가 가득한 즐거운 변화로 볼지. 시선의 온기와 용기를 조절하는 주인은 나. 모든 것이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 인생은 불확실한 변화의 연속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어떤 변화 속에서도 항상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그렇게 굳게 정하면 된다.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Takmeom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