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미니멀리스트, 니체
지금까지 지상을 지배해왔고 또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좀 더 세련되지만 거친 많은 도덕을 편력하면서, 나는 어떤 특질이 규칙적으로 서로 반복되거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결국 나는 두 가지 기본 유형이 드러났고,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났음을 알았다. 즉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 있다... 고귀한 인간 - 주인 도덕을 따르는 존재 -은 그와 같이 고양되고 자부심 있는 여러 상태이다. 고귀한 인간은 그와 같이 고양되고 자부심 있는 상태의 반대를 나타나는 인간들을 자신에게서 분리시킨다... 노예 도덕은 본질적으로 유용성의 도덕이다. 노예 도덕에 따르면 '악인'이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주인 도덕에 따르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선인(善人)'이며, 반면 '나쁜' 인간은 경멸할 만한 인간으로 느끼게 된다... 노예 도덕이 우세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언어는 '선함'과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서로 접근시키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가 제발 버리라는 것
니체는 그의 저서 <선악의 저편, In Beyond Good and Evil>에서 문명사회 속에서 뿐 아니라 각 사람의 심리 안에서도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이 발견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나는 선악을 초월하는 주인 도덕 - 힘과 고귀함과 독립심을 중요시하는 -,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정과 친절과 겸손을 중요시하며 선악을 따지는 노예 도덕이다.
니체는 노예 도덕을 보편적 문화를 따르는 개개인의 심리 속에서 발견한 이후, 그의 모든 책, 그의 모든 글 사이사이 이런저런 표현으로 바꿔가며 '노예근성'을 내면에서 떨쳐낼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노예근성은 작은 안락에 안주하려는 '쇠퇴하는 말세인'의 정신이며, 쉽게 원한 감정, 혐오, 질투, 시기심을 품고, 모든 일에 무기력하고 게으른 태도로 남 탓이나 하며,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뒤에서 비열한 방법으로 끌어내리기나 하는 '저열한 속성'이다.
그럼에도 노예는 자신이 선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겸손하게 낮추고 순종하고 헌신했으니 선하다는 것이다. 아예 몸을 저자세로 낮추고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는 것을 순하고 착한 것이라고 정의해 버렸다. 주인처럼 구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 보편적 기준으로 모두를 옭아매기에 이르러 버렸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 자신의 본성을 당당히 내세우고 주인 행세를 하는 자는 못된 자, 잘난 척하는 자, 악인이 된다. 노예의 도덕에 빠져있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당한 만큼 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으며, 그나마 노예답게 알아서 바닥을 기는 진정한 노예 정신을 보이는 자들들에 대해서도, 잠시 마음이 편해지고 흡족할 뿐, 거기에 사랑은 없다. 사실 속으로는 같은 노예를 향해서 '너도 별 볼일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깊은 경멸과 불신을 품고 있다. 오직 자신만이 옳다. 분명한 선과 악을 갈라놓고 그 선을 넘지 않고 지키는 스스로가 '도리'를 다하는 '법 없이도 살' 참된 도덕 군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그의 내면 속에선, 주인에게 억압당한 원한, 피해자로서의 스스로에 대한 연민, 무기력하고 약한 자신에 대한 한 없는 동정심이 스스로를 더욱더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을 뿐이다. 속은 한 없이 부정적이고 비뚤어져 고장 나 버린 지경이다. 더 이상 홀로 일어설 수조차 없다. 떠먹여 주는 사람 없이는 배우고 성장하는 일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몹시도 나약하고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명령이 없이는 혼자 자기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주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남의 생각 남의 시선 눈치나 보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기술도 좋고 일도 잘 하지만, 남들이 봐주지 않을 일은 나서서 할 마음이 없고, 나의 열정으로 혼자서 이끌어갈 내적 동기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주인 도덕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 자신의 내면 그대로의 본성이 지향하는 대로 당당히 독립적으로 용기 있게 나아간다. 남에게 자신에 대한 평가를 맡기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면 그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 보지 않는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고독과 친구 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낸다. 자신이 단단한 소신을 가진 만큼 타인의 다른 생각들을 포용하고 더 넓게 사랑할 수 있다. 니체는 선과 악의 족쇄에 스스로의 발목을 묶어 두는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보다 가볍고 즐거운 주인의 도덕을 입고 힘 있게 행복하게 영웅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노예근성
실제로 많은 한국인의 조상은 오랫동안 노예의 삶을 살았고, 일본 압제 동안은 일본 통치자들에게 나라 전체가 노예의 삶을 살기도 했다. 겨우 해방을 맞았지만, 너무 오래 파리 목숨 같은 위태로운 삶을 겨우 이어가는 고난 속에서, 사람들의 정신은 몹시도 병약해져 버렸다. 높은 채 하던 양반들이 먼저 나서 나라의 주권을 넘기고 돈 꽤나 받는 노예장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부터, 독립 열사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이후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하는 과정까지 지켜보며,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신념이 분명해졌다. 노예 정신에서 벗어나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생각을 가지고 의견을 가지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의지 따위는 억압하고, 최대한 등을 둥글게 말아 저자세를 취한 채, 노예장과 좋은 인맥을 유지하여 가능한 편하고 돈 많이 받을 가능성이 있는 노예 자리를 찾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노예장이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면, 나도 그렇게 하고, 아이들을 유학 보내면 나도 그렇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영리한 선택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아직 이 뼛속 깊이 뿌리내린 노예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의 교육열은 자녀를 최대한 '높으신 분' 눈에 들 노예 인간형으로 빚어내기 위한 강박- 아직 혼돈에서 깨끗이 벗어나지 못한 -이며, 누가 이 길이 아니라고 말한 들, 이 안락하고 안전한 노예 정신에서 벗어날 생각이 사실 눈곱만큼도 없다. 철저한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급이 다르고 재산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재빨리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띄우고 부드럽게 좋은 말을 하는 능력을 발휘할 줄 안다. 그러나, 같은 노예급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렇지 않다. 특히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혹은 자신보다 못해 보이고 못 가진 듯 보이는 사람들이 눈치 보고 굽실거리는 저자세를 취하지 않을 때 가장 화를 낸다. 가장 가까운 예를 찾자면, 시어머니들이 자신을 평생 부려먹고 고생시킨 남편이나 아들을 미워하는 것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눈치 없는 며느리를 훨씬 더 깊이 미워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이 노예 정신으로 평생을 긴장하며 살았던 만큼, 눈치껏 자세를 낮추고 기지 않는 며느리에게 화가 난다. 가장 힘없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는 이런 부정적이고 비열한 감정의 흐름이 어딜 가나 이어진다. 학교, 군대, 사회 곳곳에서 왕따 갑질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내가 노예 정신에 찌들어 있을수록, 나에게 노예 자세를 갖추지 않는 이들에게 화가 난다. 노예 정신이 강할수록, 아랫사람들이 서열을 분명히 따져 굽실 거려 주길 원한다. 그래야만 내가 평생 노예로 억압 속에 살아온 원한이 조금은 보상받고 풀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노예 입장에서 가장 화나는 상황은, 같은 노예였던, 계속 노예여야 할 존재가 앞으로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당당하게 노예 정신을 벗고 자신을 극복하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설 때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밑도 끝도 없는 당당함으로 자신을 세우는 자들에게 가장 화가 난다. 그때 노예들은 질투와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이 돌아 버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느니, 눈치 없는 인간이 가장 재수 없다느니, 제발 둥글둥글 살아라라느니, 온갖 말을 쏘아댄다.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자를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노예 정신을 배신한 본보기를 잔인하게 보여주고 싶어 진다.
노예 정신을 벗는 용기가 필요하다
니체는, 어떤 화살을 맞고 어떤 미움과 질시를 받더라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고귀한 귀족 정신을 입으라 한다. 니체의 말은 옛날 조선시대 같은 계급사회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과거의 귀족들이 그만한 숭고한 삶으로 모범을 보였다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귀족 정신, 고귀한 정신은, 요즘의 '주인 정신'에 가까운 말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자는 뜻이다. 세상 어떤 것에도 노예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니체에게 노예의 정신은 쇠퇴하는 정신이며 인간을 망하게 하고 죽이는 정신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이 되게 하는 정신이다. 반면, 그가 말하는 고귀한 주인 정신은,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정신이고, 강하게 하는 정신이다. 생동하고 창조하게 하는 예술가 정신이며, 자신을 극복하고 운명이 불러오는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맞이하는 도전자, 위버멘쉬 정신이다.
노예로 사는 한, 우리는 그러한 '주인 정신'을 결코 입을 수 없다. 먼저 내 안의 노예를 자각하고 벗어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감하고 용감한 철학 미니멀리스트 니체는 그런 자신을 망하게 하는 정신을 깨끗이 벗어버리라고 제발 벗어버리라고 거듭거듭 충고한다. 노예 정신을 입고 죽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런 죽은 자들의 사회가 점점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안타까운 니체는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경고하고 또 경고했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도덕과 정신이, 혐오와 미움과 분노, 낮은 자존감과 우울 무기력감으로 무너져 가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노예 정신이 너무 뿌리 깊게 썩어들어가 역한 냄새를 풍길 지경이 되었다는 증거다. 이젠 주인이 되어 당당히 내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몰아가는 정도가 너무 심해, 옳은 정신, 강한 정신으로 나아가려고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까지 불안과 혼란으로 몸을 사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인도 아티스트도 모두 노예 정신과 비굴하게 타협해야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사회에서, 옳은 말을 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다.
불안하다면, 화가 난다면, 도무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외치라. 노예 정신을 벗어버리겠다고 선언하고 빠져나오라. 내 정신을 다시 아기로 태어나는 것처럼 비워 내 버리라. 내 속에 있는 것이 지킬 만한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 버리고 싹 비우라.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이 세상 왕의 자손, 귀족이고 주인이라는 당당하고 강하고 고귀한 정신을 입자. (이것은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실제 나의 가족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 나의 정체성은 주변 환경도 제 3자의 시선도 아닌 내가 정한다. 이제부터 내가 삶 속에서 겪는 것은 나를 억압하는 무엇이 아니라, 나를 강한 귀족으로 단련시키는 훈련 과정이다. 나에게 더 이상 명령하는 주인 같은 건 없다. 나를 휘두를 시선과 기준도 없다. 모든 것은 내가 정하고 내가 책임진다. 내가 나의 운명의 주인이니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나에게 도전하는 적이 있다면, 나를 점점 강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환영해 버리라. 내 삶에 휘몰아치는 거친 운명은 내 삶을 더 아름답게 다듬어 갈 나를 성장시킬 가치 있는 도전으로 맞아 버리라. 자신을 극복하고 일어나 초인이 된 고귀한 정신은 내게 말한다.
나는 점점 더 인생 본질 그대로를 아름답게 보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러고 나서 나도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모르파티-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 이제부터는 내 운명을 사랑하자! 나는 추하다고 맞서 싸우고 싶지 않다. 나는 비난하고 싶지 않다. 나는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눈길을 피하는 것이 내 유일한 부정적 반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 나는 언젠가는 (내 운명이 불러오는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니체, <The Gay Science>
나를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 나를 억압하고 누르는 모든 것, 나답지 않은 내가 아닌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나면, 내 삶을 용기 있게 정직하게 드러내고 나면, 나 자신을, 내 삶을 아름답게 여기며 나아가는 소박하고 숭고한 긍정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부디 두려워하지 말고, 내 안의 노예를 벗고, 주인으로 강하게 일어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