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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여, 언제든지 올 테면 와라!

[독서 기록 에세이] 허먼 멜빌과 떠나는 모비딕 항해

by 하트온

<모비딕>의 화자 이스마엘은 어느새 고향 맨해튼을 떠나, 고래잡이들이 모여 항해를 떠나는 포경업의 중심지인 '뉴베드퍼드' - 미국 매사추세츠 주 남쪽 항구도시 - 에 도착했다. 이스마엘이 정작 가고 싶어 하는 곳은 매사추세츠 앞바다에 있는 '낸터컷' 섬이다. 18세기 초부터 남북전쟁 전까지 포경업의 중심지였다는 이 섬은 이스마엘에 고래잡이를 떠나려던 당시 점점 쇠퇴하고, 뉴베드퍼드가 새로운 핫 플레이스, 포경업 중심지로 떠오르는 중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뉴베드퍼드보다, 포경업 발상지이자, 오랜 포경업 전통을 가진 낸터컷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듯하다.


나는 낸터컷에서 떠나는 배가 아니면 타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 유서 깊고 이름 높은 낸터컷 섬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다 거칠고 사나운 느낌... 최근에는 뉴베드퍼드가 서서히 포경업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이 점에서 낸터컷은 가엾게도 뉴베드퍼드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낸터컷은 포경업의 발상지이고,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온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통나무 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처음 출격한 곳...


작가 멜빌은 낸터컷에서 시작된 포경업에 대한 역사를 샅샅이 찾아 공부했을 것 같다. 그 지역에 관한 책을 읽고, 여러 번 찾아가 탐사도 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작가가 낸터컷이라는 지역에 매료되고 그 역사에 감동한 마음이 화자 이스마엘의 기호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스마엘이 처한 상황은 돈이 떨어져 은화 몇 닢 밖에 없고, 낸터컷으로 가는 소형 정기선은 이미 떠나버렸으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불안한 마음과 살을 에는 매서운 공기를 불어대는 검고 음산한 밤이 밀려오고 있다. 자신의 형편에 맞는 허름하고 값싸 보이는 숙박업소를 찾기 위해 황량한 바닷길을 걷고 또 걸어 눈에 띄게 기울고 낡은 집-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간판이 붙은 -을 찾아 들어갔다. 처지가 불우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밤이지만, 이스마엘은 스스로를 이렇게 달랜다.


... 징징거리는 짓은 이제 그만두자. 우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난다. 앞으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신발에 얼어붙은 얼음을 떨어내고, 이 '물보라 여인숙'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물보라 여인숙'은 오랜 세월 수많은 고래잡이들이 스쳐간 흔적과, 고래잡이와 관련된 도구와 무기들,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골동품들로 가득하다. 여인숙 주인으로 보이는 '요나'라는 노인은 고래 머리 모양을 본떠 만든 카운터에 앉아 - 마치 성경 속의 요나가 고래 뱃속으로 삼켜졌던 것처럼 -, 숙박객들에게 술과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이스마엘은 돈이 없으니, 좋은 방을 얻을 수도, 술을 얻어 마실 수도 없다. 그는 술 마시는 뱃사람들 구경이나 하고, 낯선 작살잡이와 한 침대를 써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뱃사람들을 구경하다 만난 특이한 선원 한 명을 - 나중에 이스마엘의 동료가 되는 '벌킹턴'- 인상 깊게 보고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약간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혼자 맨송맨송한 얼굴로 있는 것이 동료들의 유쾌한 기분을 망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지만, 어쨌든 다른 선원들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대체로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바다의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라 그는 곧 내 동료가 되었으므로, 여기서 그를 간단히 묘사해 두겠다. 키는 180 센티미터가 넘었고, 어깨는 딱 바라졌고, 가슴은 댐 같았다. 온몸이 그렇게 억센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자를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짙은 갈색을 띠었고, 그래서 하얀 이가 대비되어 더욱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눈의 깊은 어둠 속에는 그에게 별로 기쁨을 주지 못하는 듯한 추억이 감돌고 있었다. 목소리는 그가 남부 출신이라는 것을 당장 알려주었고, 그 크고 당당한 체격으로 보아 버지니아 주의 앨러게니 산맥에 사는 덩치 큰 산골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이스마엘과 다시 만나게 되는 뱃사람이라니 뭔가 기대가 된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뱃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억센 근육의 몸을 갖게 되었을까. 어떤 삶의 여정을 거쳐왔으며 어떤 추억들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일까. 벌킹턴이라는 사람을 더 알아가고 싶고, 이스마엘과 어떤 인연으로 엮이게 될 것인지도 궁금하다.


이스마엘이 함께 침대와 이불을 공유해야 하는 운명으로 만난, 작살잡이 '퀴퀘그'라는 인물도 독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잔뜩 미국으로 가져와 밤늦게 까지 팔러 다니는 장사치라는 주인의 설명을 듣고, 이스마엘은 그에 대해 야만인 식인종 이교도라는 판단을 즉시 내린다. 그를 만나기도 전에 불쾌하고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이스마엘이 살포시 잠이 들려하는 순간, 한밤중에 나타난 퀴퀘그는 어둠 속에서 봐도 외모가 보통 특이한 게 아니다. 온몸이 네모꼴 문신으로 얼룩덜룩하고, 피부색 또한 불그죽죽하면서 누리끼리한 것이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피부색을 띠고 있다. 머리카락은 이마에 혹처럼 난 머리털 한 줌이 다다. 게다가 하는 행동도 너무 이상하다. 나무로 만든 목상 우상에게 제를 지내는 듯한 행동을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끔찍한 손도끼를 입에 물고 잠자리에 든다. 공포감에 혼비백산한 이스마엘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퀴퀘그도 놀라 죽일 듯이 덤벼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마침내, 달려온 주인장의 설명으로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퀴퀘그가 자신을 해칠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요구도 잘 따라주고, 어딘지 모르게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너그럽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이스마엘은 마음을 놓고 푹 잠을 청한다. 잠자리에 들며 그는 자신이 품었던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교도나 기독교도나 그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내가 이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같은 이유로 이 사람도 나를 두려워했을 거 아닌가. 술에 취한 기독교도보다는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자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렇게 단잠을 잔 것이 난생처음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깊은 잠을 잤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퀴퀘그가 나체인 몸에 모자부터 쓴다거나, 바지를 입기 전에 부츠부터 신는다거나, 기독교인들 - 이스마엘이 익숙한 미국 동북부 지역의 대다수 사람들 -과 다르게 얼굴은 빼고 가슴과 팔과 손만 씻고, 비누 거품을 얼굴에 바르고 작살 날로 면도를 하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이교도적인' 행동에 또 한 번 깜짝 놀라야 했다. 이스마엘은 고래잡이 뱃사람들과 퀴퀘그와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뱃사람들과 퀴퀘그의 독특한 점들을 관찰한다.


"술청은 간밤에 들어온 투숙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거의 다 고래잡이였다... 일등 항해사, 이등 항해사, 삼등 항해사, 배 목수, 배 통장이, 배 대장장이, 작살잡이, 배지기 등, 모두가 털보에다 햇볕에 검게 탄 사내들이었다. 머리는 다듬지 않아서 더부룩하고, 하나같이 실내복 대신 선원용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상륙한 지 얼마나 됐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젊은이의 건강한 뺨은 햇볕에 잘 익은 배의 빛깔을 띠고, 거의 사향 냄새를 풍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인도 항해에서 돌아온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옆에 있는 저 사내는 안색이 젊은이보다 약간 밝아 보인다. 마호가니 색이라고 해도 좋다. 세 번째 사내의 안색은 아직도 열대의 태양에 그을린 황갈색을 띠고 있지만, 그래도 약간 표백된 느낌이다. 그는 틀림없이 몇 주 동안 육지에서 건들거리며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퀴퀘그 같은 뺨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다양한 색깔이 줄무늬를 이룬 그의 뺨은, 안데스 산맥의 서쪽 비탈처럼, 기후대에 따라 뚜렷이 대조적인 기후를 한 줄로 배열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식탁에 앉은 뒤 내가 고래잡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난처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나운 바다에서 커다란 고래를, 난생처음 보는 고래를 조금도 수줍어하지 않고 다가가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인 노련한 선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교적인 아침 식탁에 둘러앉아서는... 목장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양들처럼 얌전하게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수줍어하는 곰들! 겁쟁이 전사 같은 고래잡이들! 얼마나 희한한 광경인가! 그런데 퀴퀘그... 작살을 식탁에까지 들고 와서 함부로 휘둘러 사람들을 겁준다든가, 작살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비프스테이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꼴... 하지만 그는 그런 행동을 아주 태연스럽게 했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다수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든 태연스럽게 하면 신사다운 행동으로 평가한다... 퀴퀘그가 커피와 따끈한 빵은 먹지 않고 설익은 비프스테이크에는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담할 줄 알았는데, 사교적인 자리에서 수줍어 말을 못 하는 뱃사람들,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이스마엘이 보기에 어이없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을 태연하게 하는 친절하고 나름 예의 바른 퀴퀘그... 이들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 멜빌이 가진 뱃사람들에 대한 호감과 이해, 타문화 이교도에 대한 너그럽고 열린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야만인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 자신의 문화 안에서는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일 사람들을 함부로 선입견과 편견으로 판단하고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래잡이 배를 타면 만나게 될 유형의 사람들을 이스마엘은 일찌감치 관찰하고 파악하고, 무엇보다 그들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있다. 우리 모두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을 통해 만나게 될 사람들, 나와 많이 다를 사람들을 충분히 미리 관찰하고 이해를 쌓은 후, 마음을 열고 호감을 갖고 시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퀴퀘그 같은 별난 사람을 본 충격이 점점 사라져 가고, 다양한 이방인들과, 거칠고 우락부락한 고래잡이 선원들의 모습에 익숙해질 때쯤, 이스마엘은 포경업으로 돈과 명예를 얻어보겠다고 찾아온 젊고 건장한 풋내기들을 마주한다.

숲에서 나무를 베던 자들이 도끼를 집어던지고 고래작살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대개는 그들의 고향인 그린 산맥처럼 새파랗다. 어떤 면에서는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된 갓난애 같다. 저쪽을 보라! 점잔을 빼며 길모퉁이를 돌고 있는 저 녀석. 비버 모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연미복 차림에 선원용 벨트를 두르고 칼집에 넣은 칼을 차고 있다. 저기 오는 또 다른 녀석은 방수모에 털외투를 걸치고 있다.... 시골 멋쟁이가 뛰어난 명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고 포경업에 참여하면, 그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항해용 복장을 한 벌 맞추는데, 조끼에는 방울 모양의 단추를 달고, 범포로 만든 바지에는 가죽끈을 매달기도 한다. 가엾은 촌뜨기여! 으르렁거리는 강풍이 몰아치면 그런 가죽끈 따위는 단번에 끊어져버린다. 그때는 가죽끈이며 단추만이 아니라 너 자신까지 태풍의 아가리 속으로 휩쓸리게 될 것이다.


이미 배를 타본 경험이 있는 이스마엘은, 새로이 이 일에 뛰어들겠다고 찾아와, 뱃사람 패션을 따라 하는 풋내기들을 다소 비웃고 있다. 그는 그들의 모습이 진기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감정이 조롱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처하게 될 거친 운명을 아직 모르는 젊은이들이, 갓 태어난 아기와 같다고 묘사하는 것에서 이스마엘이 느끼는 감정이 묘하고도 복잡해 보인다. 아마도, 그들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것, '죽음'이라는 거대한 화두가 턱 하니 그들의 길 앞에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제 이스마엘은 떠나기 전 이 '바다 한가운데서 객사할 수도 있는 운명'이란 것을 마주하고, 겨루어 내야만 한다. 그는 뉴베드퍼드의 '고래잡이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인도양이나 태평양으로 떠날 날이 다가와 기분이 울적해진 어부들은 거의 다 일요일에 이곳을 찾아온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배당에 온 사람들은 일부러 남들과 떨어져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조용한 슬픔은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있어서 남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추모비... 1836년 11월 1일, 열여덟 살 나이에 파타고니아 앞바다의 데설레이션 섬 근처에서 실종...'엘리자'호의 승무원들로서 1839년 12월 31일 태평양 근해 어장에서 고래에게 끌려 실종되었다... 1833년 8월 3일 일본 연안에서 뱃머리에 서 있다가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고 사망... 나는 퀴퀘그가 바로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자리의 엄숙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에는 불신자의 호기심으로 경탄하며 지켜보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포경업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예배당에 앉아 있는 여인들 가운데 몇 명은 비록 평상복 차림이긴 했지만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이 얼굴 표정에 또렷이 떠올라있었으니까,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그 황량한 명판을 보고 동정하여 아직 아물지 않은 가슴의 상처에서 다시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오! 죽은 이들을 초록빛 풀 밑에 묻은 사람들, 꽃 사이에 서서 "여기, 바로 이곳에 내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쓸쓸함을 알지 못한다. 검은 테를 두른 저 대리석 밑에는 한 줌의 재도 들어 있지 않으니, 그 공허는 얼마나 쓰라린가!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는 저 비문 속에는 얼마나 큰 절망이 숨어 있는가! 객사하여 무덤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거부하고 모든 신앙을 갉아먹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 속에는 얼마나 지독한 허무감과 자발적인 불신앙이 담겨 있는가! 저 명판들은 여기보다는 오히려 엘레판타 동굴 (인도 뭄바이 엘레판타 섬에 있는 힌두교 석굴 사원) 속에 세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침묵시키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덤 속에서 노크 소리가 난다는 소문만으로도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하지만 신앙은 재칼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먹이를 찾고, 이런 죽음의 회의 속에서도 가장 활기찬 희망을 주워 모은다... 그 어둡고 우울한 날 희미한 빛 속에서 나보다 먼저 간 고래잡이들의 운명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알고 있다. 객사한 고래잡이의 죽음이 어떠한지. 사랑하는 가족들, 자신을 알았던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종류의 쓰라리고 공허한 구멍을 남길 것인지. 마치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기독교적 부활 신앙에 반대하는 불신앙이고 불순종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의 제사는 여기 이 기독교도들의 예배당이 아니라 저 이교도 땅에서 지내는 것이 더 어울릴 듯 느껴진다. 문득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삶이 이교도의 땅으로 밀려간 자의 객사처럼 느껴진다. 또한 내 삶은 어떠한가. 고향을 떠나 타국 땅으로 밀려난 삶. 언젠가 여기서 죽게 된다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한 때 잘 알았던 사람이 먼 땅의 길거리에서 객사한 것처럼 느껴지는 삶이 아니겠는가. 아니 20대 이후에 나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겐 이미 나는 그들의 마음에서 객사하고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고래잡이의 운명 앞에서 이스마엘은 끝까지 이 선택을 고수할 수 있을까?


그래 이스마엘, 너도 저런 운명을 당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든 나는 다시 쾌활해졌다. 이건 어서 배를 타라는 유쾌한 권유, 출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래, 내가 탄 보트에 구멍이 뚫리면 나는 불멸의 존재로 출세하는 셈이지.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처넣고 마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매우 잘못 생각해온 것 같아.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인지도 몰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흐린 물을 가장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내 몸뚱이는 더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일 뿐인지도 몰라. 원하는 사람은 내 몸뚱이를 가져가도 좋다. 맘대로 가져가. 이건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낸터컷을 위해 만세 삼창! 구멍 뚫린 보트, 구멍 뚫린 몸뚱이는 언제든지 올 테면 와라. 하지만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으리라.


이스마엘은 죽음을 출세의 기회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몹시 종교적이고 플라톤 철학 같은 관념론적 발상 같다. 그가 나고 자란 뉴욕과 북잉글랜드 지역의 청교도 문화를 비난하고 있지만, 육신은 존재의 찌꺼기일 뿐, 영혼은 영원히 불멸의 존재로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 그의 중심은 기독교 사상의 바탕 위에 굳건히 서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 시대의 미국 정신 자체가 이러한 기독교적 기반에 플라톤적 이상과 세계적인 트렌드로서의 낭만주의가 결합하여 초월주의라 부르는 어떤 방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철학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건, 다시 쾌활해진 이스마엘이 나는 반갑다. 그를 쾌활하게 했다면 그 철학은 어디서 시작된 어떤 종류의 철학이건 가치 있는 한줄기 빛, 행복한 관점일 것이다.


나는 내 삶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볼까. 어차피 타지에서 객사할 인생, 나는 고래잡이 배를 타고 떠나온 모험 인생이라고 여길 참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머나먼 곳에서 홀로 조각배를 타고 나의 숙명 고래와 목숨을 건 처절한 싸움 중이며, 내 조국 땅 뭍에 사는 사람들에게 먼 곳에서 일어나는 꿈 같이 신비한 바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될 참이다. 죽음이여, 올 테면 와라! 가슴을 찢는 인종 혐오 사건도 어처구니없이 여기저기서 수시로 발발하는 총기 사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 죽음은 나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되는 지름길일 뿐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래잡이를 떠나기 전에 이스마엘이 마주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그의 사색과 결단에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계속 궁금하고 설레서 그를 따라다녀 본다.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3-7장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fur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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