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에세이] 허먼 멜빌과 떠나는 모비딕 항해
소설 <모비딕>은 이스마엘이 예배당에 찾아가는 경험과, 그 예배당에서 만난 메플 목사와 그의 설교를 담기 위해 장장 3 챕터에 해당하는 소설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나 치기 어린 반항심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작가 허먼 멜빌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뉴잉글랜드 땅에서 나고 자라며, 그 문화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성경을 꼼꼼히 탐독하고, 진짜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깊이 사색하여 자신만의 신앙관을 확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메플 목사라는 인물은 멜빌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목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건장하고 기품 있게 생긴 노인이 들어왔다... 그가 바로 고래잡이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저 유명한 메플 목사인 것이다. 그도 젊었을 때는 선원이요 작살잡이였지만, 오래전에 성직에 몸을 던졌다... 인생의 겨울에 접어들었지만 추위를 잘 견디는 건강한 노인으로, 마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제2의 청춘을 꽃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주름살 사이에서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홍조가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2월에 내린 눈 밑에서 고개를 내미는 봄의 신록 같았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 모험으로 가득 찬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성직 생황을 접목시킨 그에게서는 독특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가 들어왔을 때 나는 그가 우산도 받지 않고, 마차도 타지 않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수모에서 진눈깨비 녹은 물이 흘러내리고, 헐렁한 선원용 외투가 물먹은 무게 때문에 그를 마룻바닥 쪽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도 고래잡이 경험이 있는, 고래잡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 그리하여 고래잡이와 고래잡이 가족의 삶을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자. 노년에 접어들었으나 노년 육신의 황폐한 몰락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내면을 갖추고 있는 자. 어떤 어둡고 무거운 현실 무게에도 굴하지 않고 정신력으로 스스로를 일으켜 낼 수 있는, 그리하여 타인에게까지 부활의 기운, 봄의 새 생명을 말뿐 아닌 온몸으로 전할 수 있는 자. 성직자가 되었다고 더 높은 신분,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보통의 섬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박한 일상을 사는 사람.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 멜빌이 그리는 메플 목사에게서는 신 앞에 엎드려 굴복하면서도, 내면이 바로 서 있는 강하면서 겸허한 사람의 기운이 묻어난다. 그런 메플 목사가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단 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마엘은 메플 목사의 뜻이 담긴 이 설교단과 배에 오르듯 밧줄을 잡고 설교단에 오른 후 사다리를 감추는 그의 방식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메플 목사가 자신을 신체적으로 고립시키는 그 행위는 바깥세상의 모든 세속적 인연과 관계로부터 정신적으로 잠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느님의 충실한 종인 그에게 하느님 말씀의 고기와 포도주로 가득 찬 이 설교단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요새, 성벽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독일 라인 강변의 도시)인 것이다... 설교단 자체도 사다리와 그림에 나타난 것과 같은 바다 취향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보였다. 판벽널로 장식된 설교단 정면은 폭이 넓고 경사진 뱃머리와 비슷했고, 성서는 부리처럼 뾰족한 뱃머리를 본떠서 만든 소용돌이 장식의 돌출부 위에 놓여 있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의미로 가득 찰 수 있겠는가? 설교단이야 말로 이 세상의 맨 선두 부분이며,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그 뒤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 하느님의 격한 노여움의 폭풍은 그곳에서 맨 먼저 발견되고, 뱃머리는 맨 먼저 하느님의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순풍이나 역풍을 관장하는 신에게 순풍을 보내달라고 맨 먼저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이 세상은 항해에 나선 배다.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교단은 바로 그 배의 뱃머리인 것이다.
작가 멜빌은 예배당의 설교단을 항해에 나선 배의 뱃머리에 비유하며, 목사가 어떤 자세로 설교에 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자리, 삶의 여정에 순풍을 불어 달라고 맨 먼저 간절한 기도가 시작되는 자리, 쉼 없이 긴장하고 살펴보고 돌아보아야 하는 자리. 항해가 끝날 때까지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자리. 그 자리의 무게를 멜빌 작가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메플 목사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의 신앙관을 드러내는 듯하다.
메플 목사는 몸을 일으키더니,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운데로 모여 앉으라고, 부드럽고 겸손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잠깐 꼼짝도 하지 않더니, 이윽고 설교단의 뱃머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갈색의 커다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천장 쪽으로 쳐들고는, 매우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다 밑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친애하는 선원 동료 여러분. <요나서> 1장 마지막 절을 펴세요.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느니라.'... 요나의 죄는 하느님의 명령을 고의로 따르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가혹한 명령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시키고자 하는 일은 모두 우리가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복종하려면 우리 자신을 거역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복종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거역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요나는 불복종의 죄를 짓고도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함으로써 하느님을 더욱 우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나는 인간이 만든 배를 타면 하느님의 지배가 미치지 않고 이 지상의 수령들만 지배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 세상 끝까지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괴로운 나머지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그가 느끼는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깊은 혼수상태가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서서히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은 상처이고, 그 상처를 지혈할 방법은 없으니까요... 고래는 하얀 이빨을 수많은 빗장처럼 단단히 걸어서 요나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자 요나는 물고기의 배 속에서 꺼내 달라고 주님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중요한 교훈을 얻으세요. 요나는 너무 죄가 커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이 곧바로 구원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서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그는 모든 구원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여기에 만족합니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그는 여전히 하느님의 성전을 바라볼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진실하고 성실한 회개가 있습니다. 용서해달라고 시끄럽게 울부짖지 않고, 벌 받는 것을 고맙게 여기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런 태도가 하느님에게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결국 요나가 바다와 고래로부터 구출되는 것에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요나의 죄를 본받으라고 요나를 여러분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본보기로서 내놓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마세요. 하지만 만약 죄를 지었다면 요나처럼 그 죄를 회개하세요... 또 하나의 더욱 두려운 교훈은... 신에게 선택받은 요나는 예언의 길잡이, 즉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사악한 니네베 사람들에게 달갑잖은 진실을 말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자기가 불러일으킬 적개심이 두려운 나머지 사명을 내던지고 도망쳤습니다...'고래는 몸이 떨릴 만큼 춥고 어두운 바다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쾌적한 태양 쪽으로 공기와 땅의 기쁨을 향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내려오자, 온몸이 멍들고 완전히 지쳐버린 요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허위'의 면전에서 '진실'을 설교하는 것!... 이것을 무시한다면, 살아 있는 신의 뱃길 안내자에게 화 있을진저! 현세의 즐거움에 홀려서 복음의 계율을 저버린 자에게 화 있을 진저!... 남을 놀라게 하기보다 기쁘게 해 주려고 애쓰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선행보다 평판을 더 중시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 세상에서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세상에서 버림받은 주제에 남들에게 설교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목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손을 흔들어 축복을 내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모두 예배당을 떠나고 혼자 남을 때까지, 얼굴을 가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경에서 고래 이야기가 나오는 <요나서>를 고래를 매료된 멜빌은 얼마나 읽고 또 읽었을까. 그 이야기 속에서 요나에게 주어진 사명, 요나의 죄, 하나님이 싫어하신 것, 다시 요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자신의 영혼을 위한 교훈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까? 멜빌이 메플 목사의 입을 통해 설명한 두 가지 교훈은, 요나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죄의 결과로 주어진 모든 것마저도 감사하며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 한 가지는 기독교 종교 지도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편한 자리에서, 사람들의 기분에 맞춰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문제시되고 반발을 사더라도, 기분 좋은 말이 아니라 뼈아픈 충격과 공포가 되더라도 자신이 전해야 할 말을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 성직자가 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평판에 연연해서는 안된다는 것, 안락한 삶이 주는 쾌락에 빠져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존심과 품위만 지키려고 애쓰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잃은 쓸모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가 끝나고 이스마엘은 다시 어젯밤부터 묵고 있는 '물보라 여인숙'으로 돌아오고, 그보다 조금 일찍 예배당을 떠났던 모양인 퀴퀘그를 만난다. 그는 퀴퀘그가 하는 행동,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
나는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그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는 야만인이었고 얼굴은 보기 흉하게 손상되어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결코 불쾌하다고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의 영혼을 감출 수 없다.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문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순박하고 정직한 마음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고, 크고 깊은 눈, 불타는 듯한 검고 대담한 눈 속에는 수많은 악귀와도 맞설 수 있는 기백이 드러나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이교도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고결한 데가 있었고, 그의 거친 무례함조차 그 고결함을 손상시키지 못했다... 야만인들은 원래 이상한 족속이어서, 때로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처음에는 지나칠 만큼 위압감을 주지만, 단순함에서 나오는 그들의 차분한 침착성은 소크라테스의 지혜처럼 느껴진다...
퀴퀘그는 절대로 남에게 먼저 접근하지 않았다. 교제 범위를 넓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몹시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태도에는 무언가 숭고한 것이 있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던져져 있었지만, 마음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는 완전한 평정을 유지했고, 자신을 벗 삼아 혼자 지내는 데 만족했고, 늘 자신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 확실히 이것은 훌륭한 철학의 특징이었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꽁꽁 얼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상처받은 심장과 미칠 듯이 성난 손은 이제 더 이상 늑대처럼 탐욕스럽고 잔인한 세상을 혐오하지 않았다. 이 선량한 야만인이 이 세상을 되찾아 주었다. 그는 무심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무심한 태도는 문명의 위선과 간사한 허위 따위는 전혀 숨어 있지 않은 천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분명 야만인이었고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불가사의하게 끌리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을 주었을 바로 그 특징들이 그렇게 나를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기독교적 우애란 허울뿐인 예의에 불과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까, 어디 한번 이교도와 우정을 나누어보자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그 도끼 파이프를 번갈아 가며 피웠고... 비록 이 이교도의 가슴속에 나에 대한 무관심의 얼음이 숨어 있었다 할지라도, 이 유쾌하고 친밀한 흡연이 그 얼음을 삽시간에 녹여버리고 우리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되었듯이 퀴퀘그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담배를 다 피우자, 그는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비비며 내 허리를 끌어안고는, 이제부터 우리는 결혼한 사이라고 말했다. 퀴퀘그의 고향에서는 그 말이 진정한 친구라는 뜻이고, 필요하다면 나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뜻이었다.
이스마엘은 퀴퀘그를 바로 곁에서 관찰하며, 그의 순박하고 단순한 고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힘을 느끼며, 자신의 청교도 세계가 형성해 놓은 잣대와 기준들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야만인이라고 첫인상으로 경멸했던 이 존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 기독교 사회 안에서 경험했던 그 모든 허울과 위선과 가식으로 인해 닫혔던 마음의 문, 세상에 대한 혐오의 빗장이 열리고, 지금까지 야만이라 불렀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다시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관계를 맺고 포용할 수 있으리만치 스스로의 마음이 넓어지고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는 더 이상 퀴퀘그에 대한 호감을 자제할 수 없고, 퀴퀘그식의 급속도로 불타오르는 - 보통의 미국 사람들이라면 의심을 품고 뒷걸음질 칠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 우정 속으로 뛰어들어 버린다. 그런 이스마엘의 활짝 열린 우정에 퀴퀘그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우정으로 화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구가 되지 마자 퀴퀘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이스마엘과 나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또다시 사교적 잡담과 담배를 나눈 뒤, 함께 우리 방으로 갔다. 그는 향유를 바른 두개골을 나한테 선물하고, 거대한 담배쌈지를 꺼내더니 담배 밑을 손으로 더듬어 30달러쯤 되는 은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은화를 탁자 위에 벌여놓고 기계적으로 이등분하여 그중 한몫을 내 쪽으로 밀어내면서 그건 내 몫이라고 말했다. 나는 거절하려 했지만, 그는 은화를 내 바지 주머니에 쏟아 넣어 내 입을 막아버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진정한 친구와 나누는 퀴퀘그의 우정에 웃음과 감동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좋은 건 다 같이 하고 싶은 퀴퀘그는 이스마엘에게, 우상을 앞에 두고 같이 기도하자고 청하기에 이른다. 이스마엘은 잠시 멈칫하며 깊이 고민한다. 기독교 교리는 우상 숭배를 배신 행위로, 하나님을 질투로 분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죄로 치는데, 자신이 퀴퀘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것인지, 동의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결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엄격한 장로교회의 품에서 태어나 자란 어엿한 기독교도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야만적인 우상 숭배자와 함께 나무토막을 숭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숭배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했다. 이스마엘, 너는 지금 하늘과 땅 - 이교도를 포함하여 - 을 주관하시는 관대하고 고결한 하느님이 하찮은 나무토막에 질투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숭배란 무엇인가? 신의 뜻을 행하는 것, 그것이 숭배다. 그러면 신의 뜻은 무엇인가? 이웃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이다. 이제 퀴퀘그는 내 이웃이다. 나는 이 퀴퀘그가 나한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와 함께 장로교회의 특정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도 그의 예배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상 숭배자가 되어야 한다.
내 마음의 중심에 하느님의 자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건재하다면, 친구가 바라는 무엇을 함께 해 주는 것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웃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 주라는 하느님의 뜻을 기리는, 하느님을 숭배하는 참 신앙의 행위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퀴퀘그가 하자는 대로, 그가 하는 방식대로 우상을 세워놓고, 건빵을 태워 제를 올리고, 우상 앞에서 절을 하고, 우상에게 입을 맞춘다. 그렇게 이스마엘과 퀴퀘그는 서로를 향한 애틋한 우정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고, 잘 지켜낸다.
야만인이라고 불쾌하고 불편하게만 생각했던 이교도 이방인 타인종 퀴퀘그에게 마음을 열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어젯밤까지는 분명, 그와 한 침대에 자는 것이 끔찍하고, 그가 우상에게 제를 지내는 모습도 낯설고, 침대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싫었는데, 오늘은 절친과 침대에 누워 떠들며, 친구의 따뜻한 체온을 곁에서 느끼는 것이 행복하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관점에 따라 상대적으로 이리저리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멜빌은 이스마엘 화자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이 인생을 살며 통찰한 모든 것의 '상대성'을 설파한다.
네 무릎 (퀴퀘그와 이스마엘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어서 네 무릎이 붙어있다)을 바싹 끌어당겨 서로 모으고... 무척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문밖이 추웠기 때문에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더욱 아늑하게'라는 말을 쓴 것은, 몸의 따뜻함을 즐기려면 몸의 일부가 추워야 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의 모든 특성은 비교에 의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면에서 편안하다고, 오랫동안 그래 왔다고 으스대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편안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침대 속에 들어가 있는 퀴퀘그와 나처럼 코끝이나 정수리가 조금 춥다면, 전반적인 의식 속에서는 가장 즐겁고 명백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침실에는 난로를 설치하면 안 된다. 침실의 난로는 부자들의 불편한 사치에 불과하다. 담요만으로 바깥공기의 차가움을 막고 아늑함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 눈을 감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느낄 수 없다. 우리의 육체적 부분에는 빛이 더 맞지만, 실은 어둠이야말로 우리 실체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 같다... 간밤에는 그가 침대 위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뻣뻣한 편견도, 사랑이 솟아나 그 편견을 구부리기 시작하면, 얼마나 부드러워지는가. 지금 나는 퀴퀘그가 비록 침대 속이라 해도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때 그는 가정의 평온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친구와 같은 파이프로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담요 한 장을 함께 덮는 농밀하고 내밀한 편안함만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짜증 나는 상대의 행동을 사랑스럽게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행동을 좋게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고 멜빌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기준, 내 몸에 익은 기준을 녹여 없앨 수 있어야 한다. 상대를 향해,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데 저렇게 행동한다고 평가하고 비난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으려면, 내가 내 방식만이 옳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저렇게 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어. 저 사람의 세계에서는 저렇게 하는 게 옳았을 거야라고 믿어주고 지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평가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좋게 보려고 노력해줬는데, 막상 그런 나의 존중하는 자세와 친절을 저자세라 여길까 봐 두렵다.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고 짓밟을 까 봐 두렵다. 내 기준을 낮추고 문을 여는 순간, 지금까지 세워온 내 세상의 뼈대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내가 쌓아가는 신념과 기준들이 잘못되고 혼란에 빠질까, 나만 휘둘리고 손해보고 호구가 될까 두렵다. 그래서 모두가 집 안에 숨어 산다. 아주 좁고 작은 창 하나만 뚫어놓고, 그 창으로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 창을 통해 보이는 그림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모두 나쁘고 잘못된 것으로 선을 긋고 멀리 하기로 한다. 그 좁은 창은 바로 깊은 편견과 선입견이고, 우리 대다수는 그런 찌그러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앞의 메플 목사의 설교에서 나왔던 내용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힘든 것은, 내 몸을 거역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데 동의한다. 하느님은 내 기준을 낮추고 마음의 문을 열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지만, 내 몸은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두려워하는 내 몸을 거역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두려운 마음이 절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을 거역하고 문을 열고 먼저 다가가야 한다. 이스마엘이 전날 밤 두렵고 불쾌한 마음을 한가득 품은 채로 퀴퀘그와 침대를 나눠 쓰러 그 방 안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퀴퀘그를 열심히 곁에서 관찰하고, 그의 선한 영혼에 마음이 녹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함께 해 주는 이스마엘에게 퀴퀘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퀴퀘그는 서쪽과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섬 코코보코 (폴리네시아 섬으로 추정)에서 태어났다... 퀴퀘그의 야심 찬 영혼 속에는 때때로 나타나는 포경선 몇 척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기독교 세계를 더 많이 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는 대추장, 즉 왕이고 숙부는 대사제였다. 외가 쪽에는 무적의 전사들과 결혼한 이모들이 있다고 퀴퀘그는 자랑했다. 그의 혈관 속에는 훌륭한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가 교육을 받지 못한 청춘기에 익힌 식인 습관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 피는 심하게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 새그 항을 떠난 배 한 척이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의 후미로 들어왔을 때, 퀴퀘그는 기독교 세계로 태워다 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필사적인 배짱과 기독교 세계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감동한 선장은 마침내 마음이 풀려서, 배에서 편안히 지내도 좋다고 말했다...
선원들 사이에 지내는 동안 고래잡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외국의 조선소에서조차 노동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표트르 대제처럼, 퀴퀘그는 몽매한 동족을 계몽시킬 능력만 얻을 수 있다면 웬만한 치욕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동족을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아니 그보다는 지금보다 훨씬 선량하게 만드는 방법을 기독교도한테 배우고 싶은 열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래잡이로 일하는 동안 그는 곧 기독교도들도 비참하고 사악할 수 있다는 것, 아버지의 신하인 이교도들보다 훨씬 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퀴퀘그는 가엾게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세계는 자오선과 관계없이 어디나 사악하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이교도로 살다 죽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속은 예전과 같은 우상 숭배자였지만, 몸은 기독교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뜻 모를 말을 흉내 내려고 애썼다...
그는 원래의 직업인 작살잡이로 다시 바다에 나갈 작정이라고 대답했다... 나도 고래잡이에 나서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하고... 그러자 그는 나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지금 내가 퀴퀘그에게 느끼고 있는 애정과는 별도로, 퀴퀘그는 노련한 작살잡이였고, 따라서 상선 선원들에게 알려져 있는 바다는 잘 알지만 고래잡이의 비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 유용한 인물이 될 게 분명했다.
퀴퀘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의 문화에 따라 식인 풍습을 몸에 익히게 되었지만, 또한 왕의 아들로서 자신의 동족들이 좀 더 선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세계 안으로 들어가, 더 선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이 있을까 열심히 찾았지만, 그는 기독교/비기독교에 상관없이 인간 세계가 모두 사악하다는 것만 깨닫고 절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독교도들 곁에 남아 그들의 행동과 언어를 익힌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고래잡이 항해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같은 뜻을 가진 이스마엘과 퀴퀘그는 함께 고래잡이 선을 타기로 의기투합한다.
두 사람이 함께 낸터컷행 소형 정기선 '모스'호를 타려고 가는 길에, 청교도 문화에서 자란 백인 미국인 이스마엘과 폴리네시아인 이교도 퀴퀘그가 허물없이 우정을 나누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우스워하고 신기해한다. 마침내 '모스'호를 타고 보니, 두 사람의 우정을 비웃고 퀴퀘그 흉내를 내고 조롱하는 인종 차별주의자들도 있다. 단단하고 강한 퀴퀘그는 그런 자들을 한 마리 피라미 정도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퀴퀘그는 등 뒤에서 그를 흉내 내고 있는 젊은이 하나를 붙잡았다.... 힘센 야만인은 작살을 떨어뜨리고 젊은이를 두 팔로 끌어안더니, 거의 기적적인 솜씨의 힘으로 그를 높이 던져 올렸다. 젊은이가 반쯤 공중제비를 돌았을 때 퀴퀘그는 그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쳤다. 그러자 젊은이는 허파가 터질 것처럼 헐떡거리면서 두 발로 착륙했다..."선장님! 선장님! 악마가 있어요." 촌뜨기가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선장이 퀴퀘그에게 성난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외쳤다. "도대체 어쩔 셈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저 녀석을 죽일 뻔했잖아... 이 식인종 놈, 이 배에서 또 그런 짓을 하면 죽여버릴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 하지만 그때, 선장 자신이 조심해야 할 일이 일어났다.
큰 돛에 너무 큰 압력이 가해져서 아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거대한 활대가 뒷 갑판 전체를 휩쓸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퀴퀘그에게 혼이 난 그 가엾은 녀석도 활대에 휩쓸려 뱃전 너머로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퀴퀘그가 무릎을 꿇고 활대 아래를 능숙하게 기어가더니 밧줄 하나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밧줄의 한쪽 끝을 뱃전에 붙들어 맨 다음, 활대가 그의 머리 위를 홱 지나갈 때 밧줄의 반대쪽 끝을 올가미처럼 던져서 활대를 감았다. 이어서 밧줄을 힘껏 잡아당기자 활대는 올가미에 걸려들었고 사태는 무사히 수습되었다... 퀴퀘그가 웃통을 벗어부치고는 뱃전에서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긴팔을 앞으로 죽죽 내뻗으며,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물거품 속에서 건장한 어깨를 번갈아 드러내며 3분이 넘도록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물속으로 잠수하여 사라졌다. 몇 분 뒤에 그는 다시 물 위로 올라왔다. 한 팔은 여전히 힘차게 물을 젓고 있었지만, 다른 팔로는 축 늘어진 사내를 끌어안고 있었다....
시골뜨기는 의식을 되찾았다. 모든 사람이 퀴퀘그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했고, 선장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가 '인도 박애 협회'의 훈장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은 어디에 가든 상호 간의 공동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는 거야. 우리 식인종도 기독교도들을 도와줘야 해"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조롱하고 차별하는 자들 중 한 젊은이를 잡아, 퀴퀘그는 가소롭다는 듯 공중으로 던져 올리고 행동으로 그의 위력을 보여준다. 놀라운 힘을 느낀 젊은이는 혼비백산하여 선장에게 가서 '악마'가 자신을 괴롭혔다고 이르고, 선장이 와서 퀴퀘그에게 경고를 준다. 그 순간 큰 돛의 활대가 분리되어 뱃전을 휘젓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고, 퀴퀘그를 놀렸던 젊은이가 그 활대에 쓸려 바다에 빠지고 만다. 모두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에서, 퀴퀘그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백과 용기와 능력을 발휘하여 활대를 고정시키고, 얼음 같은 겨울 바다에 기꺼이 뛰어들어 젊은이의 목숨을 구한다. 모두가 인정하고 칭찬하는 영웅적이고 선한 일을 하고도, 퀴퀘그는 자신이 한 일을 대단치 않게 여긴 뿐만 아니라, 당연히 서로가 돕고 살아야지 생각하는 듯하다.
작가 멜빌은 진짜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청교도 사회라고 내세우면서, 모두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고 기세 좋게 미국 독립선언선에까지 적어 놓았으면서, 인종을 나누어 같은 기독교도 백인들에게는 잘하고, 타인종은 '야만인'이라고 비하하며, 그들의 목숨과 인권은 함부로 하는 미국 사회가 하는 일들 - 노예제를 비롯 - 이 옳은가를 고발한다. 이런 성찰이 없었다면, 미국 사회가 18-19세기 모습 그대로 내려왔다면, 얼마나 각종 차별과 인권 유린이 극심한 사회가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물론 이런 성찰의 노력에도 불구, 사회 전체가 변화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남북이 갈라져 전쟁까지 겪었어야 했다.
왜 <모비딕>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을까.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위업은 수많은 미국인들, 기독교인들을 위선과 선을 분별하도록 각성하도록 거대한 문화 혁명을 일으켰다는 데 있지 않을까 아닐까. <모비딕>은 미국 사회가 옳다고 믿고 살아가는 관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 문명인, 신앙인이라는 위선이 태어나는 자리를 정확히 짚어 냈고, 그 미개하고 무지한 생각에서 눈을 뜨게 만드는 미국판 르네상스 혁명 그 자체였다라고 생각된다. 19세기 초 여러 작가 여러 작품들이 미국의 르네상스기를 함께 만들었지만, 르네상스의 꽃은 야만인으로 불리는 선한 사람과, 문명인이라 불리는 위선자들을 대놓고 비교하며 꼼꼼히 따진 작품 <모비딕>에서 만발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31세에 이런 깊은 성찰과 통찰을 이런 기발한 작품으로 엮어냈다는 것이, 고래잡이 항해라는 메타포에 인간의 삶과 본성을 투영했다는 것이, 도무지 입을 다물 수 없는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깊이 매료되었고, 이젠 이 두 사람과 함께 고래잡이 배에 오를 수밖에 없다. 한 문장 한 문장, 캐릭터 하나하나가 의미 깊고 소중한 이 소설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보통 소설의 세 권 이상에 달하는 분량에 압도되어 첫 페이지를 펼쳤다가 덮어버리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퀴퀘그를 향한 이스마엘의 마음이 변했듯, <모비딕> 소설에 대한 나의 마음 또한 어느새 변해 있다. <모비딕>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이 어느새 씻어지고 없다. 이스마엘이 퀴퀘그에 했던 것처럼 용기 있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자세히 관찰하며 들여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더 이상 고래잡이 항해가 두렵지 않다. 선과 위선을 분별하는 이스마엘의 열린 마음과, 차별과 편견과 부조리로 가득한 뭍보다, 더 너그럽게 품어주는 바다를 향한 그의 갈망, 그리고 퀴퀘그의 단순하고 착한 마음과 듬직하고 힘세고 재빠른 뱃사람으로서 고래잡이 실전 능력이 추가되어, 나는 제대로 무장하고 떠날 준비를 완료한 든든한 느낌이 든다.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8-13장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furuno)